<15> 지금 시기 왜 민족, 민족주의를 논하는가②
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본 글에서는 ‘지금 시기 민족, 민족주의를 논하는 이유’를 주로 자주통일 분야를 중심으로 기술해 보겠다.
1. 남북 분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일제 시대에는 민족의 자주독립이 최고의 가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출현한 보다 하위의 사상이거나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가까웠다.
1945~53년을 거치면서 남북간에 분단이 고착되었다. 남북 사이의 분단은 여러 가지 중층적인 요인이 결합되어 발생하고 심화되었지만 기본은 민족주의와 보수반공, 민족자주와 한미동맹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단선단정론의 연장선에서 출현했고 4.19가 통일과 민족자립경제론으로 심화되는 반면 4.19를 거세하고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반공과 미국의 세력권과 결합된 근대화 노선을 채택한다.
일제 시대에는 불가분의 공동 운명체였던 하나의 민족을 남북으로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민족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파괴가 불가피했다. 이렇게 해서 민족을 최상위 가치로 하여 하위의 범주이거나 방법론에 불과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구성원은 민족이 될 수 없다는 보수반공론으로 대체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진전시킨 힘의 근원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기초한 통일이 자국의 이익과 배치될 것이라고 본 미국의 개입이었다.
역사를 위와 같이 개괄하면 분단을 가르는 핵심적인 대치선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라고 볼 수 있다.
(2) 시간이 흘러 남북에서 독자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이 진행되면서 남북 사이에는 민족 문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별도의 가치와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남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출현한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은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초한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가 아니라 남북에 존재하는 상이한 국가원리 사이의 문제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본다면 남북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선차적이고 중요한 것은 남북에서 정상적이고 발전된 시민적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현 노무현 정부나 시민사회운동 진영 다수의 생각이 이와 같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과 시각을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지적해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위의 입장은 엄밀히 말하면 자주통일보다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선으로 하여 전개된 사상 체계이다. 전통적인 입장이 민족자주와 통일을 기본으로 자본주의적인가 사회주의적인가를 사고한다면 이 견해는 자본주의체제의 합리적 개선을 주선으로 민족자주와 통일문제를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진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형성된 이론 체계를 민족 문제의 해결 공간인 통일문제에 무리하게 적용하여 통일문제의 기본 성격을 왜곡하고 있는 점이다. 분단의 핵심을 ‘민족주의와 보수반공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국가주의’의 대립으로 보거나 적대적 공생관계, 분단체제론 운운하는 발상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분석은 사실 해석에 대한 상이한 관점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실 왜곡에 가깝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논란 지점이 박정희 정부와 북의 민족주의에 대한 평가이다.
박정희 정부는 부분적으로 민족주의의 외피를 썼지만 본질은 조악한 반공주의의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조악한 반공주의를 공격하기보다는 박정희 정부가 부분적으로 차용한 민족주의를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재구성하여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억누르는 ‘집단주의, 국가주의’ 등으로 몰아갔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반공주의, 반북대결론, 통일부정론은 ‘국가주의’로 해석되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국가주의, 집단주의 운운하는 평가가 이해는 되지만(동의할 수는 없다. 진보적 자유주의 시각 자체가 하나의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인데 이런 잣대로는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이런 식의 논법을 민족 문제에까지 확대 적용한 것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북의 민족주의를 혈연적 민족주의 또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주의 따위로 해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의 민족주의는 분단 이후 현재까지 정치경제군사 등 핵심적인 영역에서까지 집요하게 구사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세상이 이제는 변했으니 보다 실용적으로 변하라고 충고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는 충고일 수 있지만 당신들이 추구하는 민족주의는 본심과는 다른 가식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황당한 주장이다. 터놓고 말하면 자신들의 논리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통일문제가 갖는 지위의 문제이다. 필자는 민족자주적 입장의 통일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입장과 사상은 인간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의해 제기되고 그것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 절대선, 절대악인 사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남의 시민사회가 북을 흡수통일하여 남북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또한 유력한 하나의 길이다. 문제는 현 시기 이러한 지향이 유효한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3) 6.15 공동선언으로 민족 문제가 부상하는 한편 세계화의 확산과 함께 탈민족적 사조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견해가 민족무용론이다. 그리고 이들 견해는 6.15 공동선언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와 극단적인 세계화론과 맞물려 교묘하게 공생하고 있다.
조선일보나 한나라당 등의 전통적인 보수 우파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자는 민족이 아니라는 보수반공주의의 입장위에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요즘에는 민족 개념의 파괴가 아니라(과거에도 민족을 주장했지만 이 시기의 민족론은 혈연과 언어를 같이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반공민족이다. 즉 북은 민족이 아닌 것이다) 민족 개념의 허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라느니 민족이라는 단어는 19세기말에 출현한 것이라는 따위의 주장이 그러하다. 이는 6.15 공동선언 이후 나타난 민족공조론에 맞서려는 정치적 의도이다.
다음으로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민족 개념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입장은 다시 공병호, 탁석산 씨 등 우파적 논자와 임지현, 권혁범 씨 등 좌파적(?) 논객, 삼성경제연구소 등 세계화론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흥미있는 것은 전통적인 보수우파와 탈민족적 사조가 상호 결합하고 있는 점인 데 전자는 최근 강화되고 있는 통일정세에 대한 위기감이 배경이라면 후자는 세계화 국면의 확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임지현, 권혁범 씨 같은 근본주의적(?) 이론가들이 결합된 양상이다(여기서 근본주의적이라 함은 종교 근본주의와 같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들의 사유 체계를 관념적인 차원에서 극한까지 전개하는 경향을 말한다).
(4) 위의 세 가지 경향에 따라 통일문제에 대한 접근 방향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반미와 통일방안 등 주로 정치강령적인 성격의 논쟁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민족과 민족주의 등 사회철학적인 수준의 차이가 커지고 있는 점이다.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쓴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의 핵심은『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당연히 전제해 왔던 민족과 그에 기반한 통일의 부정이다.
이들은 남북을 포괄하는 민족 대신에 한국(남)을 주어로 하여 그것이 외세에 기반한 것이든 민족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근대화되는 과정을 역사의 기본 맥락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또한 민족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사상적 주도권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는 우파 논객들의 궁여지책에 가깝지만(이런 면에서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박정희 비판은 잘못되었다. 보수우파는 박정희 정부의 민족주의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부의 민족주의를 해체함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즉 박정희 정부의 민족주의는 허구인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세계관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 민족주의론에 대한 천착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2. 동북아시아 주변 정세에 대한 판단
(1) 통일문제는 남북 사이의 문제로 제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정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따라서 통일문제를 논함에 있어 동북아시아 상황에 대한 태도를 확정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21세기 들어 가장 극적인 정세 변화의 하나는 중국의 부상과 한중 경제 관계의 심화였다. 이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미중 등거리론, 중국 중시론 등이 있다.
<표1> 무역수지 흑자와 대중 흑자(단위 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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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 99 | 2000 | 01 | 02 | 03 | 04 | 합계 |
| 무역수지흑자 | 416 | 284 | 169 | 134 | 147 | 219 | 375 | 1744 |
| 대중 무역수지 | 53 | 52 | 57 | 48 | 64 | 132 | 202 | 608 |
<표1>은 1998~2004년 사이 한국의 무역수지 흑자와 중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이다. IMF 이후 한국은 중국에 대해 지속적인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02년 하반기 내수 침체 이후 중국에 대한 흑자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시기 중국에 대한 큰 규모의 무역수지 흑자가 없었다면 한국경제는 보다 어려운 국면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중 등거리론, 중국 중시론 따위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인다(기타 인적 교류, 6자회담에서의 중국 역할 등이 있을 것이다).
둘째, 위와 같은 미중 등거리론, 중국 중시론 등에 대한 보수우파의 역반응이 한미동맹 중시론이다(본 연재물 공병호 씨 편을 보기 바란다). 한미동맹 중시론은 중국의 부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 위험하므로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조중동의 영향력 있는 필자들을 비롯하여 식자연하는 보수적 논객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셋째는 미중 모두 위협세력이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왜곡하면서 이러한 입장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통일과 주변정세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통일이란 하나의 민족인 남북이 민족적 입장에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민족주의이다. 따라서 위의 질문은 민족, 민족주의와 주변 정세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다.
필자는 통일 과정에서 주변 정세를 정돈하는 기본 원리는 다극화라고 생각한다. 민족, 민족주의는 혈연과 언어를 같이하는 공동체인 민족이 국가라는 하나의 정치공동체 안에서 살자는 입장과 태도인데 결국 다른 민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다극화는 미국 주도의 일극 질서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미국의 패권을 다양한 국가와 민족과 동일한 수준으로 하향조정하고 이렇게 형성된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공존공영하는 질서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미일동맹은 다극화의 선을 넘고 있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아직까지는 다극화의 선을 넘지 않고 있다. 필자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극화의 선을 넘고 있는 미일동맹을 억제하되 다극화의 선을 넘지 않고 있는 중국은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통일은 주변 정세를 정돈하려는 치밀한 노력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위 두 번째 한미동맹 중시론은 통일무용론과 유사한 주장이다. 반면 세 번째 주변의 모든 민족과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통일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민족관이라고 볼 수 없다. 올바른 민족관은 민족의 통일ㆍ자주와 함께 다른 민족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다음으로 동북아시아 정세에 대한 여러 입장 중 주목할만한 주장은 동북아시아 공동체론이다. 한중일의 진보적인 학자, 시민운동 단체들이 모여 함께 만든 한중일 공동의 역사서인 『미래를 여는 역사』(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5년)가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이 주장은 민족과 국가 단위로 자주한 뒤 이들 사이에 공존공영하는 견해와 몇 가지 차원에서 대립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민족, 국가, 정부 대신 시민사회를 주체로 하고 있고, 민족주의 대신 평화와 연대와 같은 시민적 가치를 중시한다.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다극화를 지향하자는 주장의 허점은 민족과 국가 내부의 질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사회가 중심이 된 새로운 평화로운 공동체라는 발상은 이해할만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면 통일문제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주변정세의 정돈은 민족, 국가, 정부와 같은 거대 조직이 결합된 큰 규모의 사업이다. 여기에 시민사회가 결합하여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주장은 가상하기는 하지만 무모한 생각이다.
문제라고 생각되는 점은 시민사회운동 진영 일부가 민족, 국가, 정부와 같은 현실적인 정치적 주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띄는 경향을 띄면서 민족과 민족주의를 쉽게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독재 정권과 저항하여 승리했던 경험 때문에 이러한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3. 통일의 지위
인간 또는 어떤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일제 시대의 가치는 그것대로 존중해야 하지만 그 시대의 가치를 현재에서까지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시대와 조건에 맞게 새롭게 조명되고 재검토되어야 한다. 통일문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통일문제가 현 시점에서 갖는 지위는 무엇일까?
한국사회의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진보, 개혁진영의 담론은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다. 하나는 사민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혁파론이다.
전자는 최장집 교수를 비롯하여 다수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사민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다분히 사회 구성 단위를 ‘남’(남북이 아니라)으로 제한하여 남에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발상인데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후자이다.
분단혁파론은 남 체제의 개혁이 분단체제의 혁파와 연동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그런 면에서 후자의 주장은 전자가 갖고 있는 관념적인 색채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후자의 주장이 보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면서 이후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몇 가지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분단혁파론의 대표적인 논자인 백낙청 교수는 반국(半國)적인 차원의 사민주의론이나 민족지상주의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백낙청 교수의 시각으로는 필자 또한 민족지상주의로 분류될 것이다. 그리고 자주적 입장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다수의 운동가들에게 이러한 편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민족자주적 입장의 통일을 민족지상주의적인 관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민족자주적 입장의 통일은 민족을 절대화하고 민족만을 신성시하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 등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공간에서 민족자주를 실현하는 것이 구체적인 민중의 삶에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과제라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만 민족공동체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오히려 통일문제를 민중적 삶의 구체적인 생활공간으로부터 감성적인 영역으로 유리시키는 민족지상주의와 같은 관념적 주장이다.
둘째, 분단혁파론의 동력과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이다. 반국적 차원의 사민주의 주장의 최대 맹점은 사민주의를 실현할 정치적 주체와 동력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온존하고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적 냉전형 정당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조건에서 도대체 어디에서 사민주의를 실현할 주체와 동력을 형성한다는 말인가? 필자가 과문한 탓이 모르겠으나 백낙청 교수의 주장에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명료한 대답이 들어 있지 않다.
필자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민주의가 되었든, 그와 유사한 진보적인 대안이 되었든, 이를 실현할 정치적 주체는 통일을 선도하는 민족적 동력과 연동하여 출현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통일이 현 시기 모든 문제를 푸는 선차적이고 핵심적인 고리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민족자주와 통일+국제질서의 재편+진보적인 사회경제적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