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권혁범, '인권에는 국적이 없다'

<민경우의 민족이야기> 민족, 민족주의에 대하여

2006-02-22     민경우

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한겨레신문(2.6) ‘세상보기’에는 정치학자 권혁범 씨가 쓴 칼럼이 게재되었다. 평소 권혁범 씨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있고 있던 차에 “인권위는 ‘무국적’이 옳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아래에서는 위 칼럼과 함께 ‘인권과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지적해 보겠다.

자극적인 제목과 달리 권혁범 씨가 칼럼에서 결론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큰 이견은 없다. 필자가 이해하건대 권혁범 씨의 주장의 요지는 그가 한국사람이건 해외에서 온 이주노동자이건 동일한 처우와 권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왜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주장을 하면서 ‘인권에는 국적이 없다’는 따위의 아슬아슬한(?) 제목을 달았을까? 권혁범 씨가 그 동안 민족주의 문제에 대해 예민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권혁범 씨의 주장보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 권혁범 씨가 정말 하고 싶었던 주장이 있었던 것 같다(권혁범 씨의 주장을 담아 놓은 책이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솔, 2000)인 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아마도 인권과 국가(또는 민족)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필자 또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해 보겠다.

먼저 일반적인 차원에서 인권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지적해 보겠다.

필자는 다 합쳐 4년 정도 감옥을 살았다. 감옥을 살면서 인권 개선을 요구하며 교정 당국과 여러 차례 싸운 바 있다. 필자는 교정 행정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교정행정 자체, 국가의 법률 질서 전체를 부정한 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더욱 커다란 인권 유린 사태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교정당국의 통제력이 무너지면 교도소는 상상하기 어려운 최악의 인권 유린 지역이 되고 말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아프리카 대륙 등지에서 벌어진 내전이나 기근, AIDS 등이다. 정부나 국가라는 이름에 걸맞는 정치적 주체가 있다면 그런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후투족과 투씨족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여 100일 동안 100만명이 죽은 바 있다. 아프리카에서 빈발하는 기근이나 전염병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아프리카의 기근이나 전염병은 자연재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보건, 행정 체제가 무너진 것과 연관된 정치사회적인 문제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정부, 국가와 같은 정치적 주체가 무너진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적 폭력 또는 무정부적 상태이다. 따라서 인권과 국가 사이에 놓인 올바른 관계는 정부나 국가와 같은 정치적 주체를 세우되 이를 민주적이고 민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권혁범 씨와 같은 사람은 너무나 쉽게 인권이라는 이름하에 국가나 민족을 부정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권에 국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권 자체가 국가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없으면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다음으로 국가와 세계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권혁범 씨는 위 칼럼에서 “과거 독재시절 ‘한국적 민주주의’와 ‘안보’ ‘사회질서’를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침해를 정당화하는 언설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의 특수성’ ‘문화적 특수성’이란 그럴 듯한 이유를 앞세워 인권침해를 은폐하는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지적하며 국가를 명분으로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문제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인권은 국가를 뛰어 넘는 지구적, 세계적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위의 주장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낭만적이고 한가한 영역이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2002년 하반기 UN 안보리에서는 이라크 침공을 둘러 싼 미국과 독일ㆍ프랑스 사이에 대논쟁이 벌어졌다. 이와 함께 베트남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반전 운동이 전 세계에서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라크 침략을 강행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UN이 벌인 작태(?)는 참으로 가관이다. 3월17일 부시 행정부가 48시간을 시한으로 최후통첩하자 이라크에 잔류하고 있던 UN 요원들이 서둘러 이라크를 빠져 나갔고 미국은 UN 요원들이 빠져 나간 후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다(UN은 UN 요원들의 신변이 걱정되었을 것이고 미국은 UN 요원들이 희생되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여기에 이라크 민중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리고 5월1일 이라크 전쟁이 마무리되자 UN 안보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추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라크 전쟁이 임박했던 2003년 봄 최고조에 달했던 반전운동 또한 막상 이라크가 패배한 이후 빠르게 잦아들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졌어도 끊임없이 저항했던 이라크 저항 세력이었다. 이들은 몇 배의 희생을 치러가며 미군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싸워 부시 행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쿠바의 관타나모, 동유럽에 있다는 비밀 수용소...... 이런 전 과정에 UN은, 국제사회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는 미국을 규탄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간과하거나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나라를 목숨 바쳐 지킬 각오와 의지가 없다면 국제 사회의 선의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혁범 씨와 같은 사람은 인권에는 국적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조국과 민족을 뛰어 넘어 실체도 불분명하고 타국의 인권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 줄 각오와 의지조차 변변치 않은 UN과 거기에서 채택한 문구 몇 가지를 들어 인권은 지구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끝으로 지적할 점은 사물을 보는 관점, 입각점에 관한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규탄하는 반미 저항의 강도는 <이라크 민중의 저항-UN 안보리와 국제 역학-전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순이다. UN 안보리에서 독일, 프랑스 등이 끝까지 UN의 모자를 쓰고 이라크를 침공하려는 미국의 기도를 저지한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했다면 부시 행정부를 궁지로 몰아간 결정적인 힘은 바로 이라크 민중 자신이 조국을 위해 싸운 불굴의 저항이다. 아쉽게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전 운동은 아직까지는 미국의 침략을 끝낼 정도로 발전하고 있지 않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라크 민중의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도 반전운동의 양상 자체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돌아보면서 중요한 것은 나라와 나라로 구획된 국제사회에서 이라크 민중의 불굴의 저항 정신을 기본으로 세상을 보는가, 아니면 정체도 불분명한 UN이나 도덕적으로 가상하지만 적당한 수준에서 연대할 각오가 되어 있는 다른 나라의 진보적 민중(노골적으로 말하면 서유럽식의 진보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에 설 것인가이다.

굳이 보편적, 지구적, 국제적이란 말을 좋아 한다면 다른 적당한 사례가 있다. 볼리비아 정글에서 죽은 체 게바라나 스페인 내전에서 싸웠던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떠한가? 지금도 연대할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침략에 맞서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싸우는 팔레스타인이 있고 미국에 맞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주창하는 베네주엘라도 괜찮다.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북은 어떠한가?

 

인터넷 한겨레 신문에 실린 권혁범 씨의 칼럼

인권위는 ‘무국적’이 옳다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권고안’을 발표하자 한 보수 언론은 ‘무국적 집단’이라며 인귄위를 맹비난 했다. 연이어 경제5단체장은 긴급회의를 열고 권고안이 ‘우리 사회 일부 진보세력의 주장만을 반영하며 균형 감각이 결여됐다’ ‘국민정서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면서 그것이 ‘안보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내가 보기에는 이런 주장이 비난이 아니라 인귄위의 근본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판보다는 과찬이 아닐까?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그것은 성, 인종, 민족, 국적, 장애 여부, 계층 등을 넘어서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가치다. 이미 이것은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서 명문화된 바 있고, 여러 차례의 국제협약에서도 확인되었다. 특정한 국민국가가 그 국적을 갖고 있는 시민의 인권을 훼손할 때 그것에 대해 당사자 개인이 국제기구에 항의 제소를 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되는 추세다. 만약 인귄위가 ‘국적’을 기준으로 인권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얼마나 협소하고 폐쇄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겠는가. 그러기에 소위 ‘국민정서’에 영합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 독재시절 ‘한국적 민주주의’와 ‘안보’ ‘사회질서’를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침해를 정당화하는 언설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의 특수성’ ‘문화적 특수성’이란 그럴 듯한 이유를 앞세워 인권침해를 은폐하는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미국의 인권외교에 제국주의적이고 위선적인 자국중심적 태도가 들어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사실이다). 만약 인권이 국적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가치라면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이주노동자나 북한주민의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가. 한국 국적 중심의 사고만을 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도 되는 것인가.

세계화 시대에 기업들은 항상 다국적·초국적을 강조하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한다. 하지만 왜 유독 인권에 대해서는 국가 안의, ‘일국적’에 바탕한 판단을 요구하게 되는가?

인권은 국민국가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역동적인 가치다. 따라서 그것은 미래지향적이고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사회적 권리에서 나아가 경제적 생존권, 노동권 등을 인권에 포함시키는 노력이 더욱 강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인권은 ‘편파적’이다. 왜냐하면 항상 인권침해는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가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수자를 편드는 것, 아웃사이더의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권이 왜 필요하겠는가?

헌법이나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하고 수용해야 하지만 그것이 만약 전지구적 관점에서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방향으로 이끌도록 노력하는 게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 중 하나다. 더구나 인권위는 판결하는 곳이 아니라 ‘권고’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누구든 인권위를 비판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보면서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인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가 하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인권위는 더욱 ‘무국적’적인 판단이 필요하고, 한국사회의 인권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하도록 나가야 한다.

(출처 : 한겨레 2006.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