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도진순 교수의 “하나와 둘”
<민경우의 민족이야기> 민족, 민족주의에 대하여
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 다시 연재를 시작하며 - 민족, 민족주의에 대하여 필자는 2004년 6월부터 2005년 7월경까지 매주 1회씩 주로 조국통일 정세와 조국통일운동에 대해 기고한 바 있다. 기고를 하게 된 동기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찬찬히 정리해 보고 싶었던 데 있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국통일정세와 운동에 앞선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의 주제가 민족,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조국통일정세와 운동을 다룸에 있어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하나의 ‘전제’처럼 다루어 왔지만 요즈음에는 민족문제 그리고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관점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 문제를 재조명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위의 문제의식에 따라 주로 민족, 민족주의와 관련해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다양한 방면에서 재검토해 보겠다. 논쟁의 활성화를 위해 다소 ‘도전적인' 태도로 적어 볼까 한다. |
통일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쟁점의 하나는 남북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남북 사이의 관계는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는 국가보안법의 규정이다. 국가보안법에서는 헌법 3조 영토조항(“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을 근거로 대한민국을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국가로 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측 지역을 불법 강점한 반국가단체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남북대화와 협상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고, 북은 와해, 척결의 대상이 될 것이다. 세력이 약화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이런 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둘째는 1991년 UN 가입 과정 등에서 제기되었던 이른바 두 개의 국가론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각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신주류 집단의 통일인식이 대체로 이런 수준에 있다.
셋째는 7.4 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하여 91년 남북합의서 그리고 6.15 공동선언에 이르는 일국론이다. 남북합의서 규정을 인용한다면 남북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인 특수 관계”로 보는 입장이다.
도진순 교수는 위 세 가지 입장 중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갖고 있는 차이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현재 남의 주류 제도권 사회에서는 주로 첫째 입장과 둘째 입장을 가지고 논쟁하지만 남북 협상을 하는 공간에서는 세 번째 입장이 등장하고 대부분 세 번째 입장에 기초하여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의 주류 제도권 사회에서 벌어지는 남북관계 논쟁은 다분히 남 내부용이거나 허구의 논쟁이다. 남 내부에서는 첫 번째가 옳으니 두 번째가 옳으니 갑론을박하다가도 남북 협상 자리에서는 세 번째 입장에 합의하고 돌아오는 것이 남 주류 정치인들의 일반적인 행태였다.
보수세력을 대변한다며 반북 선동에 열을 올리는 동아일보의 사장은 2000년 방북 당시 1937년 김일성 주석의 보천보 전투 소식을 알리는 해당 동아일보 기사를 금으로 장식하여 선물한 바 있고 기회만 생기면 “국기를 흔드는 일”이라며 색깔론을 부추기는 박근혜 대표는 2002년 4월 북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사진을 찍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주류 제도권 사회의 이중적인 언행과 행동은 남 주류사회의 ‘낙후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 면에서 도진순 교수의 관점과 안목은 남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허구의 논쟁을 뛰어 넘어 남북 협상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쟁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두 개의 국가로 볼 것인가 하나의 국가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양한 쟁점으로 이어진다. 본 글에서는 위 두 개의 입장 따라 논의가 갈라지는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역사 인식이다.
도진순 교수의 입장 즉 “하나”(또는 일국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는 <1392년 개국한 조선(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개칭)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 → 통일>로 정식화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분열은 비정상적인 사태이며 하루라도 빨리 통일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또 위와 같은 인식에서 보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던 시기의 문제, 즉 외세의 개입과 외세의 개입을 초래했던 민족 내부의 결함, 남북을 분단시켰던 법적 질서인 정전협정 체제가 중요한 관심 대상이 될 것이다.
반면 ‘둘’(또는 양국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일단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뒤 남북의 상이한 변화, 즉 남의 자본주의화와 북의 사회주의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가 중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추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일단 두 개의 국가를 이루되 남의 자본주의가 우세하므로 점차 북의 사회주의를 흡수하자는 발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남의 자본주의화 또는 시민사회가 북에 대한 우위를 보이면서 통일문제의 주도권이 남으로 넘어오게 되는 과정’이 중요하게 부각된다(본 연재물 김동춘 교수편을 보기 바란다. 김동춘 교수는 통일문제를 남북이라는 두 개의 국가 사이의 문제이고, 자본주의와 시민사회 정착에 성공한 남이 북을 흡수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김동춘 교수에게 정전협정은 통일문제를 다룸에 있어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둘째는 향후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관점에 서면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보장 체계로 바꾸어 미국의 개입 근거를 제거한 뒤 남북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중요하게 된다. 따라서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당연히 1953년 정전협정 체제를 새로운 평화보장 체제로 바꾸는 작업(이 작업의 핵심은 당연히 북과 미국이다)과 함께 남북 사이에서는 ‘통일’을 의제로 하는 정치 협상이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반면 ‘둘’의 입장에 선다면 적대하고 대치하고 있는 두 개의 국가 즉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평화공존이 문제에 접근하는 핵심적인 기조이다. ‘북핵’ 문제는 정전협정을 골간으로 하는 북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정치협상이라기보다는 북핵이라는 돌발 변수를 처리하기 위한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남북이 맺게 될 평화보장 체계는 53년 남북을 분단시켰던 정전협정 체제와는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다.
‘하나’의 관점에서는 ‘북미 사이에 평화 협상 - 남북 사이의 통일협상’이 기본이라면 ‘둘’의 관점에서는 ‘남북 사이의 평화협상 - 미국의 지위는 미지수’가 기본이 될 것이다.
셋째는 하나와 둘이 갖고 있는 실천적인 함의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복잡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이유이다. 아래에서는 도진순 교수의 주장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두개의 한국’(Two Korea)의 국가연합과 '하나의 한국'(One Korea)의 남북연방은 사상ㆍ제도ㆍ이념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차이점 또한 지니고 있다.
국가연합이란 그야말로 남북 국가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며 통일보다는 교류와 평화를 강조한다. 현단계에서 이러한 관계를 정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징표가 되는 것은, 북미간의 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협정’을 남북이 국가 대 국가의 새로운 평화조약(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측 주한미군에 대한 북측의 발언과 개입은 정전협정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적으로 불법행위가 된다.
반면 One Korea나 남북연방은 제도ㆍ사상ㆍ이념의 차이를 폭넓게 인정하지만, 국가주권의 차원에서 남과 북은 어디까지나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동시에 남북이 아닌 외세는 타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남북이 ‘하나’라는 개념에서는 ‘하나가 아닌 주한미군’의 지위와 위상에서 어떠한 변동을 필연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One Korea를 표현하는 개념이 통일이며, 여기서 평화는 통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평화문제에 대해 남북 사이의 공동선언이나 조치는 있을 수 있지만, 국가간의 조약이나 협정은 있을 수 없다.”(밑줄 필자)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도진순 지음, 당대, 17쪽에서)
주류 제도권 사회에서는 좀처럼(아니 거의 볼 수 없는) 정확한 관점이다. 하나와 둘을 둘러 싼 문제를 포함하여 통일문제를 둘러 싼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주한미군에 집중되어 있다. 도진순 교수는 ‘하나와 둘’이라는 문제 의식을 통해 주한미군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여타의 주류 제도권 사회에서 도진순 교수와 같은 입장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식인들이 자신의 이해와 기득권을 떠나 ‘순수하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볼 것이라는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식인 특히 주류 제도권으로 갈수록 연구 주제, 관점과 시각에서부터 그야말로 ‘적나라한’ 이해관계가 작동한다.
통일문제는 국가보안법이 살아 숨쉬고 있는 대한민국 땅에서 가장 첨예한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여기서는 미국의 지위를 훼손하는 일체의 언급이나 암시조차도 금기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3.1절 집회에 성조기와 UN 깃발을 흔들며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겠는가?
통일문제에 대한 약간의 주견만 있어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와 둘’에 얽힌 문제 의식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이유는 마치 성역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친미적 세계관이다. 그런 면에서 도진순 교수의 주장과 입장은 값지고 빛난 것이다. 위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