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무너질 뻔한 선죽교

2005-08-30     외부기고
이병태 (이병태치과의원 원장)

개성을 한번밖에 가보지 못한, 그것도 10시간 정도 머물렀던 치과의사 이병태 박사의 개성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필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개성관광이 실현되면 “이 글이 개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특히 필자도 첫팀으로 가서 북측 안내원 리정수 兄을 또 만나면 좋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에 참석차 평양에서 행사를 치른 뒤 귀환길에 개성을 들렀으며, 이때 ‘방북기’를 네 차례에 걸쳐 통일뉴스에 연재한 바 있다. 필자가 열렬히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리정수 兄은 당시 북측 안내원이다. <이병태의 개성이야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6. 이병태의 개성 기행’ 편은 필자가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참관차 평양에 갔다가 오는 길에 개성을 둘렀는데, 특히 당시 북측 안내원이었던 리정수 선생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몇 시간 동안 짧게 머물렀던 개성에 관한 소감을 현재형으로 정리한 것이다 - 필자 주)

☞ 무너질 뻔한 선죽교

▶가로 막은 선죽교. 돌바닥에 있다는 붉은 글씨를 보기 위해 난간으로 올라온 수많은
남측 방문단(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귀환 길에 개
성에 들림). [사진제공 - 이병태] 
수백 명이 들이닥친 선죽교 부근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선죽교 난간에는 만원버스에 매달리듯 매달려서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다.

‘내 살아생전에 언제 또 올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일 수록 더 북적대며 들여다보았다.

마치 철부지 아이들처럼 보였다. 자유스럽다기보다는 조금은 무질서하게 보였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도 그 혼잡스러운 대열에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사진도 찍었다.

왜 사람들은 선죽교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사진에서 보는 이런 상황을 북측에서도 막거나 질서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무질서 그대로였다. 나는 ‘야, 이거 창피하다’ 하면서도 ‘북에서는 이런 것을 보아야한다’하는 생각을 했다.

☞ 선죽교의 붉은 글씨는 보았지만

정몽주의 피가 바위에 묻어서 6백년이 넘도록 빛을 내다니.

실제로 붉은 색이 희미하게 굵은 붓으로 그어지듯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을 보려고 남측사람들은 높디높은 담벼락 넘어 훔쳐보듯 사람들 틈으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이 왔다거나 버스 한 대 정도의 인원만 왔더라도 이렇게 번잡하지 않았을 터인데 버스가 10대 이상이 왔으니 오죽했을까.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공간에 초과밀 관광객이 몰렸으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난잡하거나 무례한 짓은 하지 않았다. 과연 북측의 당사자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저격으로 유명을 달리한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말에 ‘군중 속의 고독’ 이라는 말이 언뜻 머리를 스쳤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참배하지 못하여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 아주 아쉽다.

☞ 정몽주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필자는 안내 리정수 선생한테 물었다.
“여보시오, 이 선생님. 저기 사람 많이 모인 곳이 선죽교다 이거지.”

“와, 안 보인다. 이거. 사람이 덮었구만. 아니, 이 박사선생이 선죽교도 정몽주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여보! 이선생 혹시 꽈배기 드셨오?”

“꽈배기? 아니 한참 못 먹었수다래. 그래, 배가 고프신 모양이구만. 날래 갔다 오시라요. 맛있는 곽밥에다 맥주도 준비했으니까니.”
정말이지 안내 리정수 兄은 말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비비꼬는 듯한 말을 ‘꽈배기’로 비유했더니 점심과 맥주 이야기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니, 기게 아니라. 이 박사는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기야.”

“정몽주. 그 숭양서원(崧陽書院) 알지? 어디 있어.”
“난 또 뭐라구. 거 고려말기쯤 건축되었대. 정몽주 살던 터에 지였다는데 지금은 선죽동이지. 저 자락이 자남산이고 그 동쪽 비탈에 있는데 오늘은 못 가. 이번에는 계획에 없다구.”

1573(선조6)년에 중수(重修)하고 문충당(文忠堂)이라고 하던 것을 1575년에 사액(賜額)을 받아 이때부터 숭양서원이라고 했다.

이 숭양서원을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자료를 보면 선죽교에서 500m 떨어진 바로 지척에 있는데 다음을 기약하고 성균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