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민족에 대하여 5-②

옥중에서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2005-07-18     외부기고
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현재 전주교도소에 수감중)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전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5년 4월 1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민경우 전 처장의 새로운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3가 99 전북 전주우체국 사서함 72호 전주교도소'이며 수인번호는 2500번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바로 앞 글 ‘(60) 민족에 대하여 5-①’에 이어 몇몇 유력 필자들의 「민족」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③ 이종석

노무현 정부에서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이종석씨는 통일, 북, 민족문제의 연구에서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특히 이종석씨가 NSC 사무처장을 맡은 후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라는 허구적인 논쟁의 표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 인간의 삶과 그의 철학은 시대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아래에서는 이종석씨의 연구 성과와 함께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상과 정치적 함의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1969년 국토통일원이 설립되면서 남의 대북 정책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전 시기의 대북 정책이 반공지상주의에 기초하여 북과의 접촉과 대화 자체를 원천 부정하고 있었다면 1960년대 말 70년대 초반을 계기로 남의 대북 정책은 기존의 반공정책과 함께 북과의 체제 경쟁논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북과의 체제 경쟁을 하자면 북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가 필요했는데 이를 반영하여 나타난 것이 1969년 국토통일원의 설립과 보수적인 관변학자.전문가들의 등장이다.

이들의 경우 반공주의에 기초하여 북에 대한 체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활동한 만큼 북의 지도부를 소련의 괴뢰 또는 진짜 “김일성”의 권위를 도용한 가짜로 몰아갔다. 필자 또한 어려서 이런 류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특징적이라 할만한 것은 연구.저술 활동 자체를 정치적으로 통제한 것과 북의 지도부를 ‘괴뢰’ 또는 ‘가짜’와 같은 반(反)민족적인 집단으로 몰아간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도 대학생들이 파출소를 화염병으로 공격하곤 했는데 지금으로 보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법한 위와 같은 “폭력행위”는 훈방 처리되거나 구류 처분된 반면 반미나 연북을 담은 발언이나 저술 활동은 심각한 국사범으로 분류되었다.

1980년대가 그러했으니 1970년대에는 오죽했겠는가? 이러한 정치적 금압을 배경으로 괴뢰 또는 가짜와 같은 주장이 통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이 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반(反)전두환 투쟁 과정에서 진보적 사상과 민족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문헌들과 북의 원전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 어느 시기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한다면 이러한 신조류는 몇 개의 흐름으로 분화되었다.

첫째는 미국식 자유주의 시각이다.

1984,5년경 미국에서 활동중인 이정식, 스칼라피노 교수 등이 저술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가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북의 지도부가 괴뢰 또는 가짜가 아니라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무장 투쟁의 일원임이 “담담하게” 기술되어있었다. 이에 따르면 이명영, 허동찬씨 등이 주장했던 괴뢰, 가짜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학문적 주장이었다. 단 이들은 그것이 “사실이지만 별 것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정식.스칼라피노(부르스 커밍스나 와다 하루키도 이 범주에 속하나 이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등의 연구 성과가 소개된 것은 더 이상은 정치적 금압만으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각은 객관 사실에 대한 진술만 살아남고 정치적 세력으로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것은 이들의 연구성과 소개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반미연북 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확산하기 위해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자유주의 시각의 연구 성과를 뒤늦게 소개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그만큼 시대와 괴리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그나마의 자유주의 공간은 민족주의를 표방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에 의해 창출된 것이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또는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에 의해 확산된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본 글에서 주로 언급할 이종석씨 등의 신흥 학자.전문가 집단군(群)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사회주의, 북의 문헌들이 정치.사상투쟁의 일환으로 소개.전파될 때 북.통일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거나 운동 진영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정식.스칼라피노가 주장했던 “사실”을 차용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차원을 달리했다. 이들은 북 지도부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사실로 인정하고 민족 자주와 존엄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그것을 특수한 문제로 처리했다.

민족, 통일문제를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과는 다소 다른 특별한 공간으로 밀어놓고 시민사회, 자본주의를 현재의 보편적 사조로 본다면 통일, 민족문제는 민족자주와 같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회복과 같은 감성적인 문제가 되고 제도권에서 건전한 토론과 논의를 통해 수렴될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1990년대 초반 이후 이들은 순차적으로 제도권에 진입하게 된다.

이들이 채택했던 논리구조와 그것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몇 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보자.

북 지도부의 항일 무장투쟁 경력과 근.현대사의 주요 화두가 민족문제이며 여전히 그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는 이정식.스칼라피노 또는 임지현씨 등이 “사실”을 인정하되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민족문제의 가치를 폄하하는 발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정도와 한국 사회에 발 딛고 선 자기근거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첫째, 이들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1960년대 말~70년대 초반 북에서 ‘혁명적 수령관’이 태동하면서 이른바 견제와 균형 또는 다원적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이다. 북의 역사가 민족자주의 관점에서는 긍정할만한 것이지만 혁명적 수령관이 출현하면서 민족보다 상위의 가치인 시민사회의 관점에서는 부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저술된 연구 성과들이 제도권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짚고 넘어갈 점은 1970년대 초반을 경계로 북의 역사를 구분하고 전자를 사실 또는 긍정적으로 후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면 이들 또한 제도권에 진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홍근수 목사, 박순경 박사 등이 주체사상에 대한 호의적인(?) 발언으로 구속되었고 전문 연구가인 이찬행씨 또한 국가보안법에 의해 희생되었다.

주체사상이나 혁명적 수령관이 민감한 현실의 주제였던 반면 역사의 공간 특히 근.현대사의 연구공간은 상대적으로 국가보안법에 덜 노출되어 있었다. 덕분에 민족주의에 대한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연구 성과물은 대부분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남아있다. 반면 민족을 「통사」적으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다룬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탈민족 사조가 우세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혁명적 수령관에 대한 비판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대부분 다원적 시민사회와 다르기 때문에 틀렸다는 식으로 간략히 전제되어 있다. 주체사상이나 혁명적 수령관을 철학 또는 사상의 관점에서 다룬다기보다는 권력의 정통성을 사후적으로 추인하기 위한 정치공학.기술 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북 지도부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사실로 수용하는 역사적 성취를 보여주었지만 어떤 지점에서 섣불리 멈추어 서서 역사와 현실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시민사회론을 보다 상위의 긍정적 가치로 보고 민족주의를 하위의 개별적 가치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의 연장선에서 민족주의 전체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북의 민족주의 강화 작업, 남의 반미연북세력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주의는 긍정적이기는 했지만 시민사회론의 보편 가치의 하위에 배치되는 문제인데 북의 민족주의 강화 작업이나 범민련과 한총련은 맹목적.친북적 혹은 인종적, 자민족 중심주의, 국수주의로 비약하여 민족주의가 갖고 있었던 긍정적 수준을 넘어 섰다는 평가이다.

그러면 이들 입장을 중심으로 현실의 통일운동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추적해 보겠다.

1980년대 중.후반 통일운동사의 대치 전선은 반미연북세력과 전통적인 반공주의 세력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으로 대표되는 충돌이 그것이다. 위에서 분류한 자유주의 세력은 거의 존재하기 않았고 이종석씨와 같은 조류는 변방에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남북 관계에서 남의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다양한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임지현, 권혁범... 등의 학자군은 아예 민족문제를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한편 화해협력세력은 순차적으로 제도권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1992년 대선에서 낙선한 DJ는 아태재단을 설립하고 전통적인 반공주의에서 벗어나 주류에서 밀려 난 임동원 장관과 의기투합한다. 여기에 당시로는 소장 학자, 소장전문가 집단이었던 이종석, 최성, 서동만씨... 등등이 비교적 낮은 지위로 결합하거나 학문적 수준에서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전통 반공주의 집단이 워낙 두터웠기 때문에 이들의 흐름은 비주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1990년대 초.중반 여전히 강력했던 것은 반공주의 세력과 반미연북세력이었다. 전대협을 계승한 한총련의 경우 물리적 동원력으로만 보면 1991~93년경 전성기에 있었고 한총련의 주류는 여전히 반미연북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한총련의 노선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학생집단은 새 것에 민감하기도 하지만 원칙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도 하는 것 같다. 대학생 집단이 서서히 소비문화에 젖어 들고 있는 반면 조직화된 학생 운동은 원칙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학생들은 시대의 변화에 너무도 둔감했다.(필자 또한 어느 정도 그랬다고 본다)

이 괴리를 비집고 자유주의로 치장한 반공주의 세력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생운동의 적자인 한총련을 유린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학생들의 시각과 맥을 같이했던 기성세대들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선별되거나 역사라고 하는 전문 공간에 묶여 있었고 시민사회론을 주창했던 보다 영향력 있는 다른 집단은 맹목.친북.국수적.인종적이라고 학생들을 몰아부쳤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 1996~97년 직선에 의해 선출된 대학생 조직을 이적단체로 몰아간 연대항쟁과 한총련 출범식이다.

한편 1990년대 중.후반 북은 민족주의를 체계화.이념화하기 시작한다. 북의 민족론은 사회주의를 민족적 특성에 맞게 전개한다는 주체성.토착성을 강조하던 단계에서 1990년대 중.후반이 되면 인류 역사 발전 전체를 민족과 국가로 재구성하고 여기에 사회주의와 같은 체제.이념을 결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철학, 사관의 문제로 필자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북의 민족관을 비판하는 요점은 주로 단군릉과 같은 역사적인 문제, 세계화에 역행하는 “폐쇄성” 등을 거론하는 것 같다. 이를 국수적.인종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판이다. 필자가 보기에 북의 민족주의를 국수적.인종적.폐쇄적으로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평가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남의 경우 1965년 한일협정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 역사를 묵인한 반면 북은 1990년대 전 기간 일본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두고 국수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 실용주의 운운하며 파병한 반면 북은 1960년대 베트남, 1970년대 중동 현지에서 미국과 싸웠다. 도대체 국수주의란 무엇인가? 혹시 서구유럽의 반전평화, 생태운동만이 국제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6.15선언에는 “우리민족끼리”,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파격적인 양보안이 들어 있다. 6.15선언의 우리민족끼리는 7.4공동성명의 자주의 원칙을 파격적으로 양보한 것이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80년대의 고려 연방제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이를 두고 고집스럽다고 볼 수 있는가? 또 경제난에 시달리면서도 시야를 미래에 두고 과학기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뜻이다.

공정하게 본다면 남과 북의 차이는 혁명적 입장과 실용주의이다. 혁명적이고 원칙적인 입장이 남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듯 하다. 역으로 말하자면 실용주의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얄팍한 훼절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민족적 입장을 과거의 어느 시기에만 유효하거나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고, 민족주의보다 시민사회론을 보다 상위의 어떤 가치로 놓게 되면 통일, 민족문제는 남이 주도하여 북을 시민사회가 체현된 남의 일부로 통합하는 문제가 된다. 통일 문제에서 민족자주와 같은 정치적 성격이 거세되고 민족공동체라는 감성적인 영역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 중.후반 범민련.한총련의 투쟁이나 북이 주창했던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대단히 낙후하고 고집스러운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이들의 시각이 현실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 북한동포돕기운동, 범민족대회와 공권력과의 충돌이 교차했던 90년대 후반 무렵일 것이다.

21세기가 되면서 민족을 둘러 싼 쟁점은 사뭇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부시 행정부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북의 선군정치, 북핵문제는 민족문제를 다시금 전면에 부상시켰고 6.15 선언은 낙후한 것으로 치부했던 민족 자주세력의 고급스러운 정치력을 잘 보여주었다.

아마도 「맹목적.국수적.인종적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북핵 위기나 6.15선언은 예견되었던 미래가 아니었을 것이다. 뜻밖의 상황이 도래하자 이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현실을 재구성하여 받아들였다.

가령 북핵 문제가 에너지 지원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정치협상용으로 보아 상황을 관리하면 된다고 보거나 6.15공동선언에 대한 무관심이 그에 해당한다. 북핵 문제는 북미간의 정치군사적 대결로 남의 입장에서는 한미 동맹의 입장에서 북을 고립시키는 입장에 서거나 북과 함께 민족 공조를 강화하는 양단의 길밖에는 없었다. 여기에 시민사회론이 파고들 여지는 대단히 협소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6.15공동선언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확인한 것을 뛰어넘어 남북이 함께 자주하자는 정치적 약속이었다. 6.15선언을 화해와 협력의 틀에 묶어 두려는 태도는 6.15선언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다. (7.4공동성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결국 민족 자주세력을 맹북.친북.인종적.국수적인 어떤 것으로 몰아갔던 편향된 인식, 선입관 때문이다.

지난 4~5년의 기간을 찬찬히 돌아보라. 지난 5년의 역사는 6.15공동선언이라는 큰 틀 안에서 벌어진 현상이다. 촛불시위나 이회창 후보의 낙선은 6.15선언을 배경으로 놓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6.15선언 자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인상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2000년에 남북의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과 북미가 지겹게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현실을 근거로 또 자신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6.15선언은 전격적인 정치협상을 통해 대중의식의 발전 단계를 뛰어 넘어 타결되었고 6.15선언을 대변해야할 민족자주세력은 힘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 등용된 화해협력파는 6.15선언을 민족자주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았거나 아예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간극 때문에 6.15공동선언은 정세를 추동하는 지렛대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진정한 힘있는 대변자를 갖지 못하면서 현실 공간에서 응당한 지위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북핵 위기가 계속되고 남북 관계가 재개되면서 상황은 조금씩 의미있게 변하고 있다. 6.15 5돌 민족통일대축전과 6.17 김정일 국방위원장-정동영 장관의 만남은 그 전기가 될 듯 하다. 북핵 위기, 남북관계 등 여러 가지 현안을 자주통일의 관점에서 하나의 고리로 이해하는 것, 감성적인 민족 화해의식에서 정치적인 민족 자주의식으로의 발전, 남북관계의 막연한 개선과 발전에서 6.15선언과 민족 공조라는 명료한 언어로 집중되는 양상 등이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④ 김동춘

당초에는 본 글에서 ③ 이종석, ④ 김동춘씨를 다루고자 했으나 ③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김동춘씨의 견해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서술되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고명섭, 『지식의 발견』,(그린비)’에 소개된 김동춘씨의 주장을 소개하고 필자의 견해를 간략히 서술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고명섭씨가 소개한 김동춘씨의 책은 ‘김동춘, 『근대의 그늘: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주의』,(당대)’인데 필자는 이 책을 읽지 못했다. 고명섭씨가 소개하는 내용을 가지고 김동춘씨의 주장을 평가하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만 필자가 의도하는 바는 자연인 김동춘씨라기보다는 김동춘씨와 유사한 어떤 집단의 생각이므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동춘씨의 글 중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ㄱ) 우리민족의 근.현대사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보편적 이념은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났고 ㄴ) 민족주의적 입장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한 사람들이 자유주의.사회주의와 같은 진보적 사조를 일관되게 고수했으며 ㄷ) 자유주의를 주창했던 사람들은 민족주의와 분리되고 유착하여 냉전.반공적 입장으로 변질되어 긍정적 의미의 보편적 이념 창출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ㄱ) 자유주의.사회주의 등은 “보편주의”이고 민족주의는 “특수주의”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자체만으로는 역사를 진전시키는 진보적 운동이 아니고 “40여년 이상의 마이너스 역사를 제로로 돌리는 과정”이라고 보는 점 ㄴ) ㄱ) 의 맥락에서 북이나 범민련.한총련의 민족관과 통일운동을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김동춘씨는 “93년 단군릉 발굴 보고 이후 북한의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 운동 당시 민족세력이 견지했던 보편주의적.저항적 성격을 완전히 탈각하고 종족적 동질성에 기초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던 파시즘적 국가주의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라고까지 쓰고 있다. (고명섭씨가 김동춘씨의 위 책을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

이종석씨를 논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말했으므로 아래에서는 앞에서 거론되지 않은 부분을 중심으로 언급해 보겠다.

먼저, 인간의 역사와 사회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인간집단과 그 인간집단이 채택하는 사유체계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역사의 주체는 개인으로 볼 수도 있고 계급으로 볼 수도 있으며 민족국가로 볼 수도 있다. 개인.계급.민족과 결합하는 사유체계는 원시적인 신앙일 수도 있고, 고등종교일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사회주의와 같은 근대적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또 가령 자유주의라는 사유 체계는 시기에 따라 개인을 대변할 수도 있고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사상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김동춘씨의 견해에서 자유주의.사회주의를 보편주의로, 민족주의를 특수주의로 갈라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8세기 영국의 자유주의는 개인을 대변했다면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는 영국이라는 제국주의의 대변자가 된다. 즉 자유주의 또한 개인 또는 제국이라는 구체적인 인간집단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사회주의의 경우는 노동계급이거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인데 이 또한 사회주의라는 사유체계가 구체적인 인간 집단과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계급.민족으로 볼 것인가 하는 주체의 문제와 그 주체가 어떤 사유체계와 결합할 것인가의 문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로 갈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동춘씨와 같은 견해는 대체로 사회주의의 시각에서 역사 발전의 주체란 보편적으로 개인이나 계급이어야 한다는 생각, 즉 민족은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조건에서 창출되는 일시적 인간 집단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북의 민족주의를 민족 지상주의로 단죄하려면 왜 역사발전의 주체가 민족이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개인이거나 계급이어야 하는 지부터 따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개인”은 근대 유럽의 산물이고 노동계급은 마르크스의 주장일 뿐이다. 자유로운 개인의 입장을 대변했던 자유주의가 보편적이기는커녕 근대 유럽이라는 특정시기의 역사적 산물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입장을 대변했던 사회주의 또한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민족과 민족주의 또한 어떤 시기, 어떤 조건의 산물인데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개인이나 계급보다는 민족이 차지하는 지위가 오히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른바 “민족지상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즉 남북이 동일한 혈연, 언어 공동체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가령 자유주의에서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무한으로 확장하려는 태도도 문제일 수 있다. 굳이 명명하자면 개인지상주의일텐데 왜 개인지상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는가? 같은 맥락에서 특정한 경제적 조건하에 있는 노동 계급이 가령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여 통일하려는 노력을 계급지상주의라 부를 수 있겠다.

개인이든 계급이든 민족이든 그것의 가치를 절대화하면 문제가 되는 법이다. 문제는 민족과 민족주의에만 이런 굴레를 씌우는 것인데 이는 민족이 갖는 독특한 특성과 파시즘과 같은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보통 개인지상주의는 이기주의라 하여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지고 노동계급지상주의는 제대로 실현된 바도 없다. 노동계급의 통일은 민족과는 달리 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통일은 약간의 경제적 지분을 가지고도 비교적 쉽게 파괴되는데 이는 노동계급이 인류 역사와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견고함 정도가 약하다는 반증이다.

민족에만 특별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민족이 갖는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속성 때문이다. 즉 혈연과 언어를 같이하는 인간집단이 통일해야 한다는 민족 지상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형성된 민족의 역동성, 팽창성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누누이 강조해 왔던 내용을 다시금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민족주의는 서구의 제국주의와 비서구의 저항적 민족주의로 명확히 양분된다. 양자는 민족주의라는 동일한 개념을 사용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역사 과정에서는 명확히 구분되는 단층선이다.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처럼 다른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와 유사한 외양을 보인다고 해서 그를 여자가 될 것처럼 우려하는 태도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북의 민족주의를 히틀러의 나찌즘과 유사하게 비교하는 것도 비슷한 수준의 난폭한 논리의 비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