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역대 한국정부의 통일 정책에 대한 평가
옥중에서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2005-05-02 외부기고
|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전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5년 4월 1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민경우 전 처장의 새로운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3가 99 전북 전주우체국 사서함 72호 전주교도소'이며 수인번호는 2500번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
본 글에서는 역대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 평가해 보고자한다. 평가의 대상은 본 연재물의 취지에 맞게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이후이다. 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준거(평가기준)는 주로 민주화와 경제이다.
역사적 평가란 무엇을 준거로 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본 글의 준거는 주로 민족, 자주, 통일이다. 그리고 평가의 대상이 정부이니만큼 재야 또는 일반 사회인들의 생각보다는 정부 정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 집단을 중심으로 다루겠다.
① 박정희 정부
1970년대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간략히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70년대 초반은 미.중 화해 결과 동아시아에서 긴장완화 추세가 도래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에 순응하여 7.4 공동성명에 합의했다가 7.4를 역이용하여 강권체제 구축과 한미군사관계의 갈등을 통해 내폭하였다. 전자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으므로 아래에서는 후자에 대해서만 거론해 보겠다.
박정희 정부를 포함 역대 한국정부에게 최고의 가치는 한미군사관계의 안정적 유지였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체제의 하위에 한국이 편입됨을 의미한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군사정책, 가령 자주국방, 핵개발, 미사일 개발 등은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체제와 충돌했다.
70년대 초반 미국이 요구했던 것은 두개의 Korea-미국의 군사적 주도권이 훼손되지 않는 점진적인 긴장완화-정책도 미국 주도하의 한미 관계였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미국이 희망했던 미국이 주도.관리하는 점진적인 긴장 완화에 저항하면서 한미 관계의 부분적 긴장을 유발시켰다. 이 부분적 긴장이 박정희 정부를 몰락시킨 원인이다. 한미관계는 그 정도의 긴장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비대칭적이었다.
10.26 사건의 진상에 대해, 가령 핵개발을 둘러 싼 한미 갈등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의 원인이라는 따위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10.26 사건의 진상과 무관하게 위에서 언급한 ‘부분적 긴장’이 박정희 정부 몰락의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박정희 정부를 계승한 전두환 정부 하에서 자주국방, 핵, 미사일 개발 등 긴장을 유발했던 요인들이 해소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기본 추세는 분명했다.
② 전두환 정부
70년대 초반 Two Korea(s) 정책을 주도했던 미 행정부는 공화당의 닉슨 행정부였다. 반면 전두환 정권 집권 시기의 미 행정부는 레이건 정부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대소 강경정책을 주도하며 파란을 일으켰는데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 강경정책이 전두환 정부에 미친 파장은, 첫째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 둘째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부분적 긴장’의 해소 등이다.
전자에 대해 언급해 본다면 1976년 시작된 T.S(팀스피리트) 훈련이 83년 무렵부터는 공세적인 성격을 띠며 확대되었고 중동에서의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면 소련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역스윙전략 등 상식 이하의 강경노선이 운위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83년에는 KAL기 폭파사건, 아웅산테러사건 등이 발생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약한 고리인 한일 유착관계가 강화된 점이다. 한미일 군사동맹은 미일, 한미라는 두개의 군사 동맹을 크게 묶어 표현한 것으로 한일 사이에는 직접적인 동맹체제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일을 사실상의 동맹 구조로 유착시켰던 힘은 두개의 동맹구조를 정점에서 지탱시켰던 미국이다.
즉 한일 동맹은 미국을 고리로 간접적으로 형성된 느슨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한국에서 “매우” 종속적인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고 일본에서 강경매파인 나카소네 내각이 성립되면서 한미일 군사동맹의 약한 고리인 한일관계를 잇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당시에도 일본 교과서 왜곡이 있었다(82년). 전두환 정부는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독립기념관 건설로 호도한 뒤 나카소네 수상을 서울로 불러들여 40억 달러의 안보차관을 대가로 한일관계를 발전시킨다.
현재의 독도와 교과서 왜곡으로 촉발된 한일간의 분쟁도 80년대 초반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핵심은 독도.교과서 왜곡 문제가 감성적인 반일에 국한되는가 아니면 일본의 우경화의 뿌리인 미일 군사동맹을 타격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레이건 집권 1기는 대소 강경노선으로 파란이 일었다. 유럽에서는 중거리 미사일 배치계획으로 2차대전후 최대 규모의 반전반핵운동이 성장했고,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미일 군사동맹의 공세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부 시절의 ‘긴장’을 해소하고 미국의 강경 노선에 합류했고 그 대가로 광주 사태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다.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하고 소련에서 고르바쵸프가 집권하면서(85년) 80년대 중.후반에는 다시금 해빙 기류가 조성되었다. 84~85년 남북대화와 6.29선언은 이 해빙 기류를 배경으로 벌어진 사건이다.(주1) 레이건 행정부가 80년대 초반 1기 때와 같은 강경노선을 견지했다면 84~5년의 남북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했던 미국은 87년 6월항쟁에 대해서는 6.29선언으로 온건 대응하는데 이 차이는 80년과 87년 운동 대오의 질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미국의 정책이 바뀐 점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대소 강경노선을 표방하는 조건에서는 독재정권이든 연성정권이든 미국의 정책을 안정적으로 집행할 종속적인 성격의 정권이 필요했다면 미.소간의 정상회담과 군축회담이 진행되는 조건에서라면 전두환 정권과 같은 강권 체제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수 있다.
80년대 중.후반의 통일 역사는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각축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긴장완화 국면, 남북대화 추세가 한미군사동맹 관계의 이완, 남북간 군축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여부와 둘째 전두환 강권체제의 해체가 내용적인 민주화와 자주.통일운동의 성장으로 발전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전자에 대해 말하자면 88년 이전까지 군축, 한미 군사관계는 거의 금기의 영역이었다. 80년대 중.후반의 남북대화는 그런 면에서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민주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두환 강권체제의 해체가 노태우 정부의 구성으로 마무리되면서 자주통일운동의 고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 또한 부분적 성과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③ 노태우 정부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면 역대 대통령 중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평가는 대통령 개인의 개성.능력.풍모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관심을 두어야 할 점은, 첫째 어떤 인간 특히 대통령과 같은 핵심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인 면모가 아니라 시대와의 연관성속에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 둘째 노태우 정부는 박정희 정부와 같은 1인 보스 체제가 아니라 집권 보수 세력, 군부.관료.정치인들의 역할이 커져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1인이 아니라 집권 세력의 여러 집단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와 같은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노태우 정부를 평가해 보자. 먼저 주목할 점은 1991년 합의서가 채택된 점이다.
남북합의서는 91년 12월 5차 고위급 회담에서 합의되었는데 이 무렵은 91년 봄 시작된 북핵 위기가 첫 번째 고비를 맞고 있었던 시점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핵과 합의서를 분리하여 5차 고위급 회담에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남북 관계와 북핵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처리하느냐의 문제는 한국 정부를 평가하는데 있어 중요한 논점이다. 과연 남에게 북은 어떤 존재인가? 은인이자 최대 우방인 미국의 관점에서 북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과는 별도의 공간에서 남북 관계를 처리할 수 있는가? 미국과 한국의 이해는 동일한가? 아니면 미국의 이해와 분리된 별개의 이해가 존재하는가?
현 시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러한 문제들이 현실의 남북관계를 의미있게 갈랐던 기준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대북 강경노선 → 대북 온건노선’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대북 강경노선의 입장에서 미국에 저항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미간의 갈등이 조성되었지만 갈등의 근원은 반민족적인 것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경우에는 91년 하반기 북핵 위기가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의서를 채택했다. 노태우 정부가 미국의 입장에서 서서 북핵 위기 해소 이전에는 합의서가 불가능하다고 반응했다면 90년대 초반의 남북대화의 성과는 유실되었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경우에는 클린턴 행정부가 일정한 수준에서 북핵 문제를 타협하여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완화하고자 한 반면 YS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을 주장하며 긴장을 격화시키려 했다.(주2)
DJ 정부는 남북관계와 별도의 공간에서 북미 대화를 “고무”했고 북미관계의 진전과 무관하게 남북관계의 독자성을 인정했다.
한미군사 관계의 견지에서 보면 역대 한국정부의 차이는 거의 없다. 이런 수준에서 평가한다면 평가는 대단히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대미관, 대북관의 미세하지만 의미있는 시각 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태우 정부가 합의서에 동의한 것은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두 번째는 집권세력 내부에서 대북 온건파가 출현한 점이다. 박정희 정부가 1인 보스체제이거나 중앙정보부와 같은 정보기관에 주로 의존했다면 전두환 정권 때부터는 군부.정보기관.관료층에서 일정한 집단이 형성되고 이들이 기존의 보수강경노선과 구별되는 대북 온건노선을 주도했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저 시사월간지 등에서 주어들은 바를 소개하면 박철언, 임동원, 김종휘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고 한다. 대북 온건노선이 점차 대세를 형성하면서 위와 같은 성향의 집단도 점차 다수화되어 DJ-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어느 시점이 되면 전통적인 집권보수세력 내부에서도 온건노선이 다수(?)가 된다.
현 노무현 정부에서도 중추를 이루는 부분은 이들일 것이다. DJ-노무현 정부가 연이어 집권하면서 소위 비주류가 정권의 최상층부를 장악했지만 수십년간 한국 사회를 지탱시켜온 보수의 뿌리는 여전히 견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일부가 보다 근본적인 변화, 즉 탈미적 색채를 띠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미국의 이해와 보다 민감하게 충돌하기도 했다. 이 부분 또한 필자로써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저 떠도는, 주어들은 이야기를 어림짐작으로 소개하면 88년 말 노태우 대통령은 고르바쵸프의 동방정책과 호응하는 6자회담 구상을 제안한 바(주3) 있고, YS정부 초기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박철언 장관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위를 상대화하는 혁신적인(?)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YS정부 초기 황병태 주중대사는 미.중 등거리론으로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도 유사한 기류인데 결과는 지켜보아야 할 듯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혁신적인 발상은 중단되거나 무산되었다. 필자는 6공 초기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장관과 YS대통령의 파워게임의 구체적인 내막은 잘 모른다. 구체적인 내막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전통집권세력, 대북온건노선.혁신적인 발상, 보수적인 인물 대(對) 비주류정치인, 친미노선, 민주적인 인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혁신적인 발상 대 친미노선으로 합의서, 남북경제협력, 중국과의 협력중시, 6자회담 등 탈미적인 맹아를 갖는 변화가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북고위급 회담에 참가했던 임동원 장관의 탈락도 크게 보면 유사한 맥락이다.
끝으로 노태우정부의 한계 또한 명확했다. 탈냉전 초기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한미군사관계의 변화여지가 컸다. 결과적으로 보면 군사정전위 대표가 미군 장성에서 한국군 장성으로 바뀌고, 평시(전시가 아닌) 작전지휘권을 반환받은 정도이다.
소련이 붕괴되는 초유의 역사적 변화 과정에서도 이런 수준에 만족한 것을 보면 보수집권세력의 친미적인 성향과 태도는 일종의 연구대상이다.
④ YS 정부
흔히 YS 정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은 IMF이다. 그러나 IMF경제위기에 대해 YS 정부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세계화, 신자유주의는 80년대 이후 한국정부의 기본 추세였다. 크게 보면 DJ-노무현 정부였다고 하더라도 초국적 금융자본에 휘둘리는 양상은 비슷했을 것이다.
IMF 경제위기란 결국 미국 주도의 금융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전-노-YS-DJ-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과정은 동일한 흐름이다.
자주통일의 관점에서 보면 남북관계 경색, 국가보안법체제의 온존과 일본 문제 처리에서 문제가 있었다. 94년 남북정상회담 무산 직후 조문 파동을 통해 남북관계 경색을 심화시킨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생략한다. 그와 함께 중요했던 점은 자주통일 세력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다.
이로 인해 보수공안세력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허울을 쓰고 기승을 부렸고 보수공안체제의 이완은 지체되었다. 이 결과 DJ-노무현 정부에서 ‘대북강경.보수반공노선 대(對) 대북온건.보수화해노선’과의 때늦은, 시대착오적인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민주화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YS 정부는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어 둠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왜곡시켰다.
자주통일의 관점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일본 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처리이다. 90년대 중.후반의 국제 정세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중.대북 온건노선과 일본의 우경화로 집약될 수 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일본은 군사대국화의 중간 거점으로 미일 동맹의 재구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양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발생한 사건이 96년 4월 클린턴-하시모토 수상의 미일 신안보선언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90년대는 1991년까지의 냉전기, 이후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대중.대북 강경노선, 미일동맹의 강화 사이의 중간기였다.
따라서 YS정부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억제하는 것은 1991년까지와, 2001년 이후의 주요 과제이면서 한국 정부가 힘을 효율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현실적인 과제였다. YS정부는 이를 방기하며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방치하고 말았다. 이 후과가 노무현 정부로까지 이월된 것이다.
⑤ DJ-노무현 정부
역사적으로 보면 DJ-노무현 정부는 한 덩어리로 평가할 수 있다. 보수.반북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 정부는 보수.반공체제의 점진적 이완을 요구하는 시대의 추이에 저항하다 내폭했고 전-노 정부는 이에 적응했으며 YS 정부는 민간.비주류정권임에도 이를 강화.온존시켰고 DJ-노무현 정부에서는 양자간의 격렬한 충돌 끝에 보수온건 노선이 승리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위의 과정을 집권세력의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부가 ‘1인 체제-군부와 정보기관’ 중심이었다면 전-노-YS 정부 하에서는 군부가 점진적으로 쇠퇴하는 대신 보수 관료 집단이 대북온건 노선에 편입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DJ-노무현 정부는 비주류 집단을 권력의 정점에 두고 대북 온건노선에 점진적으로 적응해 온 보수관료 집단이 이를 받치고 있는 양상이다.
위의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 정부-전,노,YS 정부,-DJ,노무현 정부’로 계열화해 볼 수 있겠다. YS 정부는 민간정부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DJ,노무현 정부보다는 전,노태우 정부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DJ-노무현 정부 또한 한미 군사 관계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경우 부시 행정부 집권 이후 전세계 미군 전력.기지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태도는 주목의 대상이다. 부시 행정부의 재편 움직임은 70년대 초반, 90년대 초반에 비견될만한 근본적인 변화로 볼 수 있는데 현재까지 노무현 정부의 태도는 지극히 미온적이거나 소극적이다.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의 관계에 대한 태도는 DJ 정부에 비해 노무현 정부 들어 후퇴했다고 볼 수 있다. DJ 정부는 98년 집권 이후 대단히 일관되고 안정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DJ 정부의 입장에서 남북관계 개선은 북핵 문제와 무관하게,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추진해야할 일종의 독립 변수였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까지는 남북관계 개선을 관리(정체, 지연)한다는 입장이었다.
DJ-노무현 정부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유사한 지위에 있음에도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노무현 정부가 대북정책에 적극적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비하면 현실의 남북관계는 2004년 7월 이후 장관급 회담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경색되어 있다. 이러한 후퇴는 DJ 정부에 비해 노무현 정부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권력기반, 활용 자원을 가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지점이다.
위와 같은 차이를 낳은 원인은 역시 시대와의 관계이다. DJ 정부는 일관되고 안정적인 남북관계 추진만으로도 큰 성과를 낳을 수 있는 시대에 있었다면 노무현 정부는 그보다 예민한 시대적 조건에 있었다. DJ-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남 내부의 변화가 점진적이고 완만한 변화라면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에 발생한 2차 북핵 위기라는 외부적 변화는 근본적이고 극적인 변화였다.
따라서 남북관계를 관리한다는 소극적인 정책으로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역사가 격동하는 비상한 시기에 현상을 관리한다는 소극적인 정책은 미덕일 수 없다. 관건은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북이 편안한 현상 관리정책에 호응하지 않으면서 남북 관계는 ‘상당히’ 심각한 위기 국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상당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이유는 노무현 정부의 안이한 대북정책을 왼쪽에서 공격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무현 정부는 권력 기반의 차원에서는 오른쪽으로부터의 공격만 방어.수습하면 되는 양상이었다.
DJ-노무현 정부의 또다른 차이는 대통령의 개인적 개성에도 연유하지 않은가 싶다. DJ는 외교.안보 분야의 식견을 갖춘 탁월한 전문가였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주로 지역주의 극복.분권화 등에 관심이 있는 듯 하다. 또한 DJ 대통령이 보다 민족적 감성에 충실하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자유주의, 실리와 같은 실용적인 측면에 방점이 있는 듯하다.
이 차이가 남북관계의 적극화를 통해 그나마 제한적인 남의 영향력을 2차 북핵 위기에 전파하는 힘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다. 남북관계를 적극화하여 남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북핵 위기가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한국정부의 노력과는 무관한 현상이다.
자주.통일의 관점에서 주요한 평가 지점의 하나는 주변정세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한 정책이다. 역사의 격변기마다 이런 발상들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미.중 화해라는 정세 변화에 어울리지 못했다.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제출된 6자회담, 중국 중시론도 탈냉전이라는 정세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불행히도 90년대 초반의 시도는 의미있는 변화로 확장되지 못하고 다시금 익숙한 한미동맹 체제로 흡수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DJ-노무현 정부 이후 동북아시아를 중시하는 발상과 태도 또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세계화의 가속화와 중국 경제의 부상, 남북관계 진전과 주변국을 연결하는 범지역적인 에너지.물류구상 등이 배경이다.
주변 열강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미국을 상대적이고 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최근 노무현 정부가 제출하고 있는 ‘동북아 균형자론’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구체적인 내용과 전개과정은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듯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처럼 고착화된 친미주의, 한미동맹 구조를 연성화 또는 탈피하여 외교안보 정책을 다변화하려는 발상과 태도이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가장 혁신적인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대담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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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미소 관계는 83년 이전과 85년 이후가 대단히 다르다. 레이건 대통령은 83. 3. 8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고 SDI 추진을 공식화했다.(3. 23) 이 연장선하에서 9.1 KAL007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었고 버마의 아웅산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테러가 있었다.
한편 84년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하고 85년 고르바쵸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면서 미소간 군축회담과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다.
84년을 경계로 한 위의 변화가 남에서는 84년 전두환정권의 유화조치를 시작으로 6.29선언으로 이어졌고, 북에서는 84년 1월 3자외담 제안 및 북미 관계 개선 시도, 평화문제에 대한 사활적인 문제제기와 연관되어 있다. 84~85년의 여러 방면의 남북대화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 만큼 국제정세와 남북 관계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이건 2기 행정부의 연성정책 기조와 미소간의 신 데탕트가 미소의 동시 군축이 아니라 소련의 일방적인 해체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남에서는 민주화없는 민주화, 남북관계에서는 군사체제의 해체가 없는 남북대화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 93년 말이 되면 북미는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의 원형이 되는 합의를 도출한다. 그것은 과거의 핵은 일단 그대로 두고 현재와 미래의 핵만을 동결한다는(89년 플루토늄 추출량에 대한 의문 해소는 무시하고 현재 이후의 핵 활동만 동결)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이 원칙의 파괴는 특별사찰과 전쟁으로 이어질 것인데 YS 정부가 93년 하반기 주장한 “근본적인” 해결이란 이 원칙을 흔드는 것이었다.
(3) 88년 고르바쵸프가 제기한 6자회담은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의 참여를 희망한 것이다. 노태우정부가 한소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이에 호응했는데 이는 미국의 기득권을 무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