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긴장완화 해법 - 셀리그 해리슨

셀리그 해리슨(미국 우드로윌슨연구소 수석연구원)

2000-08-25     연합뉴스
남북 정상회담의 흥분은 벌써 상당부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북한의 중화기들은 지금도 서울을 사격권으로 조준한 채 전방에 배치돼 있다. 정상회담으로 새롭게 움튼 평화의 기류와는 뭔가 주파수가 다른 시대착오적인 풍경이다.

전방의 북한군 중화기를 철수시키기 위해 한국과 미국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인가? 임동원 현 국정원장이 15년 전부터 줄곧 주장해 온 `공격무기 배치 금지구역`을 설정하기 위한 협상 테이블에 북한을 끌어앉 히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남북한 사이에 안보를 둘러싼 불신이 존재하는 한 쉬운 문제란 있을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북한을 안보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남북 양쪽의 전방배치 병력을 동시에 후방으로 철수시키는 방안 등을 협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지금까지 전방부대 동시 철수 협상보다는 평화협정 등 한국전쟁의 종전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서울과 워싱턴은 북한의 긴장완화와 군사적 신뢰구축 조처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여기서 북한의 반발은 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이해할 만한 것이다. 법적으로 아직 엄연히 전쟁상태인데 병력을 뒤로 빼고 감축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으로 싹튼 신뢰분위기 덕분에 서울과 워싱턴은 북한의 이런 의구심을 달랠 기회를 또 한번 갖게 됐다. 전방배치 병력의 동시 철수 문제를 협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휴전 협정의 당사자인 북한·중국과 평화협정을 포함한 종전문제를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군사정전위원회를 남북한과 미국 3자가 참여하는 공동군사위원회로 대체하자는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새로운 위원회는 비무장지대의 평화를 유지하고, 긴장완화 방안을 협의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이런 조처를 대가로 서울과 워싱턴은 북한으로부터 두 가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 첫째는 1991년 합의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다. 이 위원회는 3자 군사공동위원회와 동시에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 둘째, 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를 수정·보완해 실질적인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일이다.

임동원 원장이 공격무기 배치 금지구역을 처음 제안한 때는 89년이다. 탱크, 기계화 부대, 장갑차, 중화기를 이 지대에서 완전 철수시키자는 게 이 제안의 뼈대였다. 임 원장은 94년 이 제안을 좀더 구체화했다. 그는 “평양이 군사분계선에서 서울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공격무기 배치 금지구역은 지리적 대칭보다는 안보적 균형을 확보하는 관점에서 비대칭형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94년 6월17일 김일성 주석과 만나 깊숙한 대화를 나눈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김 주석이 비대칭 형태의 금지구역 설정을 수긍했다고 전했다. 카터는 당시 김 주석이 북한의 기습공격에 대한 남한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런 이유로 남북한 양쪽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병력을 철수시키되 서울의 지리적 위치를 감안해 북한군이 좀더 멀리 물러나는 문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고 말했다.

평양은 물론 비대칭적 철수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다른 문제에서 양보를 기대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됐던 94년 한국에 공격용 아파치헬기를 팔았다. 북한은 미국에 아파치헬기를 포함한 다른 공격용 무기를 새로 설정한 공격무기 배치 금지구역뿐 아니라 한반도 자체에서 철수시키기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기습공격과 관련해 북한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미국의 지상병력이 아니라 공군력이다. 북한이 중화기를 전방에 배치하고 핵무기와 화학무기, 미사일을 개발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전쟁 때처럼 미국의 공군력에 철저하게 압도당하는 일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 협상테이블에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미국이 지상병력뿐만 아니라 공군력에서도 양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현재 한반도에 배치한 전투기를 일본이나 하와이, 괌으로 이동시키는 카드를 생각해볼만 하다. 미국의 대다수 군사전문가들은 미군이 한국 공군에 정보탐지 및 지휘통제체계에 대한 적절한 지원을 제공할 경우 한국 공군만으로도 제공권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평양은 워싱턴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협력을 원하고 있다. 또 미국이 한반도에서 정직한 균형자의 역할을 하면서 3자 군사공동위원회의 안전판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북한이 원하는 주한미군의 역할은 남쪽에 대한 북쪽의 공격뿐 아니라 북쪽에 대한 남쪽의 공격도 억제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북한과 중국이 맺은 상호방위조약은 존속되겠지만 그 의미는 점차 퇴색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일본에 대한 방패로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 국방부의 속셈은 전혀 다르다. 미국의 군부에는 은밀하게 남한에 본부를 둔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사령부`의 설치를 구상하는 군사전략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이 새로운 사령부에 일본보다는 중국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기려 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200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