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1970년대 북의 변화
옥중에서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2005-04-18 외부기고
|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전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5년 4월 1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민경우 전 처장의 새로운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3가 99 전북 전주우체국 사서함 72호 전주교도소'이며 수인번호는 2500번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
본 연재물의 목표는 대략 7.4공동성명에서 2002년 대선까지의 조국통일과 연관된 정세였다. 위 시기 남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대체로 언급했다고 본다. 본 글에서는 본 연재물에서 빠진 부분 중 70년대 북의 변화에 대해 지적해 보겠다.
북의 특징은 이념적 변화가 선행하고 그에 기초하여 조국통일 정책이 후행하는 것이다.(반면 남은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이에 따라 조국통일과 연관된 이념적 궤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것이 조국통일 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① 철학적 원리의 전환
마르크스.레닌주의(ML주의) 기본은 유물론이다. 유물론이란 세계를 물질과 의식으로 크게 구분한 뒤 물질이 선차적임을 주장하는 사상체계이다. 유물론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는 부르죠아 혁명시기에 부르죠아 민주주의를 두고 각축했던 제세력, 계급의 물질적 기초를 명확히 하고자 함이었다.
19세기 초중엽의 서유럽 사회는 봉건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성과 진보의 새시대가 도래했다. 종교적 맹신과 특권으로 얼룩진 구시대가 와해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시대는 모든 사람, 모든 집단에게 광명과 희망을 약속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 와중에 마르크스(Marx)가 유물론을 통해 확증하려 한 것은 그렇게 도래하는 부르죠아 질서가 만민이 보편적으로 향유하는 공동의 희망, 미래가 아니라 부르죠아 계급, 자본주의 질서라는 물적 토대에 근거한 특별한 사회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것 같은 이성과 진보의 새시대가 실제로는 자본주의라는 또 하나의 특권 사회라면 자동적으로 역사의 그 다음 단계가 목표가 될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창시한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가 위와 같았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기본태도는 사상, 정치보다는 그 뿌리가 되는 경제적 이해, 사회적 변화에 관심을 두었다. 굳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건의 물질적.경제적 동기를 중시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태도인데 그런 면에서 마르크스가 견지했던 관점과 태도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전통으로 녹아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태도는 실제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되면서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문제에 봉착했다. 자본주의와 같이 적대적인 계급으로 대립된 조건에서라면 적대적인 계급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라 볼 수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역사를 추동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오쩌뚱은 이미 객관적으로는 사라진 계급을 찾아 지식인 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계급적 잔영을 문제 삼았고(문화대혁명), 1930년대 이후의 소련은 생산수단의 공유가 완성되었으므로 이제는 생산력만 발전시키면 된다는 낭만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다수의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된 상황에 맞게 유물론을 개작 또는 발전시킬 필요는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북은 이에 대해 ‘물질-의식’ 관계를 ‘사람-세계’로 재구성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았다. 전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인가 사회주의적인가하는 물질적 기초를 문제삼는다면 후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의 초점이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설정은 1970년대 북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개괄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사상론이다. 사람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내적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객관 조건보다 사상을 강조하는 북의 풍토는 여기서 연원한 것이다.
두 번째는 수령론이다. 사람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사람은 어떻게 편성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당과 수령의 영도 하에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수령에 의한 유일사상, 유일지도 체제는 이와 관련이 있다.
세 번째는 민족관이다. 사람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그 범위는 어떠한가? 사람이 역사를 개척하는 것은 민족과 국가 단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의 특별한 강조는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본 글의 주제가 조국통일 문제이니 만큼 세 번째 민족관에 대해서만 부연해 보겠다.
북에 있어 민족관의 문제는 정치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체제의 문제이다. 북의 철학에 따르면 역사의 주체는 “근로인민대중”인데 근로인민대중이 역사를 개척하는 기본 단위는 민족과 국가이다.
따라서 역사의 주체는 현실적으로 민족국가이다. 민족국가가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갖고 여타 민족국가와 호혜협력하는 구조가 세계사의 발전이고 민족국가 내부에서 사회계급적, 과학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 발전의 또 하나의 축이다. 따라서 북에서 말하는 민족국가는 사회 경제적 발전 과정의 어느 시기에 생겨나는 일시적인 범주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 과정을 관통하는 실질적인 역사의 주역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민족성, 민족 자주의 문제는 여타 사안과 저울질할 수 있는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라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성적인 문제인 것이다.
② 조직적 통합성의 심화
북은 일찍부터 통일단결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948년 출현한 북 정권은 여러 정치세력의 연합체였다. 일종의 연합 정권이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단일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정권으로 바뀐 것은 60년대 중반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사상의지적 통일 즉 유일사상체제가 중심이었다. 물론 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제정과정에서 주석제가 신설되고 여기에 김일성 주석이 추대되는 것을 보면 60년대에도 유일지도체제는 상당 부분 성숙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70년대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주도로 전 사회적인 조직적 통합성이 심화되고 그 조직적 통합성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을 정점으로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계서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이 세대교체,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체제 구축과 밀접히 연관되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은 74년 2월 후계자가 된 뒤 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공식 지명될 때까지 북 전역, 각계 각층에 전 사회적 조직화, 일원화 과정을 주도했다. 이 과정은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를 중심으로 당.정.군의 간부사업체계, 지도검열체계를 수립하는 과정, 당원은 물론 북의 전 주민을 조직 생활에 망라시키는 문제, 모든 정보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집중시키는 보고체계, 전후세대와 노장세대를 결합시키는 문제 등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자면 60년대까지의 유일사상, 지도 체제가 김정일 위원장을 정점으로 보다 전면적으로 강도 높게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70년대의 변화는 남이나 서방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70년대 형성된 사회체제가 현재의 북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70년대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하다.(주1)
③ ①,②의 특징과 영향
철학적 세계관의 전환과 거기에서 연원한 몇 가지 사상이론적 문제,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을 정점으로 구축된 사회적 통합 과정은 사회주의권과 세계 역사에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경우 2차대전이 끝난 후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70년대가 되면 대체로 체제가 연성화되는 것이 기본 흐름이었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 사망 이후 후르시쵸프 체제(56~64년)가 그러했다.
브레즈네프(64~82) 체제의 경우 이전 시기보다는 강성이었지만 스탈린 체제로 돌아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의 경우에도 문화대혁명(66~76) 이후 등소평 체제가 등장하는데 우여곡절이 크기는 했지만 이 또한 소련과 유사한 흐름이다.
제3세계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2차대전 직후 신생독립국을 휩쓸었던 기본 흐름은 독립과 자주 그리고 탈자본주의였다. 이념적.정치적 지향이 선명했던 2차대전 직후의 흐름은 70년대가 되면 자국의 이익 특히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는 실용주의적 흐름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70년대 북의 변화는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아래에서는 그와 같은 선택이 낳은 영향(결과)을 두 가지로 나누어 기술해 보겠다.
거칠게 구분하여 70년대 초반부터 분화되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변화는 80년대 초.중반, 새로운 노선 투쟁으로 비화되고 있었다. 노선 투쟁의 진원지는 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된 고르바쵸프의 신노선이었다. 신노선을 촉발시킨 핵심 고리는 다원주의 즉 자본주의 정치원리의 도입이었다.
고르바쵸프는 소련 사회의 정체성을 타파한다며 소련 내부의 여러 세력, 집단, 개인의 다원적 욕구와 이해를 자극했는데 이 조치가 공산당을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 질서를 균열시켜 소련을 붕괴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르바쵸프가 공산당 중심의 일원적인 정치 구조.체제를 문제 삼았다면 북(쿠바)은 사회주의의 본성은 모든 인민의 이해의 일치에 기반한 통일단결이라 주장하며 일원적인 정치구조 즉 일당체제의 심화를 강조했다.
중국은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이 상반된 선택이 북과 쿠바가 생존할 수 있었던 힘일 것이다. 특히 북의 경우 ①, ②에서 보았던 두 가지 요소 전사회적인 조직적 통합성과 함께 민족적.토착적 토대가 굳건했던 점이 강력한 내구성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중.후반의 경제위기 수습과정 또한 동일한 평가가 가능하다.
정치사상 영역에서 이념적 색채를 강하게 유지한 것이 북에 강점으로 작용했다면 경제적인 영역에서 그러했던 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초반이 되면 선진 자본주의 국가-사회주의, 신흥 독립국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게 된다.
선진자본주의 진영은 정보통신.유전공학.우주공학 등 기술.지식 집약적인 새로운 산업 분야를 창출하며 정세를 주도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정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 신흥 독립국의 경우 내자를 동원하고 수입을 대체하는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원을 국유화하기보다는 서방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시장을 활용하는 노선으로 선회한다.
이념과 사상우위의 북 체제는 위와 같은 전반적인 추세를 거스른 것이다. 이 결과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남북의 경제적 격차이다. 70년대 어느 시점부터 역전된 남북의 경제력은 남이 실용주의노선에 따라 서방선진국, 세계무대에 뛰어들어 발전한 반면 북은 정체.축소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남북의 이 격차가 통일방안의 차이를 낳은 일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④ 통일정책
ㄱ) 핵 개발(주2)
북핵 문제의 기원을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북핵의 본질, 해법 등이 달라진다. 이를 개괄해보면 74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후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수단으로 핵개발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 탈냉전이후 안보 위협에 직면한 북이 자위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보는 것, 에너지난에 직면한 북이 북에 풍부한 천연 우라늄을 활용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에서 시원을 찾는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 세 번째 에너지난 해소를 위한 경제적 목적이라는 주장은 90년대 초반 유행했고 2002년 2차 북핵 위기 초기에 잠시 대두되었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진 듯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이 정치협상용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 포기의 대가로 안전보장 요구를 명확히 함에 따라 설득력을 잃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각각 첫 번째가 공세적.주도적이고 두 번째가 수세적.수동적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동일한 문제일 수 있다. 평화협정을 강제하기 위한 공세적.주도적인 조치라고 보는 것은 74년 3월 이전 남북 평화협정의 일 내용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가 7.4공동성명이 무산되자 북미 평협을 요구하며 이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74년 3월의 북미 평협 주장에는 주한미군 철수가 함축되어 있다. 반면 탈냉전 이후 자체 안보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핵을 개발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안전보장에 필요한 실제적 조치 즉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안전보장을 단순히 서면으로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서면 보장의 물리적.현실적 근거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특히 북의 핵무기가 점차 현실화됨에 따라 이른바 상호관계에서 북의 “물건” 가치가 높아진 점, 미일동맹강화.인권공세 등 주변적, 비군사적 위협이 강화됨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북의 요구치도 상대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북핵의 시원이 74년인가 90년대 초반인가 하는 쟁점의 현실적인 의의는 군사적인 측면보다는 김정일 위원장 체제의 연속성.특징과 관련이 있다. 북의 역사를 구분함에 있어 중요한 분수령은 70년대 초반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70년대 초반이 되면 전 세계적으로 이념보다는 국가이익, 정치나 체제보다는 경제를 우선하는 실용주의의 흐름이 우세했다. 70년대 초반의 김정일 위원장 체제는 전세계적인 일반 흐름을 거슬러 이념.정치 우선의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과 담판을 짓기 위한 고강도 정치적 수단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일이다.
ㄴ) 통일방안의 수정
70년대 당시로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변화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이다. 서방 선진자본주의는 보다 세계화되었고 사회주의는 몰락했으며 여기에 편승한 남은 빠르게 발전했다. 반면 북의 경제는 정체.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통일방안이 변화하게 된다. 대체로 70년대~80년까지의 시기의 높은 단계의 연방제, 90년대 초반 이후의 시기를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높은 단계의 연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차이는 연방중앙정부와 각 지역 정부 사이의 권력 배분 문제이지만 이러한 차이를 낳은 동인은 70년대 초반 이래의 사회경제적인 변화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서방 선진자본주의 진영과의 관계, 외자에 대한 태도, 남의 독점 대기업 등과의 관계 문제이다. 이들 각각에 대해 70년대에는 부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제한하려 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지면을 통해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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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 부분은 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을 많이 참고했다. 이 책은 전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씨와의 대화형식을 빌어 북 사회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7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주도하여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을 소개한 5장은 흥미롭다. 신경완씨는 북 체제의 안정성에 대해 “외부에서는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지 못할 것이다. 김정일이 주체를 얼마나 강화시켰고, 일심단결 체계를 확고히 했는가는 상상도 못할 정도이다. 김일성때 보다도 오히려 확고하다고 볼 수 있다” 고 평가하고 있다. 또 탈북자 문제에 대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 주민의 일부 탈북은 김정일 체제의 강화과정에서 못 견뎌 뛰쳐나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위 인용은 위 책 209쪽, 211쪽에서)
일반적인 인식은 7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북 사회는 경향적으로 약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 붕괴론이 기승을 부렸다. 신경완씨의 평가는 90년대 사회주의 붕괴, 90년대 중.후반 경제 위기 과정에서 북 체제가 존립할 수 있었던 역사적 뿌리를 가늠케 해 준다. 특기할 만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주도했던 70년대 이후 북 체제의 공고함이 더욱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2) (1)과 비슷한 맥락에서 1960년대에 비해 70년대의 북이 더 발전했다고 보는 사람이 김명철씨다. 북의 핵개발에 대한 상식적 평가는 재래식 무기에서 뒤진 북이 핵무기를 통해 군사적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명철씨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미국을 평화협정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70년대 핵개발을 추진했다고 본다. 이러한 평가는 60년대에 비해 70년대의 북이 조직적으로 보다 고도화되었다고 보는 위 신경완씨의 평가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