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2002년 반미운동의 특징과 과제

2005-03-28     외부기고
2002년 하반기 대통령 선거전이 가열되는 와중에 두 여중생 사망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벌어졌다. 광화문과 미 대사관을 무대로 진행된 폭발적인 대중적 진출은 2000년대 초반 반미운동의 특징과 한계를 잘 보여주었다.

본 글에서는 2002년 반미운동의 특징을 살펴보고 이후 반미운동의 성장에 필요한 과제를 원론적인 차원에서 언급해 보겠다.

필자는 반미운동의 핵심은 주한미군을 중핵으로 하는 군사적인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주로 군사적인 부분과 직결된 반미운동에 한해서만 문제를 다룬다. 즉 근로대중의 생존권 투쟁, 가령 농민운동의 반미투쟁은 다른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① 2002년 반미운동의 특징

㉠ 미군 주둔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선도적.국지적.부분적 투쟁

2002년 이전부터 반미운동의 발전 조짐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9년 AP통신이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의 양민학살이 있었음을 보도한 사건, 2000년 매향리 미군 폭격장에서의 주민 피해를 시정하려는 노력, 미군 기지내에서의 환경 오염 및 독극물 방출 사건, 2002년 미군기지내 일용 근로자 전동록씨 사망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2002년 6.13 여중생 사망도 이런 유형의 사건일 것이다.)

미군이 장기간 주둔했던 만큼 위와 같은 문제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가 이전과 달랐던 것은 그러한 사실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미군 주둔에 따른 폐해를 제기하려는 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축소되거나 고립되었을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대중적 관심과 지지의 강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민족민주진영.시민 단체가 선도적이고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해당 피해 주민의 입장도 적극적이었다.

운동을 감싸고 있던 두터운 장벽이 걷히자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발전했다. 그런 면에서 2002년 하반기 여중생 사망으로 분출된 대중적 진출은 90년대 후반부터 예고되었던 사태이다.(1)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2002년의 반미운동은 주한미군.한미동맹 전체를 문제 삼았기보다는 주한미군과 한미동맹 체제에서 파생된 폐해를 시정하려는 노력이었다.(이는 2002년의 반미운동이 주한미군을 본격적으로 문제삼지 않은 제한적.개량적인 투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중의 의식이 그 지점에서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사안 중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의 사망, 매향리 주민들의 피해가 부각되고 대중적으로 확산된 반면 그보다 예민하고 무거웠던 주제인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문제나 MD 등의 사안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나 파급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2003년 이후 이라크 파병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대중적 지지는 크게 떨어졌다. 여중생 사망이 간명하고 직접적인 문제였다면 이라크 파병에는 보다 복잡한 정치적 이해와 계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운동의 주체

운동 대열을 구성했던 사람들은 87년 6월항쟁의 세례를 받은 386세대이거나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신세대였다. 이들은 2002년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의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집단과 대체로 유사했다. 2002년 하반기 반미운동의 동력과 대통령 선거전의 동력은 거의 일치했다.

그러나 양자는 2002년 반미운동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에서 크게 달랐다. 거리의 대중은 한미 관계의 수평화와 함께 그것이 은연중에 함축하고 있던 본격적인 반미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자로서의 노무현 진영은 한미 관계 수평화에서부터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는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신중한 처신이라기보다는 한미동맹이라는 족쇄위에 구축된 정치세력의 보다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거리의 대중과 이를 정책과 제도를 통해 실제 관철해야 할 주체 사이의 괴리는 2002년 이후 반미 운동의 정체를 가져 왔다. 물론 거기에는 대중의 준비 정도라는 객관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대단히 중요했던 것은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대중의 반미 정서의 발전과 확산을 분산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2003년 이후에는 반미와 관련한 보다 민감한 주제들이 적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 미군기지 이전 및 재배치, 북핵 등 보다 중요한 문제들이 즐비했음에도 2002년 광화문을 뒤덮었던 반미 물결은 2003년 이후 대체로 관망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바로 이 점이 2002년 반미운동의 최대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2002년 반미운동 대오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첫째는 한총련의 역할이고 둘째는 여중생 범대위와 관련된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래 반미운동의 최대 역량은 청년학생운동이었고 그 대표체가 한총련이었다. 그러나 한총련은 반미운동이 민족민주진영을 넘어 대중적 궐기로 확장되는 시점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청년 세대는 한총련의 조직적 통제력 밖에서 움직였고 한총련은 청년세대의 주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참가 단위였다.

이 점이 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전대협이 출현한 것과 다른 점이다. 특히 전대협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임수경 학생의 방북 등 조국통일운동을 선도했던 것에 비하면 한총련의 약화는 안타까운 것이었다.

2002년 광화문 시위를 주도했던 것은 여중생 범대위였다. 여중생 범대위는 민족민주진영+시민사회단체로 이루어졌다. 민족민주진영+시민사회단체라는 연대틀은 이후에도 이라크 파병, 탄핵반대, 국가보안법 철폐 국면에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여중생 범대위는 2002년 하반기 이후 약화되었고 동일한 구성을 가진 여타의 한시적 대책기구 또한 유사한 길을 걸었다.

2002년 여중생범대위가 감당했던 투쟁의 규모와 양상에 비하면 투쟁의 조직적 성과가 뚜렷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2002년 상황에서 민주개혁과 수구보수라는 관점에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후보는 전자의 관점을 비교적 온전하게 대변했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의 선전이 민주개혁운동 발전의 주요한 거점임을 고려한다면 2002년 반미운동의 결과가 민주와 개혁전선에서 민주노동당에 상응하는 뚜렷한 조직적 실체로 귀결되지 못한 점은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 부시 행정부에 대한 반감

2002년 대중적 반미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와 미 국민의 오만함이다.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고압적인 자세, 2002년 1.29 북.이란.이라크에 대한 ‘악의 축’ 발언, 동계 올림픽 과정에서 오노 선수의 태도 등이 반미 감정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확실히 운동은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것이면서도 감성적인 측면이 많은 듯 하다.

위의 관점에서 보면 향후의 반미운동 또한 지속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sofa 개정, 매향리 폭격장 문제 등은 한미관계의 수평화 과정에서 또는 미국의 한국 국민에 대한 민심 수습의 관점에서 해소되거나 약화될 소지가 크다.

그러나 부시의 일방주의나 미 국민의 오만함은 보다 뿌리가 깊다. 부시 행정부는 지속적으로 일방주의적 정책을 구체화하고 있고 미 국민의 오만함은 부시의 일방주의를 뒷받침하는 대중적 배경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 2004년 11월 미 대선이다. 선거에서는 예상외로 부시가 낙승했는데 이는 미 국민의 정서가 상식적인 예측과 판단에 비해 보다 종교적이고 폐쇄적이며 국제 정세에 무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다수대중이 反부시를 선호했는데 이는 미국에 대한 염증과 반감이 전세계적인 현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일방주의를 추구하는 부시 행정부와 2002년 반미 운동을 주도했던 386, 신세대는 대단히 다르다. 전자는 1960년대 후반 이후 보수우경화하는 미국 사회의 정점쯤에 있다면 후자는 비슷한 시기부터 특권기득권층을 점차 주변부로 밀어낸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흐름이다.

전자를 상징하는 문화가 낙태.줄기세포에 대한 지극히 종교적인 논쟁이라면 후자는 월드컵과 최첨단 IT로 무장한 생동감있는 세속적 정서이다. 이러한 간극이 2002년 반미운동을 확산시켰던 요인의 하나이고 이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2)

㉣ 민족화해

2002년 반미운동의 특징은 남북간 화해 분위기와 연동하여 진행되었다는 점과 대통령 선거직전에 긴장된 국면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6.29 2차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남북간 긴장이 조성되었다. 상황을 빠르게 수습한 것은 북이었다.

서해교전에 대한 유감표명을 시작으로 중지되었던 장관급 회담(7차: 8.12~14)을 재개하고 8.15를 계기로 민족통일대축전에 합의하였다. 여기까지는 서해교전 발발에 따른 남에서의 대북 강경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2001~2002년 수준에서 남북대화.교류를 재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1~2002년 수준의 남북대화.교류는 북미 관계가 경색됨에 따랄 제한된 범위에서 남북장관급 회담과 교류가 진행되었다. 남북 모두 원칙적인 입장에서 대화와 교류를 추진했기 때문에 대화와 교류의 폭은 작았고 그마저 자주 끊겼다.

7차 장관급 회담과 8.15 민족통일대축전 합의는 제한된 수준에서 단속적으로 이어졌던 대화와 교류를 재개하여 서해교전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반기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으려는 정치적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의 의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북미 대화재개, 북일 정상회담 등 외교적 조치, 신의주.개성 공단 등과 연관된 경제 개혁 조치와 함께 부산 아시안 게임(9.29~10.14)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참가시켜 남의 대중을 겨냥한 민족화해 노력에 착수했다. 남의 국민에게 북의 이미지는 굶주리고 경직되었으며 완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체제 위협을 고려하여 대규모 선수단의 직접 방문은 없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깔려 있었다.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 파견을 계기로 남북화해의식은 조국통일운동 진영을 넘어 일반 대중으로까지 빠르게 확산되었다.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비슷한 시기 한미간의 괴리가 커진 반면 남북간에는 통일이라는 도덕적 의무감을 벗어나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정치 공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한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북과 미의 쟁탈전에서 북이 승리한 것이다.

10월초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10.16 북이 핵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발표했으며 북미 제네바 합의의 의무 조항인 12월분 중유 제공을 거부했다. 북은 12.12 핵동결 해제를 선언했고 12.10에는 예맨으로 가는 북의 화물선이 해상에서 나포되었다.

이 모든 사건이 12.18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둔 시점에서 벌어졌다. 이전 같았으면 반북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보수적 정서가 상황을 압도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서산호 나포사건이 아찔했던 순간이다. 그러나 남의 반미 시위는 북미간의 극적인 대치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에 개의치 않고 광화문과 미 대사관을 겨냥하고 있었다.

북미간의 강경대치와 반미시위가 동행할 수 있다는 점은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극적인 사태 발전이었다.

② 향후 과제

㉠ 북핵 변수

북핵 문제는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약하기로 한다. 단 강조할 점은 다음과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을 진전시키기보다는 잘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는데, 북핵 문제는 어중간한 타협을 불허하는 외나무다리 위의 대치선에 들어섰다.

이 대치에서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 어떤 형태로든 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대북 억지력으로서의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북은 핵을 포기할 수 없다. 북핵 포기의 대가로 요구하고 있는 안전보장, 체제보장이라는 완곡한 표현의 핵심은 주한미군 또는 한미동맹으로부터 오는 대북 위협을 해소하라는 것이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남의 반미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다. 이제는 주한미군, 한미동맹 전체를 문제 삼을 때가 되었다.

㉡ 동북아시아

최근 동북아시아 정세의 특징은 정치군사적인 차원에서는 북의 대미공세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미국의 우위가 위협받고 있는 점 그리고 이와 별도로 부시 행정부의 미.일 동맹 일체화.군사화 기조가 서서히 중국 포위망을 가시화하면서 중국의 반발이 표면화되고 있는 점이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동아시아의 경상수지 흑자와 미 국채 매입을 통해 해소되는 불균형 구조가 조정국면에 들어선 점, 중국의 부상 등을 들 수 있다. 남북러를 연결하는 철도연결사업, 북일 수교와 그에 따른 일본 자본의 대북 진출, 남북 경제협력 등이 정치적인 이유로 지체되거나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을 둘러 싼 중.일간의 경쟁이 점차 가열되고 있고 북에 대한 중국 자본의 진출이 빨라지고 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동북아시아는 전환기에 들어섰다. 따라서 반미운동은 동북아시아 주변 정세를 민족의 이익에 맞게 재구축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과 결부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다.

남북미의 경우 낮은 단계의 연방제-민족공조-주한미군 지위조정이 현실적이다.(이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으므로 약한다.)

중국의 경우 중국의 민족주의나 경제적 부상에 대한 우려는 과도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민족주의의 전개 양상은 ‘동북3성 통제→남북의 분단→북의 접수’일텐데 이 중 최대치는 남북의 분단이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한반도로 확장하는 양상은 이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미.일 동맹에 비하면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북 접수, 중미가 대만과 북을 두고 정치적으로 흥정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과도한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효과적인 외교전략 설정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따라 한국은 큰 이익을 얻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따라 중국이 감당하지 못하는 중.고급 기술 수준의 부품과 완제품 수출의 확대가 이른바 중국호황의 실체였다. 향후에도 중국의 경제적 성장에 편승하여 중국보다 앞선 기술로 중국의 경제성장을 활용하는 방향이 옳을 것이다.

주한미군의 광역기동군화, 또는 한미동맹의 유연화 구상은 대만 문제에 휩쓸릴 여지가 있으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발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은 적극 활용해야할 대상이다.

일본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이전의 한미일 동맹은 한미.미일 동맹이라는 두 개의 쌍무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미.일 동맹의 군사화.일체화 경향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한미동맹의 조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전에는 반미운동의 총적 기조가 주한미군철수일 수 있지만 지금이라면 주한미군과 함께 미.일동맹의 군사화 경향을 최대한 약화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반일운동은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일본 문제는 한국 정부의 발언권이 세고 한국민의 민족 감정도 비등한 만큼 동북아시아 질서 재편에 유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양상은 남북이 공조하여 일본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이를 통해 미.일 동맹의 군사화, 일본 내부의 보수우경화 경향을 막는 한편 북일 수교를 강제해야 한다. 그리고 북일 수교와 함께 일본의 과잉 자본을 북, 동북3성, 시베리아 지역 개발도 최대한 유리한 조건에서 유치해야 한다. 일본에 대한 입장은 견제이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정치군사적인 차원에서 핵 강대국,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지위를 활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동북아시아를 종으로 연결하는 대규모 경제협력의 파트너이다. 동북아시아라는 국지적 차원에서 보면 핵강국,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러시아의 지위는 별 것 아닐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정치군사적인 측면보다는 경제적인 측면이다. 고 김남식 선생은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에서 세계 경제를 북미, 유럽, 중국으로 크게 3분하고 러.일을 위 3개 블록보다는 하위에 있는 작은 경제 단위임을 지적한 뒤 남북+러일을 연결하는 경제협력을 주장한 바 있다.

이 구상이 현실화되게 되면 남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형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에 유익한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다. 가령 남북러를 연결하는 철도 연결은 한반도의 분단과 대결 구도의 혁파를 가져 올 것이다. 또한 북일 수교를 통해 일본자본이 북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북을 고리로 한 일본의 보수우경화는 상당부분 근거를 상실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체적으로 끌어 들여야 할 대상이다.

외교 전략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이다. 특히 질서 재편시기에 주변 환경을 민족의 이익에 맞게 재구축하는 문제는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또한 한국민의 놀라운 민족적 감수성을 고려하면 이 동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한 사항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남의 총적 외교 전략은 미국을 전략 타켓으로 그 종범인 일본을 견제하고 중국을 활용하며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방향이다. 주변 모든 나라들과 친교하거나 적대하는 것은 외교 전략이 아니다.

지금 시기 내부의 민족적 동력을 어디에 집중시킬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에 대한 반중 정서는 과도했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반일 정서는 미온적이다.

또한 외교 전략의 방향이 중요한 것은 그것에 따라 내부의 권력구조가 바뀌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지루한 내부 싸움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북핵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 메가톤급 외교 사안이 처리되는 양상이 역으로 국내 정치 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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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대중적인 차원에서 반미운동이 시작된 것은 80년대 중.후반이다. 1985~6년 청년학생과 진보적 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반미운동은 주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형태였다. 즉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에서 반미운동이 촉발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반미운동은 민주화국면이 서서히 정착되면서 약화되었다. 또 하나의 조류는 80년대 말 농업 시장개방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반미 투쟁이다. 이 경우 농업시장개방이 시간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되었다. 기타 sofa 개정, 미군의 행패와 연관된 반미투쟁이 있었으나 범국민적 투쟁으로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92년 윤금이씨 사건이다.) 이를 제외하면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전 기간 주로 조국통일 공간에서 강령적.선언적 수준에서 반미 구호가 제창되었는데 이는 8.15대회를 사수하는데 중심이 있었던 만큼 대중적인 반미투쟁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이렇게 보면 90년대 후반 이후의 변화는 오랜 준비기 이후에 오는 질적인 도약과 같은 것이다.

(2)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객관 현실과 인식 사이에 꽤 큰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객관현실의 차원에서 한국민은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더해 개방적 의식을 접목시키고 있다. 이것은 70년대 초반 이후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신세대가 전통세대의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대체하면서 만들어진 진취적이고 건설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반대로 미국민은 시간이 갈수록 폐쇄적이고 편협한 자국 중심주의로 빠져 들고 있다. 객관 현실이 이렇지만 그동안의 관성 때문에 다수의 국민들이 미국이 여전히 세계화, 개방화의 첨단쯤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