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북의 농업

옥중에서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2005-03-14     외부기고
민경우(통일연대 사무처장,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간첩죄명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올해 5월 24일 1심에서 징역 4년, 자격정지 3년 실형을 선고 받고 이어 10월 28일자로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현재 서울구치소(186번)에 수감 중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북의 농업 상황에 대해 서술해 보겠다. 이전 시기의 반북 정서는 “적화통일”, “남침” 등 군사적인 측면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군사적인 부분에서 형성된 반북적 정서는 약화되거나 사라진 반면 기아, 탈북 등 경제적 문제 특히 먹는 문제와 연관된 반북 정서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북의 농업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통일운동 발전의 핵심적 부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본 글에서는 2차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북의 농업이 처한 현실을 개괄해보고 그것이 통일문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지적해 보겠다.

①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

2차대전 직후 북 지도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북의 토지개혁은 짧은 시간에, 전면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유명하다. 토지개혁으로 지주-소작 관계에서 고율의 지대와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영토가 좁고 인구가 많았던 상황에서 토지개혁의 결과는 광범위한 자영농, 소농을 창출했을 것이다. 북 지도부는 자영농.소농 체제를 길게 유지하지 않고 비교적 빠른 시간에 협동농장으로 전환한다. 농업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근대 농업사회와 달리 근대 산업사회에서 한 국가의 농업을 좌우하는 열쇠는, 첫째 농업에서의 소유 관계, 둘째 근대적 공업과의 연계, 셋째 다른 나라와의 무역 질서이다.

농업에서의 소유관계란 농업을 담당하는 주체가 소농.자영농인가, 대규모 기업농인가, 아니면 협동농인가의 문제이다.(원시 공산제 유형의 농업이나 지주-소작 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근대사회에서 이는 부차적이다.) 소농.자영농과 기업농의 경우 농민의 개인적 이익에 기초하여 생산활동을 진행하는 만큼 생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북의 경우에도 소농체제를 유지했다면 농업 생산성은 보다 높았을 것이다.

북이 소농→협동농으로 개조한 것은 경제적인 생산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첫째, 소농 체제가 계속될 경우 필연적으로 부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시장이 확대될 것이며 이는 향후 언젠가는 추진해야할 사회주의적 개조에 부담을 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생산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사회주의적 관계를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공업 육성을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근대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공업이다. 전근대사회가 기후나 노동력과 같은 자연적 요소, 인적인 한계에 의해 농업이 좌우되는 양상이었다면 근대사회는 근대적 공업의 개입 정도가 농업 발전의 주된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북의 입장에서는 농업으로부터 시작해 장구한 기간을 거쳐 공업화를 이루기보다는 공업을 발달시켜 농업을 선도하는 기조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농업의 잉여 노동력은 공업으로 이전되고 농업의 공업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소농(토지의 분산성)→협동농(토지의 규격화.집중화)이 유리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② 북 농업의 발전.안정

1964년 「사회주의 농촌에 대한 테제」에 따르면 농업 분야에서 사상.기술.문화의 3대 혁명을 추진하고 공업 또는 공업적 방식에 의해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논의를 진척시켜 보겠다.

농업에서의 3대혁명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농민의 토지에 대한 집착, 분산성, 보수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농업 생산성을 농민의 사적인 이익 추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에서 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농업 생산성의 측면에서는 뒤떨어졌지만 사상과 문화를 강조하는 북의 농업 정책은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마오의 인민공사가 상당한 무리와 출혈을 동반하고 등소평의 경제 정책이 농촌.농민의 광범위한 불안정과 소외감을 낳은 것에 비하면 90년대 초반 사회주의 경제권이 무너지기 이전의 북 농촌은 사회적 안정의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된 시점부터 90년대 초반 이전까지 북 농업의 또 다른 특징은 4가지 기술혁명(수리화, 전기화, 화학화, 기계화)에 근거하여 공업.도시가 농업.농촌을 지지하는 형태의 농업육성정책이다. 물론 근대사회의 농업은 공업이 농업을 선도하고 있다. 미국의 기업농은 농업에서 광범위하게 차용된 기계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예를 동원한 플랜테이션 경영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북이 농업분야에서 기술혁명을 강조한 것은 농민.농촌.농업 분야를 사상.문화적으로 개조함과 함께 도시.노동자.공업의 근대적 성과를 농업에 투여하여 농촌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려는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농업 정책과의 차이이다. 북은 공업적 성과가 높았고 중국은 농촌에 퇴적된 농업 인구가 워낙 많았던 객관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북은 사회주의적인 공업 분야의 성과를 농업 부분에 투자하여 양자 모두를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발전시키려한 반면 중국은 농민의 사적 이익을 자극하여 자본주의적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농업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농촌에서 사적 이해가 분화되고 농촌과 도시와의 격차가 커지면서 사회적 불안정이 쌓였다면 북은 농촌에서 사상.문화 혁명을 추진하고 공업이 농업을 지원함으로써 사회적 불안정의 소지를 없앤 것이다.

북이 추진했던 기술혁명은 수리화, 전기화, 화학화, 기계화를 의미한다. 화학화는 질소비료 등과 같은 화학비료의 대량 사용을, 기계화는 트랙터와 같은 노동 절약적인 기계의 사용을 뜻한다.

근대사회에서 농업의 발전은 이러한 근대적 공업의 성과와 결합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질소를 고정시키는 화학의 발전과 이에 기초한 화학비료를 대량 생산할 수 없었거나 품종 개량을 통해 병충해에 강한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전통적인 농업적 방식으로는 2차대전 이후 급팽창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북의 경우 북의 농업을 지탱시켰던 근대적인 공업 능력이 유지되는 조건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북 농업을 지탱시켰던 공업적 능력이 사회주의 붕괴에 따라 와해되면서 발생했다.

참고로 남에 대해 말해보면, 60년대의 경우에는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농촌의 과잉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했다. 이 시점에서 보면 크게 보아 보다 빨리 성장하는 공업이 농업을 흡수하는 형태라 볼 수 있다. 70년대 다수확 품종이 재배되면서 농업생산력은 농업인구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제고되었다. 남 농업의 위기는 80년대 이후 남이 세계 시장경제 체제로 흡수되면서부터이다.

북의 경우에는 자립경제체제이므로 농업에서 국제시장의 존재는 특별한 변수가 아니었다면 남의 경우에는 세계시장 경제체제로의 편입이 70년대 농업기술.농업생산성 제고의 성과를 뿌리로부터 위협하는 핵심요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근대적 농업의 세 가지 변수, 즉 농업의 소유관계, 근대적 공업과의 연계 정도, 시장화 중에서 3번째 시장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여타 부분의 강점이 무화(無化)되고 있는 것이다.

③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 농업의 위기

사회주의권이 해체되면서 북은 농업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이 위축.붕괴되었다. 북의 농업을 지탱시켰던 힘이 수리화.기계화.화학화.전기화에 있었던 만큼 북 농업이 홀로 유지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90년대 이후 북 농업의 위기는 단순한 식량난이라기보다는 경제 전반의 위기가 농업 분야에서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이 상황을 수습했던 기본 전략은 선군정치였다. 선군정치는 역량과 자원을 군대와 국방공업에 집중하여 미국과의 대결을 통해 상황을 돌파하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여타 부분에 자원을 집중할 여력은 없었다.

선군정치와 북미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북은 철도운수, 금속공업, 석탄 증산 등 선행부문의 강조와 농업 증산에 대한 호소 등 늘 하던 방식으로 상황을 이겨내려 했다. 농업 분야를 발전시킬 획기적인 투자의 여력은 없었고 남이나 자본주의 진영에서 기대하는 개혁개방으로의 전환은 북의 목표가 아니었다.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북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모작, 감자농사의 강조, 토지정리, 종자혁명 등 기본 틀을 유지하는 토대 위에서 농업생산을 제고하는 점진적인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농업위기가 본격적으로 현실화된 95년 무렵부터 2005년 현재까지 북의 농업은 느리고 완만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북 농업 상황을 평가해 보자.

㉠ 잃어버린 10년

북의 식량 위기가 본격화된 95년부터 올해까지 10년 동안 북 주민의 생활고가 계속되었다.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농업 생산량이 늘고 있지만 앞으로도 얼마간은 고통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어느 시점에서 시작된 농업 위기는 멀지 않은 미래에 해소될 것이다. 북미 공방이 막바지 국면에 접어들었고 식량위기를 통제할 수 있는 북의 대응 능력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충 10년에 이르는 식량난은 북의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10년에 이르는 시간 북 주민에게 돌아가는 하루 배급량이 감소되었다. 그리고 북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은 산간 오지에서는 기아.기근.질병.탈북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보건.교육.문화.체육 등 체제 보위나 기초 생활에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 크게 위축되었다.

필자는 북의 내부사정을 정확히 알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통해 북이 겪었던 고통을 돌아보겠다.

먼저 남북의 청소년들의 체격조건이다. 북이 경제란에 고통 받던 10년, 남은 풍요를 구가했다. 덕분에 비슷한 시기 남의 청소년들의 체격은 빠르게 서구화되었다. 반면 같은 시기 북의 청소년들의 경우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남북 군인들의 체격 조건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남 군인의 평균 신장이 170cm라면 북은 162~3cm정도라고 한다. 이는 1,2차대전시기 독일.프랑스의 젊은 세대가 대규모로 희생된 것, 문화혁명의 중국에서 이에 가담했던 한 세대에서 지적 자극이 사라진 것처럼 역사에 자취를 남길 것이다.

다른 사례는 북의 축구이다. 70년대만 해도 남북의 축구는 비슷했다. 90년대 남의 축구가 발전하여 2002년 4강에 진출한 반면 북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축구에서 보듯 유사한 분야, 가령 보건,체육,문화 등 한 사회를 풍성하게 하는 여러 영역에서 후퇴와 정체가 있었을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북에게 좋았던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이루는 기본 골간에 대한 기본 투자와 유지에 성공한 것이다.

2005년 2.9 북 축구는 아시아 정상급의 일본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대등한 경기를 보였다. 이는 국방과 공업과 같은 기본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영역에서 상황을 수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 일관성

북 역사의 가장 커다란 특징의 하나는 일관성이다. 한번 정해진 노선은 상황과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하나의 줄기를 이루며 고집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사회는 집권 정당의 변화에 따라, 중.소 또한 집권자의 교체에 따라 정책 변화의 폭이 큰데 비하여 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하나의 궤적을 이루고 있다.

고난의 행군으로 일컬어진 지난 10년간에도 위와 같은 일관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래에서는 농업 상황을 중심으로 이를 지적해 보겠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북 농업의 특징은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와 3대혁명을 골자로 하는 사회주의의 고수와 공업의 성과를 농업에 투여함으로써 농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정책 기조이다.

제도권의 문헌에서는 분조관리제.텃밭경리 등 농업경영,소유관계에서의 변화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개인농과 향진기업이라는 농촌.지방의 토착산업을 육성함으로써 시작된 중국 개혁.개방의 과정을 북에 대입하려는 주관적 요구의 산물이다.

굳이 소유관계의 측면에서 농업문제를 보자면 중요한 것은 토지정리사업이다. 토지정리사업은 토지를 규격화된 대형토지로 변화시킴으로써 토지 유휴를 찾아내고 기계화 도입에 유리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것은 농민과 농업에 존재하는 전근대적 잔재(봉건적.사적 이익추구.분산성)을 최종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토지정리사업이 당장의 식량난 해소에 도움이 되는 바는 크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북이 당장의 식량난 해소에 급급하기보다는 미래에 관심을 두고 사회주의적 소유관계를 심화시키는 문제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과학기술.공업적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노력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의 경제정책을 총괄한다면 당장의 경제위기는 사상적 결속과 내핍으로 이겨내되 과학기술.공업잠재력은 유지 발전시켜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다. 정보통신산업을 육성하여 “단번도약”하겠다는 정책도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남의 제도권 문헌에서 등장하는 편견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남 제도권 학계에서 북의 경제 문제를 다루는 방향은 고정되어 있다. 첫째 자본주의적 방향 또는 중국식 개혁개방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편린, 단초들을 찾아내는 것, 둘째 단번도약과 같은 과학기술.공업육성과 같은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번째 길을 봉쇄함으로써 첫 번째 길로 유도하고 싶은 내적 희망의 산물이다. 후술하겠지만 북의 고난의 행군을 보는 남 제도권의 시각이 이러했기 때문에 식량난.고난의 행군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을 육성하고 설비를 현대화하려는 북의 일관된 전략과 집념보다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개혁 조치들이 과도하게 부각되었다.

국가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당장의 필요보다는 중.장기적인 나라의 안정과 발전이다. 당장의 식량난보다는 과학기술과 선진 산업 육성을 중시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의 당연한 선택이다. 통일의 입장에서도 7천만 민족, 한반도 전체를 하나로 놓고 첨단 산업, 최신 과학기술을 정점에 둔 기본 전략이 채택되고 남북이 상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전략이 하부에 결합되어야 한다.

북의 단번 도약 전략이 성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필자가 판단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북이 고난의 행군, 식량난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열의와 공업적 잠재력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농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 농업의 궁극적인 출로는 공업적 성과, 나라 전체의 안정화의 성과가 농업 분야에 확산되면서 마련될 것이라는 점이다.

㉢ 남북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여기에는 남북이 북의 식량난을 거치면서 주로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얻고, 잃은 점을 평가해 보겠다.

먼저 북에 대해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북의 식량위기가 심화되면서 북 주민이 크게 세 가지 층으로 분화되었을 것이다. 하나는 핵심지도층이고 다른 하나는 중.하부 대다수 주민층 그리고 소외.이탈 세력이다. 각각의 비율을 산정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이다. 분명한 것은 핵심지도층의 주도 아래 대다수 중.하부 주민이 식량난에 따른 사회적 위기를 폭넓게 분산시켰다는 점이다. 반면 비교적 소수의 집단이 기아.탈북이라는 형태로 체제로부터 유리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중요했던 것은 핵심지도층+다수의 중.하부층이 위기를 분산시키며 충격을 흡수했다는 점이다.(반면 미국이나 남의 보수우파가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부류의 움직임이다.) 이것이 북 사회의 강점이다. 핵심 지도층의 효율적인 행정관리능력과 중.하부층이 고통을 분담할 수 없었다면 예를 들어 아프리카처럼 그나마의 식량, 해외의 원조 등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관리 역량이 없었거나 특권층의 부패로 고통이 한 부분에 집중되었다면 북의 식량난은 미증유의 참사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북은 식량난을 겪으면서 어떻게 변했을까?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북에서는 “승리의 10월”이라는 입소문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10월은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이 되는 달이다.

북의 입장에서 2000년의 정점은 6월 남북정상회담, 10월 조선노동당 55돌 행사, 연말 북미 정상회담이었다. 이 중 북 주민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10월 조선노동당 55돌이었을 것이다. 이때 북은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라는 대규모 매스게임을 진행한 뒤 고난의 행군이 끝났음을 확인했다. 북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고난의 행군이 끝났음을 느끼게 해주는 배경 같은 것이다.

그 후로 5년이 지났다. 2005년 2.10 외무성이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하면서 지루하게 이루어지던 6자회담 국면이 가파른 대치 국면으로 발전하고 있다. 북 주민은 이 가파른 대치 국면이 궁극적으로는 2000년 조선노동당 55돌과 유사한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93.3.11 NPT탈퇴, 98.8.31 광명성1호 발사와 비슷한 것이 2005.2.10의 외무성 성명이라면 ‘승리의 10월’이란 2.10일이 94.10.21의 북미제네바 합의, 2000년 연말의 북미간 극적인 정치협상과 같은 것이다.

‘승리의 10월’이 현실화될 것인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승리의 10월’에 담긴 북 주민의 정서와 태도이다. 그들은 ‘승리의 10월’을 위해 고난의 행군을 지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는 간고의 세월을 버텨왔던 북의 자부심과 긍지가 묻어있다. 고난이 사회적 분화를 심화시키기도 하고 사회적 통일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북의 경우는 후자의 측면이 강한 것 같다.

한편 남은 어떨까?

북이 내걸었던 핵심 구호는 선군정치와 단번도약이다. 반면 남은 북이 걸었던 핵심구호보다는 그 구호에서 파생된 사회적 현상인 경제난.식량난에 관심을 집중했다. 양자의 괴리는 선군정치가 본격화되는 현 상황에서 상당한 괴리를 낳고 있다. 아래에서는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 보겠다.

첫째, 시기적인 불일치이다. 북의 경제난이 심각했던 것은 아마도 96~97년 무렵일 것이다. 98년 하반기부터는 정치사회적 통합력을 회복하고 경제재건에 착수했고 2002년 이후에는 북미간 치열한 정치군사적 격돌과 함께 대담하고 적극적인 경제 재건을 모색하고 있다.

남이 북을 지원한다면 96~97년에는 긴급한 인도적 지원이, 98년 하반기 이후에는 비료.모내기용 비닐 등 농자재 지원이, 2002년 이후에는 개성공단 건설 등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의 지원은 한 박자씩 늦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속도만큼 정서적.정치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남북간에 존재하는 정서적 간극이란 이런 것이다. 북에 긴급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던 96~97년 남에는 대북강경론, 북 붕괴론이 기승을 부렸다. 북의 입장에서는 정작 필요한 식량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북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선동적인 정치적 주장에 휩쓸리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집권 초기 이른바 ‘대화의 모멘텀’,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는 이름하에 남북대화는 하되 실질적인 협력은 추진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지나치게 몸을 사렸거나 기만적이었는데 이른바 노무현 효과로 남의 주민은 이를 못느꼈지만 북이 느낀 배신감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최근 북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승리의 10월’을 위한 진통으로 생각하며 긍지를 보이고 있는 반면 남의 일부에서는 식량난→인권 문제로 쟁점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인권.탈북 문제에 대한 남북의 시각차는 체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논리적인 차이와 함께 심각한 정서적 차이를 갖고 있다. 남이 북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반면 북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북미 공방의 대치선에서 미국의 대북 압박구도와 밀착되어 있다.

남의 주류세력은 틈만 나면 북한판 마셜플랜을 거론한다. 여기에는 우월한 남이 북을 지원해야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반면 북에서는 선군정치가 북의 체제안정 뿐만 아니라 남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극단적인 정서적 괴리는 조만간 충돌하고 수렴.조정될 것이다.

문제는 남의 경우 북의 핵심 주장인 ‘선군정치’와 ‘단번도약’에서 출발하여 북에 접근하지 않고 거기서 파생된 결과를 가지고 거꾸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연하자면 마셜플랜을 할 계획이면 실제로 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하나를 가지고 생난리를 치는 상황에서 필자는 마셜플랜을 추진할 비젼과 지도력이 남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평하자면 일부 개혁적인 정치인의 꿈이다. 그러니 별것 아닌 개성공단 행사에 수십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앞을 다투어 행사장에 참석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마도 정치적 간극일 것이다. 위와 같은 정서적 간극이 발생한 배경의 하나는 북이 선군정치의 목표를 미국에 집중하면서도 남에는 화해협력(민족공조가 아니라)을 강조한 점, 다른 하나는 북미.남북간의 거시적인 역관계를 배경으로 남 내부에서 주로 보수우익과 화해협력세력 사이에 각축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정세를 좌우하는 근본적인 힘은 북미간에는 선군정치와 부시의 일극 패권전략, 남북간에는 민족공조와 한미동맹사이에서 형성되어 있다. 북이 선군정치를 남에 적용하지 않으면서 남에서 전통적인 반북정서, 남침.적화통일론 등은 힘을 잃었다. 그리고 이는 반북정서를 뿌리로 성장한 보수우익세력의 지반을 약화시키고 화해협력세력의 집권을 가져왔다.

물론 2002년 대선에서 남북관계 문제는 여러 쟁점 중 하나였을 뿐이고 필자의 판단으로는 핵심적인 전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대결이 유예된 시점에서 화해협력 세력이 유리한 배경을 가지고 싸웠음은 분명하다. 바로 이점이 객관현실에 비해 남북간 정서적 괴리를 확대시킨 요인이다.

남의 관점에서 주된 격전장인 선군정치.핵.북미공방 등에 대한 체감 정도가 낮은 반면 하위 변수인 식량난, 탈북 등에 대한 체감 정도는 과도하게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에는 어떨까?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6자회담 또는 동북아시아 열강 구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지렛대를 상실했다. 노무현 정부는 그저 상황을 지연시킨 것인데 이렇게 되면 북미 심지어는 일본.중국마저 남에 대한 부담이 없어지게 된다. 북은 형식적인 남북대화를 계속할 이유가 없고 미국은 순종적인 남에 신경쓸 이유가 없으며 일본은 과거사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로 나가자는 순진한 주장에 당연히 공감했을 것이다.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대중(對中) 압박은 과도하거나 감정적인 색채가 짙었다. 중국이 살짝 발을 빼자(필자의 판단으로는 중국의 목표는 중국 동북 지방을 통제하기 위한 수세적인 측면이 중심이지 북을 접수하기 위한 공세적인 측면이 중심이 아니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정치사회적인 의제와 밀착되지 않는 민족적 주장은 방향을 잃었다.

여기에 더해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마저 미궁에 빠지자 남은 최종적으로 지렛대를 상실했다. 6자회담이라는 기묘한 대화가 계속된다면 그나마 발언권이 남아 있었겠지만 2.10 북 외무성성명으로 그마저 사라졌다.

북핵 담판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근본 전선이다. 남에서 형성된 민족적 의제는 대부분 과거의 것이거나 관념적 성격이 짙다. 일본과 연관된 과거사 문제, 중국의 고구려사 문제 등이 그것이다. 역사 문제가 건설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현실 의제와 생동감있게 결합되어야 한다.

반면 현실의 민족적 의제, 가령 한미동맹,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남북경제협력 등에서 남은 진취성과 미래지향적인 역동성을 상실했다. 그런 가운데 90년대 중.후반을 뿌리로 하는 대북 우월감.동정심 등이 광범위하게 허공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