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북핵문제 '자기 목소리' 내기

2004-11-15     연합뉴스
 '초대국인 미국이 변해야 북한이 변한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 이후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북핵 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부가 본격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요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양측의 심기를 살피며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해왔던 그동안의 태도에 비해 뚜렷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 정부의 달라진 태도는 해외순방 중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지난 13일(이하 한국시간) LA 미RNR 국제문제협의회(WAC) 오찬에 이어, 15일 아르헨티나 교민간담회에서 행한 잇단 연설에서 잘 드러나 있다.

노 대통령은 WAC 연설에서 북한에는 완전한 핵폐기의 결단을 내릴 것을 강하게 촉구했으며, 미국에는 '진정으로'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특히 노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해결은 김정일 체제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대북 제재.봉쇄 및 무력사용은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반도에서 제2의 전쟁에 대해서는 그 명분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한국 정부와 한국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연한 메시지를 미국에 보낸 것이다.

아르헨티나 교민간담회에서도 노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남북한은 물론 주변 4강도 한반도에서의 분쟁을 원치 않고 있다는 점과 함께 북한도 노력하고 있으니 "북한이 개혁.시장경제를 받아들여 먹고 살게 도와주는 게 우리의 관심"이라고 말해 김정일 체제의 교체가 목표가 아님을 거듭 밝혔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김정일 정권의 교체를 추구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입장과는 확실히 선을 그은 셈이다.

이렇게 노 대통령이 직접 발벗고 나선 것은 지금이 '폭풍전야'와 같은,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파국을 앞둔 위기국면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을 놓쳐 6자회담의 틀이 붕괴될 경우, 미국은 대북 제재 및 봉쇄에 들어가고, 이에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나 핵실험 강행 조치 등으로 맞선다면, 다시 미국은 대북 군사공격에 들어가고 북한이 전면전을 감행하는 수순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그런 악몽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에 대한 사전차단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실제로 그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때 한국의 역할은 없어지고, 전혀 원치 않는 상황으로 끌려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정세현(丁世鉉) 전 통일부 장관은 "우리 사회에는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지도급 인사들 가운데도 그렇다"고 말하고 "미국의 이익이 반드시 한국의 이익과 합치될 수 없고 이익이 상충될 때는 '노'라고 얘기할 수 있다"며 대미 패배주의 관점의 극복 필요성을 역설했다.

국내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대미 메시지가 지난 9∼12일 이종석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의 방미기간에 미 네오콘의 대북 강경기조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대응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으나, 이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대미.대북 메시지와 관련, "부시 미 대통령이 재선되었으나, 여전히 4차 6자회담의 조기 개최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방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상당기간 준비해왔던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 정부의 '자기 목소리 내기'는 이와 함께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비롯한 주요 한미동맹 현안이 올해 원만하게 타결된 이후 한미관계가 안정적인 단계로 들어선 데 대한 자신감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서울=연합뉴스) 이 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