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사세보기지 감시운동가 시노자키 선생님

걷기명상 48일째

2004-08-16     외부기고
우베와 하카타

야마구치현은 역대 수상을 비롯 영향력 있는 정치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식민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의 중국전력회사 앞에서 핵 발전소 반대 집회를 하고 있는 분들을 뒤로 하고 우베시로 향한다. 우베시 바닷가는 짙은 옥빛자태를 내뿜고 있었지만 왠지 적막한 쓸쓸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두개의 큰 기둥이 서 있었다. 그것을 이곳 사람들은 비아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 영어인지 일어인지 아니면 이곳의 사투리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쨌든 비아란 이런 것이었다. 우베시와 바다 건너편의 이이츠카나 큐슈지방에는 해저탄광이 많았다 한다. 우베시는 바다 밑에 석탄광이 발견되어 해저 터널을 뚫고 들어가면서 작업을 하는데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바다위로 만들어놓은 대형 환기구가 바로 비아라는 것이다.

어디나 그렇듯 전쟁을 위한 강제징용에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복지를 생각할리 없었다. 인권은커녕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마련할 겨를없이 강행되는 작업은 반드시 대형사고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바다밑의 흙이 붕괴되면서 탄광의 갱도전체가 내려앉은 것이다. 낙반사고였다. 그것은 예정된 필연이었다.

이 사고로 200여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중 3/4이 조선인이었다. 매년 2월이면 태평양전쟁 유족회에서 이곳을 찾아와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위령탑을 찾아보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동네를 한참을 돌아 헤맨 끝에 간신히 위령탑을 찾아냈다. 한적한 누군가의 집마당에 비는 세워져 있었다. 전쟁의 모순과 노동의 모순과 민족의 모순이 켜켜이 쌓인 이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카타

하카타로 가는 길에 시모노세키에 잠시 들러 과거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민 온 항구를 돌아본다. 이곳에 쏟아지는 짐처럼 내 던져진 조선인들은 가까이는 큐슈로 멀리는 동경이나 때로는 삿뽀로까지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사람들은 모두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군정당국도 일본인들도 이것을 자신들의 도와야할 의무로 생각치 않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작은 배를 구입하여 삼삼오오 조선행을 강행한다. 보트피플이 된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태풍이었다. 태풍을 피해 섬에 급히 상륙해야 했지만 일본정부도 새로이 권력을 이양받은 미군정도 이를 허용하지도 신경쓰지도 않았다. 섬에 조선인이 상륙할 경우 치안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그들의 구실이었다. 결국 섬에 상륙하지도 못한 채 거대한 태풍앞에 일엽편주의 신세가 된 그들에게 기다리던 운명은 죽음이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조선인이 바다속에 수장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닷가로 떠밀려온 수많은 시체를 일본인들은 어찌할 수 없어 한곳에 쌓아 화장을 했단다. 몇 날을 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의 흙이 시커멓게 탄 채로 오랜 세월 지워지지 않았단다. 도 선배가 그 곳을 처음 찾아 갔을 때 까지도 그 검게 탄 흙은 그대로 남아 있었단다.

사세보

익숙한 풍경들이 다가선다. 시노자키 선생님이 기다린다고 했다. 사세보기지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진 그는 날마다 들어오고 나가는 선박을 감시하며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세보 방문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이 바로 시노자키와의 만남이었다.

유엔사에 대해 물은 것은 내가 아닌 도 선배였다. 이곳의 유엔사는 병력은 없고 사무실에 담당 직원만 있으며 3년에서 5년 단위로 유엔군사령부의 시찰을 받게 되어있단다. 시찰을 받을 때는 도쿄에 있는 대사관들에서 유엔사와 관련된 담당자들이 한명씩 나와 함께 사세보기지를 시찰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이며, 시찰활동 즉 한번 기지를 둘러보는 정도라는 것이다. 유엔군사령부는 군사기구이지만 외교적 기능만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외교는 군사에 우선한다. 미 합참이 유엔사에 명령을 내리면 유엔사는 그 즉시 작통권을 장악할 수 있다. 바로 그 기능을 위해 ‘연락업무’란 명목하에 일본의 기지마다 유엔사 직원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를 봐도 유엔사는 유령조직일 뿐이다. 가장 저렴하게 유지되지만 유사시엔 가장 고효율을 발휘하는 기구이니 미군부로서는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는가?

시노자키 선생의 한국과 관련된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신문지상에서 발표되는 여러 가지 미군재배치 계획 등은 아직 구상단계일 뿐으로 언급할 것이 없으며 그보다 오히려 실질적인 미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셨다. 동의하는 바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자료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4일전 키티호크항모가 동해로 이동했으며 사세보의 선박 2척이 오늘 아침 이동했다는 것이다. 어떤 선박이었는가를 묻자 한 척은 유조선 한 척은 음식 등을 지원하는 지원함이었다고 한다. 또한 주목할 것은 최근 부산에서 사세보로 물자들이 이동해 왔다고 한다. 주로 MWR(Moral, Welfare, Recreation)이라는 복지 부대의 물자들이다.

복지부대는 가장 쉽게, 그래서 가장 먼저 움직일 수 있는 부대중의 하나이다. 이미 지난 3월 독수리 훈련 당시 평택항에 MPS 사전배치선단이 입항하여 물자를 하역하였다. 유엔사공보관은 단순히 물자를 내리고 싣는 훈련일 뿐이라고 했지만 수백대의 트레일러 차량이 캠프험프리로 들어가는 것이 팽성주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선단이 부산을 거쳐 지금 사세보에 입항해 있다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배를 타고 사세보를 둘러보며 시노자키 선생의 안내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평화대회에 참석하는 평화단체들이 중간에 사세보에 들려서 배를 빌려 그에게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육지에서 바라보는데 많은 한계를 느꼈던 대목들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평화단체팀들을 위한 일반적 소개이기에 나는 몇 가지 가장 궁금했던 장소들에 대해 집중했다. 탄약고와 원자력잠수함 부두였다.

나중에 시노자키 선생과 자세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시노자키 선생이 택하고 있는 연구방법과 나의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는 현장파였다. 함정이 들어오면 그날 미군들이 쏟아져 나와 술을 먹는 술집으로 가서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며 파고 들어가는 식이었다.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역정보나 오류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것이 단점이다.

나는 미군들의 야전교범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탄약고에 대한 토론에서 그의 방법과 나의 방법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방법에 의한 관찰을 소개하자 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추가해 주었다. 역시 정보의 가치를 잘 아는 분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오래전에 듣던 터였었고 그는 나를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진해 핵잠수함가 판문점경비대의 화학무기표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 깊이 합의를 이룬 사항은 1차자료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1차자료를 연구하는 관점과 방법에 대한 서로의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피스 사이클이란 것이 있다. 일본에서는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각 지역마다 노동조합 등이 주체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평화순례를 한다. 특히 8월은 그 행동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다. 사세보주민들이 피스 사이클팀을 환영하는 교류회에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엔사해체문제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도 선배의 구수한 입담과 함께 새로운 사실은 어디든 그랬지만 사세보 주민들 또한 모두 놀라워했다. 10월에 다시 걷기 명상이 시작된다는 홍보와 함께 지지를 호소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