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전력지원 요구 제네바 합의문에 근거

2000-12-19     연합뉴스
북한이 제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50만㎾(시설용량)의 전력지원을 요구하자 남측 내 일부에서는 북한의 `끝없는 요구`에 진저리가 난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핑게없는 무덤없다`는 말처럼 북측이 전력지원을 요구하는 데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사정과 근거가 있다. 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극심한 전력난은 미국, 한국 등이 참여하고 있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데 상당 부분 원인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전력 손실분을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 북측 입장이다.

경수로 완공 예정시점인 2003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북측이 미리부터 예상손실분을 보상하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이에 대한 북측 설명 또한 일리가 있다. 모두 200만㎾의 발전능력을 가진 경수로 2기가 2003년까지 완공될 것으로 보고 자체적인 전력수급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기한 내 완공은 불가능`이 명확해진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에 따른 대책 마련, 즉 전력 손실분에 대한 보상이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전력손실 보상문제에 대한 논의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남.북한, 미국 3자간에 꾸준히 진행돼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경수로 1기의 화력발전소 대체 논의, 최근 남측 국회에서도 제기됐던 `대북 전력지원 계획` 논란 등은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남측이나 미측 내부에도 어느 정도 형성돼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들이다.

특히 지난 3월 7일부터 15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 준비회담에서 북한은 북미 고위급회담의 선결조건으로 전력손실 보상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국 내 한반도문제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 의회 조사국 래리 닉시 박사는 의미있는 `증언`을 했었다.

닉시 박사는 지난 4월 7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회견에서 `북한은 최근(3월) 뉴욕회담에서 전력손실 보상문제를 하나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웠다`며 `다시말해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조만간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리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닉시 박사는 `북한은 이 문제와 관련해 제네바 기본합의문 부속협정을 체결하자고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면서 `왜냐하면 합의문은 2003년 경수로 완공 목표 시점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그렇지 못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전력손실분에 대한 보상문제는 전혀 언급하고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닉시 박사의 인터뷰 가운데는 이번의 전력지원 요구와 관련해 눈여겨 볼 대목도 있다.

그는 전력손실을 보상하는 경우 경수로 공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이 재정 지원을 부담하게 되느냐는 RFA 기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전력손실 보상안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며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면서 `이들 관련국이 받아들일지 여부는 부분적으로 북측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미측이 보상할 것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전력손실 보상문제가 선결조건이라던 북미 고위급 회담은 지난 10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방미,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 등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지난 10월 12일 발표된 `조미 공동코뮈니케`는 `(양측은) 기본합의문에 따르는 자기들의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기 위한 공약과 노력을 배가할 것을 확약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조선반도의 비핵평화와 안전을 이룩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굳게 확언하였다`고 밝힌 데 이어 `이를 위하여 쌍방은 기본합의문에 따르는 의무 이행을 더욱 명백히 할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 하였다`고 지난 94년 10월에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문의 이행을 강조했다.

제네바 기본합의문 이행 가운데 가장 큰 현안이 되고 있는 전력손실 보상문제에 어떤 식으로 합의를 봤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북측은 제4차 장관급 회담을 2주 가량 앞둔 지난달 26일 갑작스레 경수로 건설지연 문제를 또다시 거론했다. 당시 노동신문 논평은 △제네바 기본합의문이 채택된 후 6년이 지났지만 경수로 완공이 요원하고 △미국이 고의로 건설을 지연시키고 있으며 △미국의 대북(對北) 압살정책이 변함없는 것은 물론 △건설 지연으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초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지금까지 북측으로부터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이고 중유 공급이 지연된다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계기도 없는 때에 나왔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북측은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우선 남측에 대해 `전력손실 보상`을 강력히 요구했다. 남측이 주책임자가 아니므로 `전력협력`이라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했지만 한꺼풀 벗기고 보면 지금까지 미국 등에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전력손실분 보상요구`나 마찬가지이다.

북측의 표적은 어디까지나 미국이다. 새로 들어설 미국의 공화당 행정부에게 제네바 기본합의문을 철저히 이행할 것을 거듭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제네바 기본합의문에 대한 북미간 약속 이행의 정도를 놓고 저울질할 때 `미측이 못하다`는 자신감도 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에 건설중인 경수로 공사는 9월말 현재 부지정지 공사의 80%를 완료했다.

KEDO는 지난 2월 주계약이 발효돼 본공사에 들어감에 따라 경수로 주기기 및 관련 기기의 설계.제작에도 착수했으나 빨라야 2007년께 첫번째 경수로가 완공될 전망이다. (연합 200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