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면 풍년기원제에서 느낀 공동체의 힘과 농업의 의미
[연재] Peace At Jeju(27) '2026년 안덕면 풍년기원제와 농민회 출범식'
다시 돌아온 조국, 그것도 37년 전에 와 봤던 제주에 다시 자리를 잡고서 이런저런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중 제주에서 제일 먼저 가입한 곳이 안덕면 여성농민회이다.
안덕면 여성 농민회에는 토종작물연구회와 풍물놀이패가 있다. 그동안 인원도 부족하고, 농사철이라 바빠서 매달 하던 연습도 당분간 중단되었다고 했는데 올해 '풍년기원제'에 맞추어 다시 연습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동안 해외에서 살면서 우리 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풍물놀이에 참여하기로 했다. 마침 서귀포시 여농 회장님이 여분으로 갖고 있는 장구도 빌려주시고, 직접 찾아와 기본 가락 개인 강습도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나처럼 해외에서 살다가 돌아온 대정에 사는 청년도 우리 고유의 문화와 악기에 관심이 많아서 함께하자고 청했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장구를 처음 접해 보는 우리 둘은 마주 앉아 장구를 두드리며 휘모리, 굿거리, 자진모리하며 신나게 놀아봤다.
지난 3월 7일 안덕 생활체육회관에서 열린 '2026년 안덕면 풍년기원제'는 '안덕면 농민회 21기 출범식'도 겸하여 열렸다. 기원제 전날 밤엔 서광서리 체육관에 모여서 함께 행사 예행 연습을 하고, 당일 아침 일찍 모여서 행사에 오는 분들을 맞았다.
검은 바탕에 붉고 푸른 띠가 어우러진 풍물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당에 모였다. 장구와 북을 어깨에 메고, 꽹과리를 손에 든 이들이 서로 눈빛을 맞추며 장단을 시작한다.
덩덕쿵, 짝짜궁~울림이 퍼져 나가자 주차장에 세워 둔 차들마저 진동하는 듯하다. 꽹과리를 든 고점례 상쇠의 박자에 징과 북, 장구가 어울렸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이들의 울림은 파도처럼 농민회를 깨웠다.
조용한 회관 마당에서 울려퍼지는 풍물패의 소리가 행사 준비로 바쁜 농민회 분들께서도 박수로 우리를 맞아 주고, 풍물 소리가 강당과 주차장에서 울리니 손님을 맞는 분위기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런 풍물놀이는 농민들의 삶과 희망을 담는 기원의 첫 소리가 되었다. 처음으로 입어 보는 색색의 허리띠를 두르고 풍물옷을 입어 보니 생초보인 나도 마음이 설렌다.
우리 풍물패가 먼저 행사장에 입장하여 행사의 흥을 돋우고, 하늘색 제례복을 차려 입은 송이철 사무국장의 사회로 오늘 행사에 참석한 내외빈에 대한 인사와 함께 이번 행사를 위해서 찾아온 청송군 농민회분들을 환영하는 인사로 첫 순서가 시작됐다.
안덕면 풍년기원제는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풍습이다. 농업의 어려움 속에서도 농민들이 함께 모여 희망을 나누고 전통을 이어가는 자리인데, 농민회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지켜내고 농민이 농업의 주체가 되는 구조를 회복하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1부에서는 제21기 안덕면 농민회장의 이임식이 진행됐다. 지난 두 해동안 지역 농민회를 위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랐을 활동을 해오신 이종훈 전임회장으로부터 올해부터 내년까지 농민회를 이끌 신임 김성일 회장에게 안덕면 농민회 휘장이 전달되었다.
먼저 조영제 제주도 농민회장은 "심각한 기후위기와 농자재 가격 상승에 비해 농산물 가격은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정은 현장의 목소리를 받아내지 못하고, 농협도 농민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주도 농민회는 물론이고 안덕면 농민회가 함께 농민의 버팀목이 되고, 삶의 최전선에서 전농의 투쟁에 앞장서 나갑시다"라고 격려했다.
청송군 농민회장님은 외국엔 없지만 우리만 가지고 있는 정(情)으로 함께 활동하며 연대하자고 인삿말을 전했다. 이어서 여성농민회 추미숙 회장이 우리 여성농민회 회원들을 대변하는 인사를 했다. "식량주권을 지키고 자식들에게도 이어줄 수 있는 농민이 되자, 농산물 생산을 위한 필수 농자재 구입 지원이 하루 속히 제정될 수 있도록 끝까지 연대하겠다"라고 말했다.
안덕농민회 조응천 부회장은 출범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먼저, 농업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 그리고 병·해충의 확산을 일으키는 기후재난을 걱정했다. 이어 높은 무역장벽과 개방농정, 수입농작물 증가, 낮은 농산물 물가 정책 등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농업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덕농민회는 안전한 먹거리와 농민으로서 삶의 터전와 후세들을 지키기 위해 지역사회의 본보기가 될 것, 회원강화, 전국농민회와 단결하여 농업을 지키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전통음악이 울려 퍼지는 중에 2부 풍년기원제가 시작되었다. 올 한해 농사지은, 제주를 대표하는 갖가지 귤과 무, 배추, 메밀, 보리, 콩 등이 제사상에 진열된 것이 아주 풍성해 보였다.
제례를 진행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사회자를 따라 절을 드리고 술을 올리며 올 한 해의 무사 안녕 풍년제를 올렸다.
풍년제를 올리며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기후 재난으로 안정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천지신명님께 '농자천하지대본'이니 하늘의 기운을 모아 농민에게 희망을, 이 땅에 정의를 내려주소서.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에게 힘을 주시고, 농업의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며 기원했다.
농민회를 대표하는 분들의 제례가 끝나고 여러 사람들이 차례대로 한해 농사가 잘 되고 안정된 생활을 바라면서 술을 따르고 절을 올리며 개인들의 소망도 빌며 기원제를 마쳤다.
이어서 농민회에서 준비한 잔치국수와 푸짐한 음식으로 뒤풀이를 하고 나오는데 현관에서는 윷놀이판이 벌어졌다. 가족끼리 하던 윷과 윷판이 낯설지만 흥미로웠다.
물어보니 이것이 전통 윷놀이라고 한다. 기존의 윷은 손 한뼘 크기의 나무 막대기인데, 여긴 손가락보다 작은 나무 조각을 작은 종지에 담아 흔들어 땅에 뿌린다. 윷판도 네모난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윷길이 흩어진 것이어서 조금은 생소했다.
저 윷길은 어떻게 가는지 알고 싶었지만 일행들이 있어서 끝까지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내년엔 이들과도 윷판에서 놀아봐야겠다. 농민회가 올리는 풍년을 기원하는 자리에서 느낀 농사의 무게와 그들의 애로가 집에서 작은 텃밭을 키우는 내 일상에도 그대로 스며든다.
그들이 투쟁으로 지켜온 농민의 삶의 혜택은 도시는 물론이고 모두에게 가닿는다. 농민이 농사에서 만족할 수 있는 농정이야말로 국민 모두의 먹거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임을 실감하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 안덕면 여성농민회 회원, AOK 회원
세계인들의 버킷 리스트 여행지로 꼽히는 제주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시댁에 인사하러 왔던 내도동에서 새색시라고 난 노란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고 놀았던 기억이 있는 남편의 고향이다.
미국에서 37년 만에 이곳으로 역이민하여 이젠 제주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꿔본다.
문의 : PeaceAtCab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