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 돌아가신 대만 잠수사를 추모하며
[연재] Peace At Jeju(23)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 - 문영임
‘가깝고도 먼 나라’ 하면 누구나 금방 생각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과 일본이다. 두 나라는 한국 사회와 정치에 적지 않은 그 영향력을 가지고 지난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뗄 수없는 관계를 갖는 나라다.
‘과거를 잃어버리면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일본에서 있었던 조선인들의 역사는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인 것은 과거의 진실이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거나 일본 정부의 외면과 왜곡으로 그 피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증언을 번역하고 분석하는 모임이 5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 증언 자료는 그룹 호센카(鳳仙花)의 니시자키 마사오 이사가 수년간 수집·정리한 자료들이다. 공적기관 사료, 경찰 기록물, 신문기사, 일기, 그리고 학살의 정동을 담아낸 문학 작품까지 포함된 1,100여 건의 증언은 그 양상과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이 번역·분석 모임은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이 5년에 걸쳐 이어온 학습 모임이며 김종수 관장이 이끌고 있다. 참가자들은 일본에서 윤동주 시인 연구를 이어오고 있는 유시경 신부, 일본 식민지 역사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해 온 쿠와노 선생, 한국 역사와 문화를 시민들에게 가르쳐 온 진대철 교수, 1920년대 일본어 표현 중 번역이 어려운 단어를 해석해 주는 80대 후반 재일동포, 그리고 간토학살 기억 계승 활동을 이어가는 다양한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간토학살 국가 책임을 묻는 국회의원 질의에 대해 “자료가 없다”는 입장을 참사 초기부터 반세기 넘게 반복해 왔다. 일본 사회 일부에서는 당시 유언비어를 사실처럼 보도한 신문 기사를 지금도 사실로 믿고 있다. 또한 도쿄도지사는 간토대진재 추도식 추도문 송부 중단 이유를 역사 해석 문제로 돌리고 있다.
이 수요모임을 이끄는 김종수 관장님은 처음에는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들의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일본 시민들과 연대하겠다는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참여를 거듭하면서 일본 시민사회가 과거사를 기억하고 책임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월 첫 주 번역모임에서 일본어 원본을 읽어주시는 쿠와노 야스오 선생이 조세이 탄광(장생탄광) 유골발굴 현장에서 주차 관리 봉사를 하게 되셨다고 하셨을 때에 우리는 연로하신데도 현장에서 수고할 쿠와노 상에게 힘내시라고 응원하며 모임을 마쳤다.
하지만 한 주도 지나지 않아서 조세이탄광 유골발굴조사 도중 자원 봉사로 참여했던 대만 잠수사 웨이 수 님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마음이 여리신 쿠와노 상이 현장에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가장을 잃은 유가족분들, 좋은 일한다고 떠난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게 될 잠수사의 부모님들, 무엇보다 수 년동안 억울한 희생을 추모하며 그 유골이라도 찾아 고국에 돌려보내자고 일해온신 ‘장생탄광 수몰사건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새기는 모임)’에 계신 분들의 상실감과 절망은 쉽게 표현하기 어렵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은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석탄의 증산이 급선무였고 부족한 전시 노동력을 대처하기 위해 조선의 청년들을 강제 동원했다. 야마구치현은 조선인 노동자가 비교적 많은 탄광지역이였고, 그 중 조세이 탄광은 ‘조선탄광’이라고 불릴만큼 조선인노동자 많았다.
1942년 2월 3일 해안 갱도에서 1킬로미터 정도 들어간 곳에서 갱도가 수몰되었다. 사고 직후 헌병대에 의해 갱도 입구가 봉쇄됐고, 갱도 안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136명을 포함하여 183명이 바닷속에 그대로 매몰당했다. 더하여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는 정보 통제를 했다. <마이니치> 지역신문에서는 “배수작업 등 응급조치를 취하여 갱내 작업자 대부분 구조해”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해당 사고를 은폐, 축소한 증거가 남아있다.
조세이 탄광 사건은 야마구치 지역 향토사 연구자 타케노부 씨가 기억 운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지역 사회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희생자 명부가 발견되었고, 40여 년 만에 한국 유족들에게 사망 사실이 전달되었다.
이후 2024년 9월 25일 그동안 패쇄, 매몰되어던 조세이 탄광의 갱도 입구가 발견되었고, 2025년 4월 1일 한일 양국의 잠수사가 함께 유골수습을 위한 조사작업을 시작했다. 수몰사고 이후 83년 만에 6월에 이어 8월에 희생자의 인골로 추정되는 뼈와 두개골이 발견되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조세이탄광 추모제와 함께 실시된 유골 수습 활동은 지난 2월 7일 잠수조사에 참여했던 대만 잠수사 웨이 수 씨가 수심 32m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잠수 경력 30년이 넘는 베테랑 잠수사였던 웨이 수 씨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불명확하지만, 그와 함께 이번 수중 조사를 이끌던 일본인 잠수사 이사지 요키타나씨는 “웨이. 수씨는 베테랑 잠수사로 자원으로 잠수조사에 참여했다. 이번 사고는 시민단체의 책임도, 한국과 일본 정부의 책임도 아니다”라며 당사자의 존엄을 모욕하는 일이 없기를 강조했다.
또한 ‘새기는 모임’에서는 “소중한 생명이 돌아가신 것에 큰 책임을 느낀다. 하지만 유골 수습은 계속될 것이며, 앞으로 어떤 형태로 진행될지는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라면서 “지금은 고인의 유가족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밝혔다.
당일 현장에 계셨던 쿠와노 선생님과 진대철 박사님은 수요일 모임에서 현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유해 수습 도중 잠수사의 사망사고로 ‘새기는 모임’에서는 당일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고인의 유가족을 일본으로 모셨다고 한다 . 또한 모든 언론 인터뷰를 중단하고, 잠수사의 사망원인을 정확히 밝혀 또다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철저한 조사로 사고를 규명하겠다고 발표했다고 전해주었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한 조사에 무책임하게 방임하는 동안 많은 희생자들의 유가족들도 많이 돌아가시고 남아 계신 유가족도 많지 않아서 발굴된 유골을 한국에서 인수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앞으로의 해결할 논의가 많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간토 대학살은 물론이고 이번 조세이 탄광 수몰사건, 강제징용 피해, 강제징용노동자와 그 가족 약 7,000여 명을 태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일본의 많은 지역의 탄광과 공장에서 죽어간 강제 노동자들에 대한 한일 과거사 문제는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올해 2026년 1월 이재명 한국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전략적 결속을 다지면서 양 정상은 조세이(長生)탄광에서의 희생자 DNA 공동감정에 합의했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 두 나라는 아무런 입장 발표를 하고 있지 않다.
일본 정부가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어 발굴 작업을 지원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으로 소극적인 상황에서, 희생자 유골 발굴과 국내 송환 문제에 한국 정부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는데 많은 시민들이 공감하고 있다. 특히 한일 시민간의 더욱 긴밀한 연대가 절실하고, 특별히 젊은 세대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김종수 관장님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