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남북 교류 협력의 빗장을 열자

[기고] 정익현 우리농사서로돕기협동조합 이사장

2025-12-31     정익현

정익현 / 우리농사서로돕기협동조합 이사장

 

새해는 힘차게 달려오는 붉은 말의 등에 올라 굳게 닫힌 남북 교류·협력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불신과 장벽을 넘어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숨결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단의 용기다.

'고려된장술' 1,200병과 '류경들쭉술' 2,300병이 9월부터 인천 세관 창고에 머문 채 끝내 한 해를 넘기게 되었다.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기 이전에 이 장면은 오늘의 남북 관계가 어디까지 후퇴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설탕은 '조선'(북)으로 들어갔지만, 술은 한국 세관에 묶여 해를 넘긴다. 그 자체가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초상이다.

대북 사업은 언제나 지뢰밭이었고 암초로 뒤덮인 바다를 항해하는 멀고 긴 여정이었다. 예측은 늘 빗나갔고 확신은 번번히 배반당했다. 참담한 순간들이었다.

국가 정책 앞에서 힘없는 민간이 감내해야 했던 건 십수 년 계속된 상처와 눈물뿐이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 자포자기의 문턱에서도 끝내 낙관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대북 사업가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를 주무르며 십수 년을 악다물고 버텼던 건 민간의 자주적 교류·협력이 우리 조합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파탄의 결정적 계기는 2018년 12월 26일 도라산역에서 열린 '철도 및 도로 연결·현대화' 착공식이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고 초라한 기념식으로 대체된 일로부터 시작됐다.

평양에서 시속 30km의 새벽 기차를 타고 내려온 그 벅찬 심장에는 역사적인 착공식의 첫삽조차 뜨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무겁게 새겨졌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 의존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자조 섞인 분노는 "미국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국을 두 번 다시는 처다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이후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의 정상이 합의한 약속은 효력을 잃고 사실상 폐기되었다. 남북 관계는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이전으로 회귀하였다.

민족적 합의문에 서명한 한국의 대통령이 권좌에 있으되 단 하나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을 지켜 본 조선(북)은 더 이상 한국 정부와 마주 앉아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국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그런 시기에도 우리는 북과 체결한 합의서와 계약서를 들고 통일부의 문을 두드렸다.

△북한 도서 한국 출판 △물물교환 방식의 작은 교역 △북한 영화 상업적 상영' △북한 영화음악 저작권 양도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민간교류의 길을 내고 싶었으나 통일부는 언제나 시간만 질질 끌다가 불허하였다.

△이산가족 생사 확인과 고향 방문 △수해 복구를 위한 인도적 지원 △보건의료협력 사업 제안도 번번히 좌절되었다.

"미국의 허가없이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선을 긋는 북한을 상대로 민간이 교류·협력의 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겠는가.

당면한 상황에서 우리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개 항 중 3개항의 원칙, 즉 1. 남북 상호 교류와 해외 동포의 남북 자유 왕래 추진 2.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 서신 왕래, 상봉에 대한 적극 지원 3. 남북 간 물자 거래를 '민족 내부 교역'으로 간주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을 국가정책으로 분명히 선언하고 준수한다면 남북 관계는 개선될 것으로 본다.

인천항에 들어와 통관을 기다리고 있는 북측 술 [사진-정익현]

오늘의 남북 관계는 꽁꽁 얼어붙어 있다.

'우리농사서로돕기협동조합'은 얼음같이 차가운 남북 사이에 '작은 교역'이라는 하나의 길을 열었다.

북의 술을 들여오고, 설탕을 실어 보낸 우리의 노력은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물과 불이 만나 술이 되듯, 얼어붙은 강물과 갈라진 마음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룬 소중한 성과라고 자부한다.

물물교환 방식의 작은 교역은 2020년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남과 북이 공식 승인한 최초의 남북 사업이다. 불신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남북관계를 바란다는 우리 정부의 공개선언이기도 하다.

단순히 술 몇병을 반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끊어진 민족의 마음을 이어갈 수 있는 각별한 뜻도 있다.

술이란 물과 불을 합한 것이다. 술은 물의 찬 기운을 주어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처럼 꺼져가던 의지에 불씨를 지핀다.

그런 점에서 '북한물품반입승인'을 한 통일부의 결단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아울러 새해에는 평화의 술 향기가 금수강산에 퍼지고, 남과 북이 화합의 잔을 높이 드는 축복의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관에 멈춰 선 조선술의 통관을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