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와 [청주한씨족보]에 관하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41)
백민 이양재 (Korean genealogy for U.W.H.L. - Academic Chairman)
청주한씨는 스스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자부한다. 그렇다. 청주한씨는 우리나라의 명문 중의 명문이다. 청주(淸州)는 본래 마한이었고, 백제시대에는 상당현(上黨縣)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청주한씨문중 일각에서는 상당한씨(上黨韓氏)라고도 했다.
685년(신라 문무왕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므로 역시 한때 청주한씨 일각에서는 서원한씨(西原韓氏)라고 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23) 청주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2) 청주목(淸州牧)이 되었다. 이로써 청주한씨가 청주라는 본관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청주한씨는 현대의 사학과 보학의 관점에서 보면 상계대에서 한 모순을 드러낸다. 청주한씨가 간행한 족보는 매우 중요한 족보이지만, 청주한씨문중의 족보는 - 상계대가 역사적 사실과의 불일치하여 - 후대에 씨족의 시원과 상계대를 윤색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흔히 지적한다.
1. 기자에 관한 역사학계의 관점
청주한씨는 기자(箕子)를 원 시조라 주장한다. 기자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헌은 ➀『상서대전(尙書大典)』 「은전(殷傳)」이고, 다음으로는 ➁『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가 있다. 두 사료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종합한다면 기자가 상나라 멸망 후에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주(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는 주장이다. 이후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이르러서는 기자가 팔조금법(八條法禁)을 만들어 조선을 교화하였다고 기자동래설을 과대 포장하였고, 이후 중국에서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동래설이 굳어졌다.
그러나 기자(箕子)에 관한 관점은 많은 사학자들의 지적을 받았다. 제1기 민족사학자들은 대체로 기자는 동래한 적이 없으며, 기자조선은 기자가 건국한 것이 아닌 후기 고조선으로 보았다. 단재 신채호를 위시한 대부분의 민족사학자는 기자동래설을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생각 없이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판단하여 각기 다른 관점에서 부인했다. 우선 기자동래설은 중국 한나라 이전의 문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제1기 민족사학자들은 주목하여 기자동래설을 부정한다.1)
반면에 제2기의 민족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기자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 맞지만, 기자는 중국인이 아니며 한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2) 즉, 기자동래설은 철저히 부정된 것이다.
“- 천관우는 중국 산서성 태곡현 일대에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기국(箕國)이 존재하였고, 주나라의 압박을 받아 동방으로 이동하였으며, 동진(東進)을 계속하여 대동강 유역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 이상시는 기존의 사서를 따르지만, 동래한 기자는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이라고 주장하였다. 천관우의 주장과 거의 같다.
- 이병도는 고조선에 기원한 한후(韓候)가 요서로부터 아사달로 이동, 지배 세력이 되었다는 ‘한씨조선설’을 주장하였다. 이병도의 이 주장은 다분히 청주한씨를 의식한 주장으로 판단된다.
- 이형구는 기자동래설에 대하여 일부분 긍정한다. 중국 하북성 동부 및 요녕성 서부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에는 기(箕)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많이 발견되는데, 고고학적으로 이들을 기자와 관련된 종족으로 보이며, 이들이 점차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고조선의 지배계층을 대체하거나 합쳐졌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기자가 한족(漢族)이 아닌 동이족이라는 주장은 상나라의 기자와 동이족의 기자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근래 중국 사학계가 고증한 상나라의 멸망 연대(BC 1046년)를 참고해 보면 두 기자는 각기 다른 시차를 두고 생존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더군다나 과거의 제1기 민족사학자들이 기자의 동래와 기자조선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민족사를 혈통 중심의 투쟁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자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성씨가 있다. “행주기씨(幸州奇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청주한씨(淸州韓氏) 등이다. 그리고 기자동래시(箕子東來時)에 “기자를 따라왔다고 주장하는 태인경씨(泰仁景氏)와 해주경씨(海州景氏) 토산궁씨(兔山弓氏) 봉화금씨(奉化琴氏) 함평노씨(咸平魯氏)와 함풍노씨(咸豐魯氏) 등등”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학(譜學)에서도 이들 성씨의 주장은 대체로 허구로 본다. 이들 가문의 족보는 청주한씨가 1617년에 초간보를 만든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18~19C에 초간보를 발행하였다.”
“어떻든 현재는 민족사관이든 일반사학이든, 기자와 기자조선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관점은 사대성(事大性)을 벗어나 있다. 기자에 대한 옛 주장은 기자의 성은 자(子)이며, 이름은 서여(胥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량적인 관점은 기자는 ‘한(韓)’씨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기원후 4~5세기이다. 기자 시대에 성씨란 없었다.
2. 한씨(韓氏)
우리나라의 한(韓)씨는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73,404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1위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단주(湍州), 평산(平山), 한양(漢陽), 안변(安邊), 양주(楊州), 곡산(谷山), 홍산(鴻山), 대흥(大興), 부안(扶安), 개성(開城), 함흥(咸興), 금산(錦山), 보성(寶城) 등이 있는데, 곡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기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청주한씨에 연원을 두고 있다. 곡산한씨(谷山韓氏)는 중국의 외래성으로 시조 한예(韓銳)는 1206년 송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라 한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청주한씨는 752,689명이며, 곡산한씨는 6,266명이다. 청주한씨계 여러 문중과 곡산한씨의 고려와 조선의 과거급제자 통계는 [표1]과 같다.
[표1] 한씨문중의 고려-조선 과거급제자 통계
|
본관 |
고려문과 |
고려사마 |
무과 |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 |
합계 |
|
|
조선문과 |
진사 |
생원 |
|||||||
|
청주한씨 |
13 |
2 |
518 |
89 |
24 |
27 |
46 |
15 |
|
|
292 |
429 |
451 |
1,876 |
||||||
|
평산한씨 |
5 |
1 |
5 |
0 |
0 |
0 |
1 |
1 |
|
|
7 |
7 |
||||||||
|
25 |
|||||||||
|
양주한씨 |
2 |
1 |
5 |
0 |
0 |
0 |
0 |
1 |
|
|
0 |
2 |
||||||||
|
9 |
|||||||||
|
부안한씨 |
2 |
0 |
3 |
0 |
0 |
0 |
0 |
0 |
5 |
|
면천한씨 |
0 |
3 |
4 |
12 |
0 |
0 |
0 |
0 |
19 |
|
한양한씨 |
0 |
2 |
1 |
0 |
0 |
0 |
0 |
2 |
|
|
7 |
|||||||||
|
3 |
3 |
||||||||
|
광주한씨 |
0 |
0 |
0 |
2 |
0 |
1 |
0 |
0 |
3 |
|
금산한씨 |
0 |
0 |
0 |
1 |
0 |
0 |
0 |
0 |
1 |
|
개성한씨 |
0 |
0 |
0 |
1 |
0 |
0 |
0 |
0 |
1 |
|
합계 |
13 |
6 |
545 |
89 |
25 |
27 |
47 |
19 |
|
|
301 |
442 |
470 |
1,946 |
||||||
|
곡산한씨 |
4 |
10 |
8 |
1 |
0 |
0 |
0 |
0 |
23 |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는 한란(韓蘭)이다. 그는 고려의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며, 벼슬은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고 한다. 청주한씨와 분적해 나간 여러 문중을 포함한 조선시대 문과급제는 301장, 진사 442장, 생원 470장, 무과 545장, 역과 89장. 의과 24장, 음양과 27장, 율과 47장 등 모두 1,946장의 급제자를 내었다. 이렇게 문무잡과 전체에 걸쳐 골고루 입격자를 낸 것은 상당히 의미 깊은 일이다. 또한 청주한씨와 분적해 나간 문중의 고려시대의 과괄은 문과 13장, 사마 6장이다. 청주한씨만의 고려 과괄은 [표2]와 같이 15장이다.
[표2] 청주한씨 고려시대 급제자
|
번호 |
성명 |
생졸년 |
급제 년도 |
부 |
조 |
증조 |
비고 |
|
문1 |
韓文裕 |
|
仁宗 |
韓惟忠 |
韓元卿 |
韓億 |
|
|
문2 |
韓光胤 |
|
강종 |
韓希愈 |
韓奕 |
韓尙休 |
|
|
사마1 |
韓璟 |
1228~1303 |
1243년, |
韓光胤 |
韓希愈 |
韓奕 |
改名 韓康 |
|
문3 |
韓康 |
1228~1303 |
高宗 |
韓光胤 |
韓希愈 |
韓奕 |
|
|
문4 |
韓謝奇 |
|
1279년, |
韓康 |
韓光胤 |
韓希愈 |
|
|
문5 |
韓守延 |
|
1290년, |
韓康 |
韓光胤 |
韓希愈 |
異名 韓謝壽, |
|
문6 |
韓謝謙 |
|
忠烈王 |
韓康 |
韓光胤 |
韓希愈 |
兄 韓謝奇 |
|
문7 |
韓譜 |
|
忠烈王 |
韓康 |
韓光胤 |
韓希愈 |
兄 韓謝奇 |
|
문8 |
韓脩 |
1333~1384 |
1347년, |
韓公義 |
韓渥 |
韓謝奇 |
|
|
사마2 |
韓達漢 |
|
1353년, |
韓渥 |
韓謝奇 |
韓康 |
|
|
문9 |
韓方信 |
?~1376 |
1355년, |
韓渥 |
韓謝奇 |
韓康 |
異名 韓達漢 |
|
문10 |
韓理 |
?~1417 |
1362년, |
韓公義 |
韓渥 |
韓謝奇 |
兄 韓脩 |
|
문11 |
韓尙質 |
?~1400 |
1380년, |
韓脩 |
韓公義 |
韓渥 |
弟 韓尙敬 |
|
문12 |
韓尙敬 |
1360~1423 |
1382년, |
韓脩 |
韓公義 |
韓渥 |
兄 韓尙質 |
|
문13 |
韓尙德 |
?~1434 |
1385년, |
韓脩 |
韓公義 |
韓渥 |
兄 韓尙質 |
3. 청주한씨 상계대 탐색
[표2]는 한문유(韓文裕)를 제외하고는 [표3]의 계보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청주한씨 시조 한란의 6세손 한광윤에서부터 12세까지의 - (7대에 걸쳐 문과 13장과 사마 2장의 급제를 내고 있는데) - 그 급제자들이 7대의 계대를 이루고 있다. 보통 고조부까지의 직계 내외(內外) 5세조를 기록한 것이 팔고조도인데, 이 정도면 일반적으로도 구전으로 충분히 전할 수 있는 계대이다. 청주한씨는 6세 한광윤으로부터 7세 한강(韓康, ?~1303)에 이르는 시기에 족도나 가승을 작성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청주한씨들은 자신들의 “시조 한란(韓蘭)은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이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5)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당시 가뭄으로 왕건의 군사와 군마 등이 모두 지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자신의 군사와 군마 그리고 10만 대군이 먹을 수 있는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한란은 고려의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관하여 필자는 2022년 5월에 쓴 주2)의 글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한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한란에 대한 청주한씨 문중의 주장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상(上) 충청도(忠淸道) 청주(淸州) 고적(古蹟) 조에 “方井里在州南十里高麗韓蘭所居也有一大井其源淵深大旱不縮麗祖征萱時師出里前蘭伏劍出迎仍汲此井以餉十萬師井水不渴仍號方井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여지도서』는 1757년부터 1765년 사이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1973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모아서 영인한 책이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편찬한 공식적인 지리지(地理志)라고 할 수는 없고, 각 지역 토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반영한 향토사 자료 수준의 책이다.”
그런데, 일부 보학자들은 청주한씨 시조 한란으로부터 3세 한상휴까지의 계대를 문제 삼는 경우가 있다. 7세 한경(韓璟) 즉 한강(韓康, 1228~1303)이 1228년에 태어났으므로 한세대를 25~30년으로 잡으면, 시조 한란의 출생 시기로부터 7세 한경까지의 출생 시기가 보편적으로 180년으로 계산된다. 즉 한란은 104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시조 한란이 태조 왕건의 군량미를 대었다는 주장은 허공에 뜨게 된다. 오히려 청주한씨의 상계대에서는 한란보다는 한강이 중요한 인물로 보인다. 실제로 한강은 청주한씨를 부흥시키는 시작점이 된다.
한씨문중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한란이 853년에 태어나 916에 사망한 인물인지, 아니면 853년으로부터 거의 200여년이 되는 104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출생한 인물인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한란이 853년에 태어났다면 7세손 한강(韓康)은 한란보다 375년 후에 태어난 것이 된다. 한란의 7세가 375년 후의 인물이라면 한세대가 62년이 넘는다는 말이 되니 성립하기가 어렵다.
시조 한란이 실존 안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시조와 2세 또는 3세 사이에 상당수의 계대가 실전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계도가 구전으로 전하고, 기록으로 보편적으로 남기 시작한 연대를 13세기 중반으로 본다면, 그 연대에는 한강이 고려 사마시에 입격한 이후, 문과시에 급제하던 시기였다.
한강(韓康)이 자신의 한 아들에게 보(譜, 韓譜)라 이름을 지어 준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보(譜)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족보 형성에 중국 북송 시대의 유명한 문장가인 소순(蘇洵, 1009~1066)과 그의 아들 소식(蘇軾, 1036~1101), 소철(蘇轍, 1039~1112) 삼부자가 편찬한 족보 소보(蘇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것을 보면 고려에 보(譜)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보는 충렬왕 재위기간(1274~1308)에 문과 급제한다.
13세기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증수되어 내려오던 속도는 세 보로 편성되고, 그러한 필사본이 모여 1617년에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초간 정사보가 간행된다. 정사보는 목판본 1책(68장)으로 청주 보살사(菩薩寺)에서 간행하였다. [청주한씨세보] 초간보가 1617년에 나왔어도, 그 시기에 없던 계대를 만든 것이 아니다. ‘[표3] 청주한씨 고려 급제자 계도’에서 필자가 상계대를 맞추어 제시한 바와 같이, 이 상계대는 초간 정사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초간 정사보 천장(天張) 앞면 첫 칸에 ‘시조한란(始祖韓蘭)’이라 적고 있고, 세대를 표시하지 않고 자(子)라고만 쓰고 있다. 보통 자(子)라면 아들을 의미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후손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간 정사보에는 세대수를 표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손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1617년 [청주한씨세보] 초간보는 한 가지 면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족보이다. 그 한 가지 점이란 청주한씨가 기자의 자손이라고 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주2)에서 밝힌 필자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4. 청주한씨는 언제부터 기자의 후손으로 주장했나?
청주한씨는 1617년 초간 정사보에서부터 자신들이 기자의 후손이라 밝히고 있다. 이 점이 [청주한씨세보]의 문제점이다. 청주한씨가 기자의 자손이라 주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16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고려시대까지는 청주한씨의 연원이나 시조와 관련하여 ‘기자’가 등장하지 않는데, 『고려사』 열전에서는 오히려 ‘한강’을 중요한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선조조(宣祖朝)에 정곤수(鄭崑壽, 1538~1602)와 기자헌(奇自獻, 1562~1624) 등의 조정 대신들이 직·간접으로 청주한씨의 ‘기자후예설’ 형성과 유포에 개입한다.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시대에는 그리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선조는 조선 땅에 기자의 후예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윤근수를 위시한 여러 학자 또한 이 설에 의문을 품고 저마다의 논리로 반박하였다.
그런데 1607년(선조 40년)에 사대부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이 평양에서 한 유적을 발견하여 기자의 정전(井田)이라 주장하며. ‘이 땅에 기자가 왔다는 증거가 나타났다’라며 기뻐했고, 당시 조정과 사대부들도 모두 환호했다. 사대주의에 찌든 당시의 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조선이 중화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다고 믿었으니 매우 흥분되었을 것이다.
이듬해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이 즉위하자 기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기자를 제사 지내는 문제가 대두한 시대 상황은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성씨의 등장을 촉발했다. 특히 군역을 면제받을 기회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기자후예설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이후 간행되는 평양 지도와 풍경화에는 꼬박꼬박 기자 정전을 그려 넣었다. 한백겸의 저서 『동국지리지』는 60장 분량의 작은 책자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 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가 있는데, 기전도는 (후)조선의 왕 기자가 시행하였다는 정전 제도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즉 한백겸의 최대 실적은 허구의 실증을 조작한 것이다.
그리고 평양에서 기자의 정전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한백겸은 청주한씨였고, 1607년(선조40년) 청주목사시에 한백겸(韓百謙)은 시조 한란(韓蘭)을 위한 재당(齋堂)인 ‘반시당(頒始堂)’을 건립하고 지은 기문(記文)에서 한씨가 기자에서 출자(出子)했음을 강조했다. 17세기 초의 청주한씨는 자신의 뿌리를 ‘기자’에 연결해 자신들이 대성현의 피를 이어받은 우수한 가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자후예설’을 지속적으로 채택하였고,3) 기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는 가공된 주장을 하는 몇 성씨도 나타났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기자후손설로 군역 회피에 이용하는 사례가 발생하여 조선 왕조가 한때 제재(制裁)에 나서기도 하였다. 현대보학에서 볼 때 청주한씨를 비롯한 기자와 관련한 것으로 주장하는 거의 모든 씨족은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다. 이제는 역사학과 서지학, 그리고 문화인류학의 발전 앞에서 토성의 본디 모습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5. [청주한씨세보]에 관하여
청주한씨는 1617년 정사보를 초간보로 간행한 이래 1910년까지 열 번에 걸쳐 주요 세보를 발간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1617년 [청주한씨세보] 정사 초간보는 ‘청주한씨전대사적(淸州韓氏前代事蹟), 반시당기(返始堂記),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淸州韓氏始祖遺基叙事碑), 발문(跋文), 왕후세계(王后世系), 본문에 해당하는 보도(譜圖), 간기(刊記)’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주한씨전대사적’은 시조 한란(韓蘭) 이하 한강(韓康), 한사(韓謝), 한악(韓渥), 한방신(韓方信), 한수(韓脩), 한상질(韓尙質), 한명회(韓明澮), 한충(韓忠) 등등 현조(顯祖)들의 사적으로 [위지(魏志)], [고려사(高麗史)], [목은집(牧隱集)], [사가집(四佳集)] 등에서 자료를 발췌·수록한 것이다.
‘반시당기’는 1607년(선조40)에 청주목사로 있던 한백겸(韓百謙)이 시조 한난을 위해 재당(齋堂)을 건립하고 지은 기문이다. 기문에 따르면, 한백겸은 재당 건립 이전인 1605년(선조38)에 이미 시조의 제단과 기적비를 세운 바 있으며, 재당의 건립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위선(爲先) 사업이었다.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는 한백겸이 세운 기적비의 비문으로 찬자 한준겸(韓浚謙)은 한백겸의 동생이다. 발문은 모두 2종인데, 족보 간행을 주관한 한혁과 한효중이 1617년에 지은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한백겸은 1615년 사망하기까지 청주한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만드는 일을 주도한 인물이다.
[표4] 청주한씨문중에서 편찬한 주요 족보 (연도순)
|
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청주한씨세보 |
1617 |
韓孝仲-韓赫 찬 |
목판본 |
1책 |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한국족보박물관 |
|
2 |
재교첨수 청주한씨세보 |
1704 |
韓德亮 서 |
목판본 |
6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
3 |
삼교첨수 청주한씨세보 |
1748 |
韓元震 서 |
목판본 |
20권10책 |
필자(책2,3,5.영본), |
|
4 |
사교첨수청주한씨세보 |
1796 |
韓光棨 서 |
목판본 |
1책 |
국립중앙도서관 |
|
5 |
오교첨수 청주한씨세보 |
1827 |
韓用龜 서 |
목활자본 |
15권15책 |
필자(권지7,9. 2책 결), 계명대 동산도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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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육교첨수청주한씨세보 |
1865년 |
韓元植 서, 韓慶元 발 |
목활자본 |
7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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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청주한씨족보 |
1867 |
韓邁新 서, 韓應疇 말 |
목활자본 |
29권14책 |
계명대 동산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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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청주한씨족보(6교) |
1869년 |
韓奎錫 서, |
목활자본 |
4권3책 |
계명대 동산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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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칠교첨수청주한씨세보 |
1897년 |
韓中基 서, |
목활자본 |
6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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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청주한씨세보 |
1899년 |
韓應斗 서, |
목활자본 |
18권10책 |
국립중앙도서관, |
1617년 [청주한씨세보] 정사보, ‘청주한씨 전대사적’ 부분, 초간보. [사진 제공 – 이양재]
정사보 “발문에 따르면, 당시 청주한씨는 일부 보첩(譜牒)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각 지파의 파보(派譜)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공간(公刊)된 것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청주목사 한효중이 한혁에게 족보 간행을 요청하자 한혁은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제공한 초보(草譜)와 한효중이 작성해 둔 호서지역 자손들의 초보를 정밀하게 교감하는 한편 보단(譜單)을 두루 수렴하여 간행을 완료한 것이다. 물론 간행 논의는 청주에서 일어났지만 한효순의 주선하에 경향의 동종들이 여기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내용의 충실성을 기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간행 경비는 한효중이 대부분 부담하고 일부 호서지역 동종들이 여기에 보조하였으며, 간역의 실무는 한혁, 한담(韓潭), 한순립(韓純立), 한급(韓岌) 등 주로 청주지역 인사들이 담당하였다.” (인용; 김학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전] >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1607년에 청주한씨문중 지리학자 한백겸이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손이라 주장하여 1617년 정사년 초간보에 그 주장을 적어 넣는다. 이후 청주한씨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주장으로 군역을 피하는 등,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제왕의 후손으로 행세하여 왔다.
[표4]에 조사된 청주한씨의 세보 및 족보는 탐색하여야 할 점이 많다. 1748년 [삼교첨수 청주한씨세보} 무진보의 경우 최소 두 종류의 판이 현전한다. 같은 명칭의 판(版)이면서도 같은 면의 서체와 판각이 다른 판이 현전한다. 아래의 사진을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상당 부분이 교체되어 있다. (가)판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판으로 다시 판각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가)판은 초판이고 (나)판은 수정판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여러 권의 동일본을 비교하면서 의문을 풀어 나가야 한다.
6. 맺음말
20세기 초반에 민족사학자들에 의하여 기자동래설이 부정된 이래 해방 후에는 일반사학자들도 대체로 부정한다. 그러나 청주한씨문중에서 조선중기 이후에 남긴 주요한 족보들은 근대의 인물과 인적 관계 연구에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청주한씨세보]에서 모화 사대주의의 화독(華毒), 즉 중화 사대주의의 중독(中毒)을 제거한다면 선본(善本)이라 할 수 있다.
청주한씨의 상계 인물들을 보면 시조 한란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라는 정도의 평범한 것이고, 그의 실존 연대는 불분명하다. 청주한씨의 상계대의 핵심적 인물은 한강(韓康)과 그의 아들 한사기(韓謝奇)이고, 그로부터 5대는 정확한 실존 인물로 보인다. 한란으로부터 내려오던 5~6대는 실전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중기의 다른 성씨의 족보보다도 청주한씨의 초간보는 조선전기의 인물 등에 관하여 교차 연구하여야 할 필요성이 높다, 7세 한강으로부터 1617년 정사보까지의 계보는 일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청주한씨문중의 족보와 이 족보가 후손들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문중심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중심리학적 고찰은 국내보다는 해외의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하였으면 한다. 청주한씨의 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부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도 일부 있다.
주(註)
1) 이 중에 ➀『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尙書)』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한나라 이전의 원래의 『상서』 원전에는 기자동래설은 없다. 두 사료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종합한다면 “기자가 상나라 멸망 후에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주(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라는 중국 측의 주장이 만들어진다.
2) 필자,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 -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13)], 통일뉴스 2022.05.03.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915
3) 김병인, [청주한씨 '기자후예설' 재검토], 韓國史學報 제74호, 39!~73 (35page), 20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