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강압이 핵심수단인 경제·안보 패키지 협상...'길게 갈 수 밖에 없는 싸움'
[한미 공동설명자료 시민사회 검토②] 김양희 교수, "눈물 머금고 당분간 미국과 협력해야"
'관세협상 타결은 대한민국 외교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10.29. 정청래 민주당 대표 논평)이라거나 '외환시장 안정과 우리 기업 수출 경쟁력을 동시에 지킬 수 있게 됐다. 경제에 이어 안보까지 두 마리 토끼 잡았다'(10.30. 김병기 원내대표)는 자화자찬도 있지만, 이런 평가는 직접 미국과 협상을 진행한 대통령실, 핵심 참모들의 언급과도 한참 거리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공동 설명자료 발표 후 지난 16일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과 회동에서 "안타깝게도 국제 질서 변경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우리가 수동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협상이어서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다"는 현실 인식의 일단을 비쳤고,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7일 방송에 출연해 '미국이 보내온 관세협상 최초 협상안에 대해 '을사늑약 저리 가라할 정도였다'는 내부 평가가 있었다'는 후일담을 소개하면서 "그 정도의 표현이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정말 황당무계한 내용 일색이었다"는 불편함을 토로했다.
협상 책임자인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앞서 14일 공동 설명자료 브리핑에서 "여기(한미 관세협상) 내용중에 공정한 내용이 어디있다고 생각하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미국은 한 푼도 돈을 안내는데 수익 배분 5대 5로 돼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성과라면 성과이고, 방어를 아주 잘 해낸 것 같다"는 것이 이 대통령의 최종 평가이다.
"경제 살리고 안보 지켜낸 국익외교" 민주당이 거리에 내건 현수막은 그 내용에 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이번 한미 협상이 단순히 통상 현안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관세·투자·안보를 하나로 묶어서 진행한 경제·안보협상이라는 걸 잘 보여준다.
지난 21일 오전 경제안보연구소·참여연대가 주최한 '한미협상 팩트시트와 MOU 분석 및 쟁점' 토론회에서 김양희 대구대학교 경제금융통상학과 교수와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번 한미 협상을 '한미경제·안보협상'이라는 틀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14일 한미 공동설명자료와 함께 발표된 '제57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 대한 분석도 함께 이뤄졌다.
'한미 경제안보 협상, 팩트시트와 MOU 쟁점과 대응방향'을 주제로 발표한 김양희 교수는 "이번 협상은 단순한 통상협상이 아니라 경제안보 협상으로 이해한다. 둘을 합쳐서 봐야 제대로 된 성격 규정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고립주의'로 파악하는 트럼프발 대외정책을 '보호주의 진영화'(Blocification of Protectionism)로 읽고 이를 경제와 기술, 안보의 삼각연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분석틀을 제시했다.
전임 바이든 정부에서도 추진된 '보호주의 진영화'의 공통 목표는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중국 봉쇄'이지만, 바이든이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를 내세워 산업정책 기반의 보조금이라는 '당근'과 고관세라는 '채찍'을 병용한데 비해 트럼프는 미국시장에 접근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당근'이니 다른 건 필요없다는 태도로 '고관세'로 일관하는, 사실상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을 핵심수단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바이든이 공급망 안정화에 치중했다면 트럼프는 국내 제조업 복원에 집중하면서 '보호주의 진영화'도 "마음대로 거드릴 수 없는 중국, 러시아 정도는 놔두고 동맹과 우방을 가혹하게 괴롭히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나 트럼프 역시 동맹과 우방의 조력이 절실한 만큼 경제적 강압조치의 작동 논리가 불확실하고 끝모를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으로 보일 순 있지만 한국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이미 쇠퇴할만큼 쇠퇴했기 때문에 단독으로 중국을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바이든이 했던 것처럼 동맹과 우방을 필요로 하는데, 지금 한국과 EU, 일본을 불러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 '희토류'라는 무기를 휘두른 중국에 사실상 무릎을 꿇고 관세압박을 1년 유예한 미국으로서는 동맹국에게 '반중 연대 동참'을 약속받아 놓고 "미국의 말을 잘 듣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동맹과 우방을 전방위로 압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김 교수는 미국의 주요 동맹과 우방들이 대부분 자국산업을 강화하고 시장을 다각화하는 등의 노력을 병행하면서 미국과의 정면대결보다는 우회와 타협, 굴복을 선택한 것으로 보았다. 쇠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
현재 미국 관세의 영향은 일부 고관세 부과 소재나 가격에 전가된 내구 소비재 등에 집중되어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앞으로 서서히 미국내 소비자 물가 등에 반영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결국 단단한 파마산 치즈가 구멍이 뻥뻥 뚫린 에멘탈 치즈로 바뀌듯이 고관세 부과는 형해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예상했다. 미국의 천문학적 무역적자를 줄이려면 국내 저축과 투자를 늘려야 하는데, 관세수입이 늘어난다는 건 그대로 무역적자 확대로 연결되는 것이어서 정책 목표가 상충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관세로 인한 추가 비용 1조2천억 달러 중 3분의 2가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전망(S&P 글로벌)이 나오고 관세와 불법이민자 추방으로 인한 인프레이션 심화 등 미국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요인들이 많다.
그렇다고해서 미국이 안보를 명분으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International Emergency Economic Powers Act)에 기반한 국가별 관세와 상호관세, 그리고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한 품목관세 등 광범위한 관세부과 조치를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 입장에서 재정수입 세수 감소를 관세수입으로 보존하는 게 나쁘지 않고, 특히 상호관세는 무역과 산업 정책 뿐만 아니라 마약, 이민 등 비경제 현안을 해결하는 '경제책략'(Economic statecraft) 수단으로 마가(MAGA)지지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IEEPA 위헌 판결도 중대한 변수이긴 하지만 큰 기대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김 교수는 한미 협상은 "금방 끝나지 않는, 길게 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1라운드가 종료됐다. 최악은 피했다"고 평가했다. "'노딜이 베드딜보다 낫다. 차라리 버텨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이 정도에서 접는 게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또 미국은 한국보다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전제하에 "한국은 단기적으로 2라운드를 시작하고 중기적으로는 미국의 '보호주의 진영화' 를 한국의 경제안보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데 활용해야 한다"고, 즉 후일을 도모해야한다고 제안했다.
2라운드의 시작은 한미 MOU의 내용을 철저히 파악해 △국제법적 비구속력 유지 △상황변화에 따른 수정 가능성 보장 △국회의 견제와 감시 기능 보장을 기준으로 구체적 수용 방식 등을 정하자는 것. 불확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회가 견제와 감시를 하는 것은 철저히 보장하되 국회비준은 받지 않는게 좋다고 말했다.
또 IEEPA 위헌 판결에 대비해 관세 회수방안을 검토하고 품목관세 확대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한미FTA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개정판인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와 같은 내용과 수준으로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미 MOU에 따르면, 미국이 상호관세와 품목관세를 정할 때 15%와 최혜국대우(MFN, Most Favored Nation) 관세 및 한미 FTA 원산품 중 선택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어쨌든 한미FTA는 그대로 가져가는게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미국의 보호주의 진영화 정책을 잘 활용하자면 "항공, 우주, 제약, 방산과 같이 미국이 훨씬 우위에 있는 분야를 제외하고 반도체, 배터리, 조선, 복제의약품 등 한국이 없으면 안되는 제조업 분야를 기회요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면서, "중국이 한국보다 더 잘하는 분야가 있더라도 미국은 결코 중국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동맹 연루와 방기의 딜레마를 최소화하고 장기적으로 세계질서 재편에 대비하기 위한 '자강과 다각화, 협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엔비디아 측이 한국에 26만 장의 AI용 GPU를 공급하기로 한 것에 주목하면서 한국의 '피지컬 AI' 분야 경쟁력을 전략적으로 확대하고, 수출중심의 경제운용을 해외 투자수익 확대의 방향으로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미중 전략경쟁 시대에 한국의 우수한 경쟁력은 제조혁신역량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전체 GDP의 25% 이상이 제조업에서 나오지만 그 비중은 세계 5%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한만큼 세계 제조업의 27%를 점하는 중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도 "눈물을 머금고 당분간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에서 김동엽 교수는 '한미 정상회담 및 제57차 SCM분석 및 쟁점 : 군사·외교·안보 분야 중심으로' 주제 발표를 통해 이번 한미 합의는 "경제적 양보와 안보적 종속의 구조화, 전략적 자율성 붕괴라는 외교적 선택의 축소가 연쇄적 구조를 갖추게 되면서 단순히 불리한 협상이 아니라 국가전략 전체의 일방적 재편입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면서, '주권적 상징의 획득과 전략적 종속의 제도화'라고 종합 평가했다.
"핵추진잠수함으로 대표되는 안보적 상징과 관세 상한이라는 제한적인 경제적 시혜를 얻는 대가로 GDP 3.5% 국방비 증액과 250억 달러(약 34조원) 무기구매 및 330억 달러 규모의 주한미군 포괄지원 약속, 'NC'(Non-recurring Costs. 비반복 비용, 정부 대 정부 계약인 '대외 무기판매'(FMS) 방식으로 무기를 판매할 때 부여) 면제 해택 폐지에 따른 추가 부담 등 미국에 천문학적 재정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한미일 군사협력과 대만해협 및 남중국해를 언급하며 미국 주도의 지역전략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맞바꾼 완벽한 비대칭적 교환"이었다는 것.
한국이 미국에 내준 것은 명확하고 명시적이며 모든 항목이 서로 연결된 '연쇄 청구서' 구조화된 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데 반해, 미국으로부터 받은 핵추진잠수함,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조건 충족 기준 전시작전권 환수는 상징적이고 모호하며 더 악화되거나 뒤집힐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2018년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이 한 문서에 담긴 것, 그리고 대만 및 남중국해 등 역외 분쟁을 언급한 것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과 모순되는 수사이며,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지역 전략에 한국의 자동개입을 초래하는 심각한 인지부조화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발표에 이어 지정토론자인 정재욱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와 권병규 미국변호사, 이태호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 이혜정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의 토론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