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덟째 이야기, 불효자는 웁니다(1)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80)]

2025-11-22     정해랑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삽화-백소(白笑)]


고모가 돌아가셨다.

아침 7시에 고모의 아들 현철이에게서 톡이 왔다. 요양병원에서 고모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잠시 망설여졌다. 달려가겠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연락을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오늘 요양원에 알바로 주간보호대상자 송영 운전을 하러 가는 날이다. 아들도 아닌데 임종하러 가야 한다고 일을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고모는 신돌석씨에게는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뒤 고모가 어머니 대신 신돌석씨 형제를 돌봐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임종하러 가야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송영 운전을 못하게 되면 오늘 쉬는 운전 담당 요양보호사나 간호조무사를 출근하게 해야 한다. 신돌석씨는 그 사람들이 쉬는 날 대신 하는 알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을 안 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연락이 왔다. 요양병원에 막 들어서는데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단다. 이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아니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이제 임종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아침 운전을 끝내고 가면 될 것 같다. 대신 할 사람도 저녁 시간에 나오게 하는 것은 덜 미안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모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마음이어도 되는가 하는 일말의 죄책감도 생겼다.

고모가 집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진 뒤 요양원에 들어간 것이 8년이 넘었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침대에서 낙상해 어깨가 다친 뒤 정형외과에서 수술하고 지금 있는 요양병원으로 온 지도 2년이 다 되었다. 요양원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그래도 정신도 또렷하고 삶에 대한 애착을 보이던 고모가 요양병원으로 옮긴 뒤에는 음식도 잘 드시지 않고 삶의 의지를 잃은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달에 갑자기 요양병원에서 면회를 시키지 않았다. 아들인 현철이와 며느리인 그 처가 무슨 연유인지 물으니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일주일쯤 뒤에 다 나았다고 면회를 시켜서 가보니 방을 옮겼더란다. 커다란 방에 두 사람만 있었는데, 말하자면 일반병원의 중환자실 같은 곳이었다. 그 뒤 신돌석씨도 가봤는데 고모는 이미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의사소통을 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내일이 고비일 거라고 했는데 한 달 가까이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요양병원에서도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무언가 초인적인 힘이 고모를 붙들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는데 오늘 드디어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고모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로 목숨이 부지되는 것은 큰아들 때문일 것이라고 다들 이야기하였다. 물론 대놓고 떠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쩌다 조그맣게 현철이가 듣지 않게 말했지만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졌다.

아침 운전을 마치고 신돌석씨는 며칠 있을 짐을 싸서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아내는 평생 직업이었던 미싱 일거리가 더 이상 잘 구해지지 않자 간병인으로 나섰다. 마침 오늘부터 내일까지 쉬는 날이었다. 신돌석씨도 요양원에 이야기해서 초상 다 치르고 삼우제 정도까지는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 따져 보니 이틀 정도를 빠지면 될 것 같았다. 대신 운전할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양병원에 가니 이미 시신을 옮기고 장례식장을 부근의 대학병원으로 정했다고 하였다. 현철이가 톡을 남겨 두었는데 운전을 하고, 신돌석씨가 일하는 요양원에 이야기를 하는 통해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대학병원에 도착하니 현철이와 현철이 처는 없고, 여수에 사는, 현철이의 누나 현주와 그 남편이 있었다. 어떻게 벌써 왔냐고 하니 어제부터 느낌이 그래서 밤새 올라왔다고 한다. 신통하기도 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직 빈소는 차려지지 않았다. 현철이는 고모의 영정으로 쓸 사진을 찾으려고 집에 갔단다. 장례식장은 지하와 1층, 3층이 있었다. 2층은 영결식장과 입관식장이 있었고, 조그마한 강당 같은 것도 있었다. 처음에 현철이가 지하를 얻었는데 현주가 고집해서 1층으로 옮겼단다. 하루에 40만 원 차이라는데 그 정도면 지하보다는 1층이 낫겠다는 것이 현주 생각이었다. 신돌석씨야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잘 했다고만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아내와 둘이 있게 되자 결국 맏아들 현규를 기다리다 끝내 돌아가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쪽으로 갔던 현주가 다가오면서 뜻밖의 말을 하였다. 어제 밤에 지현이 엄마가 왔다 갔단다. 맏며느리인 현규 처를 말하는 것이다. 그 동안 나타나지도 않더니 어쩐 일일까? 그러면 그 사람이 왔다 간 것이 고모의 죽음을 재촉한 것이 된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신돌석씨는 괜한 생각이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현규는 어디 있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더란다. 벌써부터 헤어졌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따로 오는 것을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더란다. 고모 손을 잡고 한참 보기만 하다가 눈물을 질질 짜더니 갔다고 한다. 고모는 눈을 뜨지 않고 그냥 있었는데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보아서 아는 것 같더란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큰아들은 어디 갔는지 소식도 없고, 큰며느리만 혼자 온 것을 고모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현규는 자랄 때까지는 효자로 친척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이야기했다. 신돌석씨와 동갑인 현규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에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트럭을 몰았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때 현철이가 뱃속에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몸부림치며 울던 고모의 모습이 어린 신돌석씨의 기억으로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현규는 상주로서 묵묵히 장례 절차에 임했었다.

그 뒤 고모는 남은 세 남매를 키우기 위해 안 해 본 일 없이 다하면서 그야말로 몸을 갈아서 애들을 키웠다. 애들 셋도 다 반듯하게 자랐다. 현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고모가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좌판을 깔고 하는 장사였기 때문에 수시로 단속을 당했다. 하지만 대체로 단속반은 형식적으로만 했고, 돈을 좀 찔러 주면 그냥 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아마도 강력한 단속을 하라는 지시가 내린 모양이었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가게를 낸 상인들의 항의가 심하거나 그들에게 후원금이라도 받는 정치인들이 강하게 요구하는 때였다. 어느 경우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들은 생선을 담은 양동이를 집어던져서 생선이 길바닥에 쏟아지게 하는 행패를 부렸다. 그것을 주워 담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고모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마침 현규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현규는 항상 학교에서 돌아오면 시장으로 와서 어머니 일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현규의 눈에 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신돌석씨가 현규에게 들은 바로는 그때 총이라도 있었으면 모두 쏘아 죽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분노에 치를 떨었다는 이야기였다. 현규가 달려들어서 단속반원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른 단속반원들이 달려들어서 현규를 패대기쳤고, 땅바닥에 쓰러진 현규를 보고 고모가 생선을 주워 담다가 소리를 지르며 현규 쪽으로 달려갔다. 현규가 다시 일어나서 단속반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대로 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맞을 수밖에 없었다. 현규가 옆에 있던 막대기를 들고 그들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완력에 밀려 또다시 땅에 쓰러졌다. 현규와 고모가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조금 있다 경찰이 왔다.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휘두른 것은 단속반원이었지만 끌려간 것은 현규였다. 이럴 때 항상 따라붙는 법 조항이 있다. 공무집행방해였다. 현규는 경찰들에 양팔을 붙잡힌 채 차에 태워졌고 파출소로 갔다.

고모는 바닥에 흩어진 생선을 주울 생각도 못한 채 파출소로 달려갔다. 생선은 같이 일하던 상인들이 주워 담았고 물로 씻어서 건네주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고모가 파출소에 가서 어떻게 했을지가 궁금했었다. 내 아들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싸웠을까, 아니면 내보내 달라고 애걸했을까? 두 가지 다 였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싸우다 사정하다 하면서 파출소 순경들을 골치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현규가 교내 백일장에서 글로 써서 대상을 받았고, 그것이 구청에까지 알려졌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모는 그 뒤 가게 터를 얻어서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효자였던 현규가 고모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결혼한 뒤부터였다. 고부간 불화 때문인지 몇 차례 같이 살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현규 부부는 외국으로 나갔다. 그 뒤 현규만 국내에 몇 차례 들어왔는데 문제는 현규 부부도 이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해 들은 것밖에는 모르는 신돌석씨로서는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현규 처는 그 뒤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들어왔어도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현규가 고모의 하나밖에 없는 집마저 마음대로 팔아버리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고모는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것이 이제 십 년이 다 된 이야기다. 현철이로서는 형은 물론 형수도 별로 좋게 보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형수가 다녀갔다는 것이다.

[삽화-백소(白笑)]

현철이가 영정을 들고 왔다. 제자리에 놓으려고 했는데 의자를 옆으로 놓고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직원이 왔다. 받아들더니 향이 놓인 대를 그냥 밟고 올라가서 놓는다. 그렇게도 할 수 있구나 여겨지기도 했지만 조금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카들이 왔다. 현주네 아들, 딸과 현철이네 딸, 아들이 왔다. 현주네 아들 딸은 둘 다 서울에 산다. 현규 딸 지현이는 병원 근무하니 아직 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장례지도사가 접객실에 앉아 있었는데 빈소로 들어왔다. 가족들을 모두 영정 앞에 서게 했다. 신돌석씨 부부는 직계는 아니지만 가족과 하나로 생각하고 섰다. 아직 입관이 안 되었기 때문에 혼이 여기 머문다고 생각한단다. 원래 맏상주는 현규이지만 없으니까 현철이가 맏상주로 아내와 함께 앞에 서고, 그 뒤에 현주 부부, 그리고 조카들이 섰다. 신돌석씨 부부도 조카들과 같이 섰다.

조금 있다 상복을 입기는 하겠지만 상복으로 여기지는 않는단다. 내일 입관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상복으로 여기고, 여자들은 머리에 핀을 꽂고 남자들은 상장을 팔에 두른단다. 먼저 맏상주인 현규가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이어서 전체가 절을 했다. 이때도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절을 한 번만 한단다. 신돌석씨로서는 이런 장례식 절차에는 처음 참예해보는 것이었다. 조금 신기하게 여겨졌다.

고모는 평생 교회에 다닌 사람인데 장례 절차는 기독교식이 아닌 것 같았다. 대 위에 향도 있고, 음식과 과일도 놓여 있다. 현규에게 물어 보니 그냥 상조회사에 의뢰했고, 종교를 물어서 없다고 했단다. 하기는 현규는 교회에 안 다닌다고 들었다. 생각해 보니 고모도 교회를 열심히 다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신돌석씨네는 외가는 이북에서도 교회를 다녔던 전통 기독교인이었다면 친가는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첫 번째 제사를 끝내고 접객실로 자리를 옮겨서 일단 이른 점심식사를 했다. 아침 일찍 돌아가셔서 3일을 꽉 채우는 장례를 치를 것이기 때문에 약간 길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조금 있다 상복이 도착했다. 신돌석씨도 상주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옷을 입었다. 형이 왔는데 형은 안 입겠다고 해서 그냥 두었다. 조금 있자니 현규 딸인 지현이가 왔다. 나이트 근무하고 이제 병원에 이야기하고 오는 거란다. 간호조무사로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조문객은 없었다. 영정 앞에 가서 앉았다. 고모 사진은 그다지 늙지 않았을 때 찍은 것 같았다. 이제 정말 고모와 이별하는구나. 어린 시절부터 고모와 함께 지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신돌석씨에 대해 애정을 가지면서도 사는 삶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기층민중인데도 그렇다. 출신 지역 때문일까? 아니면 그 세대는 다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고모가 신돌석씨를 적대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피는 이념보다 진한 것이다. 하기는 고모가 극우 이념을 지닌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지역 때문에, 세대 때문에 더욱 굳어져 갔다. 고모의 생각을 바꿔 보겠다는 노력을 신돌석씨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 허사였다. 그리고 이제 고모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