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되돌아본 조선공산당 100년

일본에서 조선공산당 결성 100주년 학술대회 열려

2025-10-20     도쿄=조정훈 통신원
19일 일본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사연구회 주최로 ‘조선공산당 결성 100주년-공산주의운동을 재고한다’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통신원]

식민지시기와 해방 공간에서 활동한 조선공산당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일본에서 재조명됐다. 19일 일본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사연구회가 제62회 대회의 주제로 조선공산당 결성 100주년을 선정, ‘공산주의운동을 재고한다’라는 제목으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일본과 조선을 잇던 공산주의자, 송성철”

이날 학술대회에서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인 송성철에 주목했다. 1913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송성철은 해방 전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 도쿄를 무대로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세포) 활동, 오사카 총파업 준비 등을 한 인물이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재건된 일본공산당에서 김천해 중앙위원과 함께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면서 일본 관서지역 책임자로 조선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을 잇는 활동을 주로 했다. 특히,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일본공산당과 재일동포를 대표해 참가, 박헌영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조선에서의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타도, 일본에서의 천황제 및 전쟁범죄자 타도 등 조선과 일본의 공산당 활동 방향을 연대하는 데 일조하면서 토지개혁을 통한 조선과 일본에서의 인민공화정부 수립을 공유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정영환 메이지카쿠인대 교수는 일본과 조선을 잇던 공산주의자로 송성철을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통신원]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재일조선인 생활권 확보 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1946년 12월 조선인 생활권 확보 인민대회에서 조선인을 준연합국 국민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다 체포, 1947년 3월 서울로 송환됐다. 공산당 활동의 이력이 있던 송성철이었지만 남한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를 두고 정영환 교수는 “당시에는 일본에서 조선인을 위해 싸우다 탄압받은 인물로 평가돼, 해방공간에서 별다른 불이익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1947년 서울에서 활동하던 송성철은 암살된 여운형 선생 장례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그해 8월 여운형 선생의 큰 딸인 여난구와 결혼했다.

이후 송성철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재일조선인연맹(조련)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다. 당시 조련대표는 ‘리동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번 학술대회에서 송성철로 처음 확인됐다.

정 교수는 “당시 기록영상이 남아 있다. 리동민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영상 속 인물이 송성철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 송성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북한에 남은 송성철은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 외무성 일본부장, 외무성 아시아국장 등을 역임했으나 이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 교수에 따르면, 1952년 박헌영 재판 기록 중 일부에 송성철이 등장, 실각된 뒤 1973년 사망했다는 설만 있을 뿐이다.

송성철의 활동을 두고, 정영환 교수는 “일본공산당 역사와 조선공산당 역사 각각의 틀에 박혀 있지 않고 양자를 시야에 두고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조선 사회주의 운동사를 일본 국내외는 물론 남북을 일체적으로, 그리고 해방 전후를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어 송성철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948년 4월 평양 남북연석회의 재일조선인연맹(조련) 대표로 참가한 ‘리동민’이 송성철로 처음 확인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통신원]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 이론가, 권환”

카게모토 쯔요시(影本剛) 문학박사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가인 권환을 소개했다.

본명이 권경완인 권환은 190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일본 야마카다 고교를 거쳐 1926년 교토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문예동맹(카프, KAPF) 도쿄지부에 가입했다.

1929년 잡지 『무산자』에 시 「이 꼴이 되다니!」를 발표하면서 ‘권환’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카프 가입 이전에도 1924년 「이즈매의 죽음」, 1926년 「광!(狂!)」 등의 시를 발표했는데, 카게모토 박사는 “권환이 대종교 교도였다는 점에서 민족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작가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1929년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중외일보』에서 일하면서, 카프를 혁명적 문예활동가 조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 ‘당의 문학’ 등을 주장하며 카프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 문학부 책임자를 맡았다.

카프 이론가로도 활약한 권환은 특히, 아동과 관련해, ‘동심은 순진무구하다’, ‘동심은 천진난만하다’, ‘아동은 천사다’ 등의 표현은 부르주아적인 아동관으로 아동은 계급적인 존재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1933년 농민의 계급적 특성을 담은 소설 「목화와 콩」을 발표했다.

하지만 1931년 8월 제1차 카프사건으로 체포, 결핵으로 풀려난 뒤, 1934년 6월 제2차 카프사건으로 수감, 1936년 2월경 사상전향과 집행유예로 출소,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를 두고, 카게모토 박사는 “전향 이후 권환의 시는 작가 내면을 그려냈는데, 정치적인 대일협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30년 전후 모색했던 지향성과 비교해 전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해방 후 권환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시부 및 외국문학부 위원으로 선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과 조선문학건설부문을 연합하는데 중개자로 역할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됐다.

당시 북으로 간 다른 문학가들과 달리 그는 1947년 마산으로 귀향, 마산공립중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모친의 죽음을 겪었으며, 1954년 7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권환에 대해, 카게모토 박사는 “해방 후 남쪽 동포에게는 「새 팔일오를 정말 팔일오」가 필요하다고 호소하며 「어서 일어나리라 어서 그대들 따라 일하리라」라고 읊은 권한은 병으로 동료와 함께 일하지 못한 것을 답답해했다”면서 “문학운동에서 가장 첨예하게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하고 이론적인 견지를 유지했으며, 작품의 내용 면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실험하려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 밖에도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김영진 성균관대 교수가 식민지 당시 잡지를 통한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발표했으며, 이토 아키라(伊藤晃) 전 치바공업대 교수, 고영란 니혼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학술대회에는 일본 관서와 관동 지역에서 조선사를 연구하는 교수, 연구자 등 1백여 명이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