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다섯째 이야기, 저 낮은 곳을 향하여(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73)

2025-10-04     정해랑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삽화-백소(白笑)

약속했던 날이 되었다. 서울역에서 송목사를 만나서 4호선을 타고 명동역으로 갔다. 10번 출구로 나오자 세종호텔 앞에 작은 천막들이 있었다. 해고된 조합원들이 농성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 옆 차도에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시작 시간인 5시가 되려면 10분쯤 남았는데 벌써 의자에는 사람들이 거의 앉아 있었다. 신돌석씨는 송목사와 뒷부분에 가서 앉았다. ‘하늘에는 고통, 땅에는 외면’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성문밖 교회 집사라고 했다. 오늘은 성문밖 교회가 주관한다고 하였다. 이 교회는 신돌석씨도 일찍부터 잘 아는 교회다.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이다. 공장노동자들이 교회 다닐 여건이 안 되어서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선교를 하는 곳인데, 7-80년대에 정부나 자본가는 줄임말로 도산이라고 불렀고, 운동진영에서는 산선이라고 불렀다. 거기 가서 교육을 받고 회의를 한 적도 여러 번 있어서 귀에 익은 교회 이름이었다.

그 교회를 이끌던 목사가 수구세력이 되고, 신돌석씨가 잘 알던 선배 하나도 그 교회 간부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들리는 말로는 그들은 이승만이 진정한 영웅이고, 좌익세력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한단다. 그런 상황인데 지금 집회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이 그 교회 집사인 것 보면 교회 자체가 변질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신돌석씨는 요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인도자라고 불리는 사회자가 하는 예배의 부름으로 거리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거리기도회의 정식 명칭은 ‘복직하는 그날까지 기도하며 투쟁하는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기도회’였다. 기도회는 여느 예배와 마찬가지로 찬송, 기도, 설교 등으로 진행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찬송을 부르는 중에 ‘동지가’를 부른다는 것이었고, 노조 측에서 ‘현장 증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상황이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가 있었다.

이제 세종호텔노조의 고공농성은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선 이후 마지막 남은 고공농성이다. 그 동안 외면하기만 했던 사측이 이제 대화를 하겠다고 한 것이 이전과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진정성을 담은 것인지도 의문이고, 이전에 이들이 했던 것을 보면 과연 복직과 정상화로 이어질지도 의문이다. 한국옵티칼노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집으로 가득차 있는 사측이 과연 태도를 바꿀지 의문이다.

세종호텔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분규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회사가 2021년에 코로나19에 의한 경영악화를 핑계로 희망퇴직을 요구했고, 이에 불응하는 조합원 12명을 해고하였다. 노조 측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으니 복직시키라는 것이었다. 코로나19이니 경영악화는 당연한 것이고, 그에 따라 인력 감축은 당연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호텔의 경영악화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코로나19라는 일시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사측의 진짜 목적은 경영악화의 개선이라기보다는 노조 파괴였다. 회사는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이전부터 갖가지 압박을 가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전환 배치였다. 노조 사무장의 경우 호텔 대표전화 교환 업무를 했는데, 노조 활동을 하니까 객실 청소로 업무를 바꾸었다고 한다. 회사는 그러면 나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6년을 객실 청소를 하면서 버티니까 코로나 때 객실 청소 부서를 용역업체에 넘기고 주방 보조로 보냈단다.

심지어 열 세 번 전환 배치를 당한 사람도 있었단다. 그러다 코로나19가 되니까 경영 악화를 핑계로 인력 감축을 내걸고 희망퇴직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해고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민주노총 조합원들만 골라서 하였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회사가 정리해고를 하려면 되도록 그러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세종호텔 사측은 정리해고를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하기 위해 갖가지 수를 썼다.

코로나19 당시에는 정부에서 고용유지지원금을 90%나 지원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0%만 회사가 부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측은 그 10%도 못 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10%를 노조가 부담하겠다고 했다. 정리해고를 피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불가피하게 정리해고를 단행한 것이 아니라,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정리해고라는 수단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세종호텔은 세종대학교 재단인 대양학원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법인의 수익사업체이다. 이 재단은 설립자 가족이 요직을 두루 차지하면서 운영하는 이른바 족벌재단이다. 설립자의 아들이 이사장으로 재단을 좌지우지했었는데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4년에 교육부 감사에서 약 113억 원의 회계부정이 적발되어 재단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이명박 정부가 되자 명예 이사장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복귀한 뒤 세종호텔 회장으로도 돌아왔다.

[삽화-백소(白笑)

그는 오래전부터 호텔의 각 사업 부서를 외주화하고 싶어 했다. 인건비를 줄이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재단에서 쫓겨나면서 그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2009년 호텔 회장으로 복귀한 후 1, 2년간은 노조의 눈치를 살피더니 2011년 복수노조법이 통과되자 어용노조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노동환경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민주노총 조합원을 전환배치로 압박해서 퇴사를 유도하고, 어용노조의 형식적인 동의를 통해서 외주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했다.

이런 과정을 알게 되면 노동자들의 삶과 민주주의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노조와 함께 살기를 싫어하고, 노동자를 자기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싫어하는지도 알 수 있다. 노조 파괴 공작에 혈안이 되어 움직이던 그에게 코로나19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국민의 불행을 더없이 좋은 기회로 활용한다는 것 자체를 보아도 이 자가 얼마나 반국민적인지를 알게 해준다.

노동조합은 정리해고 훨씬 이전인 15년 전부터 회사의 직원 외주화, 임금 삭감, 구조조정 등에 맞서 싸웠다. 이 15년은 세종호텔을 좌지우지했던, 설립자의 아들인 전 세종대 재단 이사장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2011년 세종호텔에는 친 회사 성향의 복수노조 ‘세종연합노조’(이하 연합노조)가 생겼다. 세종호텔지부 조합원 여럿이 연합노조로 넘어갔고, 소수가 된 세종호텔지부는 교섭권을 빼앗겼다.

사측은 연합노조와 교섭하며 기존 노조에 막혔던 여러 정책을 밀어붙였다. 객실정비, 주차관리 등 호텔의 필수 직종들을 외주화했고, 정규직 직원 숫자를 대폭 줄였다. 10년 전만 해도 직원 250여 명 대부분이 다 정규직이었는데 지금 정규직은 21명밖에 없다. 250명 가까이 일하던 그 일터에 지금은 전체 60명, 70명도 안 되는 사람이 일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끝나고 관광업은 다시 활성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재단측이 노렸다고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었다. 임금을 30% 인상하거나 30% 삭감하는 조항을 단체협약에 넣었다. 성과급이라는 말을 썼지만 결국 재단측의 방침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었다. 지부장도 두 번이나 삭감을 당해서 20년 넘게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의 연봉이 3천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연합노조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코로나19가 되자 정리해고라는 칼을 빼든 것이었다.

해고된 조합원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천막농성을 시작하였고,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많은 시민사회종교단체의 지지 지원을 받으며 싸워나갔다. 농성을 하면서 매일 3회씩 주위를 돌면서 선전전을 했다. 2023년 9월 19일부터 2박 3일간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이들은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행정법원에서 용산 대통령실을 거쳐 세종호텔까지 거리 위를 기어서 행진했다.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절박한 호소의 몸부림이었다.

법적인 조치도 취했다.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제기했지만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정리해고를 할 만큼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었다고 봤다.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정리해고 정당성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법원은 경영악화가 지속될 거라면서 정리해고는 당연하다고 보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4개 법률단체가 정리해고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의견을 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끝난 이후 세종호텔은 경영흑자로 돌아섰다. 정리해고 이후 2023년부터 당기순이익 12억원을 거두면서 흑자전환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듬해에도 경영흑자였다. 32억 흑자로 추산되었다. 관광업이 활황이 되면서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재단측은 2천억원의 부동산 자산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진정 경영악화를 피하기 위해 정리해고를 했다면 흑자로 전환되었으니 복직을 시키는 것이 온당한 것 아닌가?

하지만 회사측은 법원의 판결만 되뇌이면서 노조와 대화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좀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부장이 고공농성을 하게 된 까닭이었다. 고진수 지부장은 지난 2월 13일 새벽 5시 세종호텔 앞 도로 한가운데 설치된 10미터 높이 지하차도 진입 차단 구조물에 올랐다. 이 구조물 꼭대기에는 가로 폭이 1m도 되지 않는 좁은 통로가 있다. 거기에서 매연과 소음, 추위와 더위를 견뎌야만 하였다.

이 공간에서 고 지부장은 아침 8시, 점심 12시, 저녁 5시30분에 매일 세 번 북을 친다. 그 동안 윤석열이 석방되었고, 파면되었고, 다시 구속되었다. 대선을 통해 내란정권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윤석열은 탄핵되었어도 부당해고는 탄핵되지 않았다. 거리기도회가 끝을 맺고 참가자들은 모두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지하차도 진입 차단 구조물 쪽을 바라보았다. 고진수 지부장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삽화-백소(白笑)

그리고 난 뒤 마이크를 잡고 연대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밑에서도 응원의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승리의 그 순간까지 힘을 내겠다고 하면서 밑에서도 끝까지 응원해주고 함께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말했다. 빨리 땅으로 내려가서 복직이 되어 여러분들에게 맛나는 일식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세종호텔에서만 경력 20년이 넘는 일식 요리사였다고 한다.

그들은 왜 싸우는 것일까? 결국 이들이 싸우는 이유도 한국옵티칼과 본질적인 면에서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10년, 20년씩 다니던 회사에 대한 강한 애착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신돌석씨가 처음 공장에 다닐 때는 장기근속자들은 거의 회사에 포섭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부가 아닌 사람들은 수시로 나가고 다시 뽑고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회사에 대한 애착이 있을 리 없고, 그러다 보니 이들처럼 싸울 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돌석씨는 이들이 투쟁하는 것은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결국은 노조파괴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우리 회사 노조, 내 노조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노조, 민주노조를 지키겠다는 의식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는 손해 보는 일 같은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든 것을 던져 싸우는 이유는 그것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돌석씨가 노조를 만드는 데 함께 했다가 구사대에 의해 깨지고 해고되었을 때 얼마 뒤에 경제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투쟁,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 등은 아무리 해보았자 노동자들을 개별화시키고 이기적으로만 만들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조악한 형태로 복사가 되어 돌아다니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경제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경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도 힘든 마당에 그러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라는 반문에 주로 학생 출신들이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구로동맹파업을 사례로 말하면서 이제 노동자들이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며 싸워야 할 때라고 하였다. 조철구는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워낙 거센 분위기 속에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경제투쟁이 충분히 바탕이 되지 않은 섣부른 정치투쟁은 그나마 있는 조직마저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에 대해서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개헌투쟁도 노동자가 앞장서야 한다고 외치고 다닌 사람이 지금 국힘당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사람이다. 그는 ‘삼민통일헌법’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면서 노동자들을 무리하게 가두투쟁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지금은 그런 투쟁을 좌익용공세력이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도대체 인간이 그래도 되는 것인지 정말 의심스러운데 그런 사람이 출세의 길을 걸어온 것 자체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신돌석씨는 이제 그러한 생각이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 행태임을 분명하게 알 것 같다. 경제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연대를 위해,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의 전선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세기 가까이 지난 그 옛날의 YH노조 지부의 투쟁, 구로동맹파업, 지금의 고공농성 등은 바로 맥이 닿아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

공중에 올라가 있는 지부장과 인사를 나누고 그의 발언을 들은 뒤 기도회는 마무리되었다. 참가자들 모두가 앞으로 나와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송목사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부근에 생선구이집이 있는데 굉장히 맛있다면서 송목사가 안내를 하겠다고 하였다. 남산 쪽으로 가는 길에 식당이 있었다. 둘이 들어가서 고등어구이와 임연수구이를 시켜서 함께 먹었다.

송목사에게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물으니 지금 일하는 단체에서 활동비를 조금 받고 때때로 아르바이트를 한단다. 무슨 일을 하냐고 하니까 행사 안전 요원 교육을 받아서 그 자격증으로 일을 한다고 하였다. 왜 목회는 하지 않냐고 물으니 자기가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곧 목회라고 생각한단다. 목회자들이 좀더 건강한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신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지원하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단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송목사는 우산을 가지고 왔는데, 신돌석씨는 우산이 없었다. 송목사의 우산을 함께 쓰면서 오다가 그는 버스를 타고 신돌석씨는 전철을 타야 해서 갈라져야 할 판이었다. 그가 우산을 신돌석씨에게 건넸다. 쓰고 가시란다. 괜찮다고 했더니 자기는 모자를 쓰고 있고, 아직 젊으니 비 맞아도 상관없을 거라고 하며 씩 웃더니 우산을 던지듯 주고 뛰어갔다. 신돌석씨는 저기 빗속으로 예수가 뛰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