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다섯째 이야기, 저 낮은 곳을 향하여(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72)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신돌석씨는 이른바 모태신앙이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간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랐다. 아버지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형도 중학교 이후로는 교회에 대해 시큰둥해졌지만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다녔다. 신돌석씨와 누이동생 선옥이는 교회에 아주 열심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교회에 갈 것을 강요하거나 찬송과 기도를 하라고 압박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평소 삶 자체가 찬송이고 기도였다.
신돌석씨 남매에게 교회에 갈 것을 강권하던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외할머니였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큰 교회에 적을 두고 다녔지만, 끊임없이 이단이라고 불리는 교회 혹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신돌석씨가 성인이 되어서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돌이켜 보니 그것은 용한 무당과 점쟁이를 찾아가는 우리네 풍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형과 마찬가지로 신돌석씨도 고등학교 때쯤부터는 교회 가는 것을 등한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면서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처음 갔던 공장이 격주에 한 번 쉬는 가방공장이었다. 그러니 교회를 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 물론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왠지 가기가 싫어졌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던 경제적 격차가 교회에 가기 싫게 만들었다. 유년부 때 같이 다녔던 애들은 나이가 들면서 소원해지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고교 평준화 첫 해에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부에 가보니 일류 고등학교 아니면 그래도 명문 사립고라고 불리는 데 다니는 사람들만 다니고 있었다. 평준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연히 나가기 싫어졌다. 드문드문 나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완전히 안 나가게 되었다. 대학부 혹은 청년부라고 하는 데는 대부분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공장으로 간 신돌석씨는 자연히 교회와 멀어졌다.
첫 직장인 가방공장에 여자 미싱사가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금요일에는 철야기도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공장장이 못 가게 하니까 그러면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그 정도 실력의 미싱사를 구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공장장은 뭐라고 하기는 했지만 가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 미싱사는 금요일에 밤을 새고 온 뒤 토요일 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씩씩하게 일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 하루는 졸다가 미싱 바늘에 손이 찔렸다. 피가 나는 손가락을 싸매고 반창고를 붙이더니 다시 기를 쓰고 미싱을 돌렸다. 신돌석씨가 하나님도 그렇게 밤새고 와서 일하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라고 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는 식으로 쳐다 본 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부르는 찬송가를 신돌석씨가 따라 부르자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신돌석씨가 모태신앙이라고 하자 반색을 하면서 부럽다고 하였다.
모태신앙이 어떤 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사람은 사장과 한 고향으로 경상도 어디에선가 왔는데 자기 부모는 절에 다니고 무당만 찾아서 지옥 갈 거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뭐라고 한 마디 해주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이야기해 봐야 그 사람 마음만 복잡하게 할 것이고, 그를 위로하거나 생각을 바로잡을 정도로 확고한 생각이 신돌석씨 자신에게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 뒤 교회를 거의 잊어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장노동자 중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남자들 중에는 더욱 그랬다. 교회를 다닐 시간적 여건을 갖기도 쉽지 않았지만, 왠지 교회는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 다니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다 교회를 가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일단 시간을 때우는 데 좋았고, 당시만 해도 시원치 않았던 부식 대신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먹을거리들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대를 하고 난 뒤 다시 공장에 다니면서 교회를 잊어버렸다. 오히려 노동운동을 하게 된 뒤 교회를 찾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지역 내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등에서 그 지역의 특정한 교회가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그랬다. 그 지역에는 사찰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해고자들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돌석씨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70년대부터 교회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인권운동 등에 많은 도움을 주고, 또 자신들이 그 주체가 되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돌석씨가 알고 있던 교회에서 그런 곳은 없었다. 외할머니가 적을 둔 교회는 근엄하기만 한 교회였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또 다른 동네 교회들은 그저 복 달라고만 하는 교회였다.
교회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굳이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갈라지고, 이전에 자신들이 그렇게 비판하던 사람들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신돌석씨와 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중에서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고 여겨졌던 교회들이 이제는 진보를 적대시하는 세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1990년대쯤 되면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미국에 사는 외사촌이 한국에 올 일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만나자고 해서 형들 식구와 함께 그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간 김에 예배당에 들어갔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배를 보는 도중에 장로가 하는 기도를 들으면서 신돌석씨는 기겁을 할 뻔했다. 그가 대학가, 공장 등에 침투해서 이 땅을 적화시키려는 무리들을 모조리 섬멸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전에 외할머니 모시고 그 교회에 가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정도로 심한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북 사람들이 세운 교회라서 이북 체제나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말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두환정권의 인권 탄압이나 부정비리에 대해서도 목사의 설교에 조금씩 나오는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노골적으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적대시하고, 그것을 기도라는 명목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할 일인가?
그런 현상은 점점 더 심화되었다. 고모는 그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다. 동네의 작은 교회에 다녔는데, 경상도 사람이라 그런지 김대중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적대감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전두환 시절만 해도 정권에 비판적인 말을 가끔씩 했고, 6월 항쟁 때만 해도 이 새끼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말도 했었다. 그런데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한 편이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광주사태 때 간첩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자기 교회에 전라도 사람이 있는데 그때 광주에 있었단다. 그 사람의 말이 사람들 패고 죽이는 군인들을 직접 봤다고 했는데 그들이 도저히 우리 군인일 수가 없다고 했단다. 신돌석씨가 바로 그거라고 했다. 도저히 우리 군인이 할 수 없는 짓을 군인들에게 하게 한 것이 전두환 일당이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그게 바로 북한에서 온 간첩들이란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인간들이 몇몇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정말로 가까운 혈육이고 정치에 무관심한 것 같던 고모한테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차분히 설득하기도 힘들었다. 그 뒤로도 고모는 교회에서 그런 말을 듣고 와서 신돌석씨 형제들에게 했다. 정말 걱정이 되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마다 이런 말을 떠들어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뇌가 되어서 맹목적으로 그것을 믿고 떠들까?
신돌석씨는 지금 교회들이 극우의 온상이 된 것이 이 무렵부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에 그런 토양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정치권력을 통해 그러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굳이 교회가 그런 일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궁지에 몰린 이 땅의 수구세력이 기독교를 통해서 민간에 극우세력을 키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그저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데 신돌석씨는 왠지 마음이 아팠다. 이것도 모태신앙이기 때문일까? 스스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교회를 안 나가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딱 잘라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하나님의 뜻이 민중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필요한가? 이런 정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몸에 배고 머리에 깊숙이 박힌 기독교 문화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런 이야기를 목회를 하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라고 했다. 아무튼 그런 정도로 생각을 멈추고 있는데 최근 들어 극우의 온상이 된 기독교, 더욱이 미국의 극우집단과 연계되어 움직이는 기독교를 보면 더욱 심란해졌다. 그러던 중에 지역 활동을 하다 송목사를 만났다. 신돌석씨보다 나이는 십여 년 아래인 것 같았다. 요즘으로서는 젊은 사람이 나타난 셈이었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신돌석씨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활력을 주었다.
지역에 교회에서 하는 공동체가 있었다. 작은도서관도 있고, 어린이집도 있었다. 주민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심리치료를 하는 센터도 있었다. 그 공동체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교육을 무료로 했는데, 거기 강사로 그가 어느 날 왔다. 그는 서울에 있는 해외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풀뿌리통일운동단체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미국에서 10여 년 동안 있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된다고 하였다.
한참 동안 그가 목사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 공동체를 운영하는 목사가 그를 송목사라고 불렀다. 그래서 목사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목회는 어디서 하냐고 했더니 미국에서는 했는데 지금은 안 한단다. 목회를 하지 않는 목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조금 특이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가 혹시 목회를 한다면 그 교회에 나가려는 생각도 했다고 했더니 그는 씩 웃기만 했다. 그는 신돌석씨에게 참 맑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은 공동체에 꼭 오고, 그 외에도 자주 지역에 왔다.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단다. 탄핵 정국 때는 신돌석씨 단체의 깃발을 들어주기도 했다. 마침 김민호가 근무를 해야 될 형편이라서 신돌석씨나 최미숙이 들어야 할 판이었는데 송목사가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얼마 뒤에는 목회자 단체의 깃발을 들고 광장에 나왔다. 거기서도 자기가 젊은 편이라서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는 해맑게 웃었다.
지역 단체에서 화요일마다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한 강좌를 몇 주 열기로 했다. 그래서 송목사에게 오라고 했더니 이번 화요일은 안 된단다. 기독교 단체들이 돌아가면서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거리기도회를 하는데, 이번 주는 자기네 단체가 주관하는 날이란다. 신돌석씨는 세종호텔노조의 투쟁을 지원하는 거리기도회가 있다는 것을 그의 말을 듣고 알았다. 탄핵정국 때 행진하면서 몇 차례 세종호텔 앞까지 간 적은 있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냥 넘겼는데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게 있었다. 한 번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518광주민중항쟁 때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분이 남긴 기도문에서 왜 하느님은 자신에게 양심이란 걸 주셔서 이럴 때 회피하지 못하게 하시냐고 했다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도 그런 점이 조금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외면하지 못하는 양심이 자신에게도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송목사에게 화요일에 한번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자기 단체가 주관하는 날은 꽤 많이 남아 있고, 다른 단체가 주관할 때도 자기가 거의 가니까 시간을 잡아서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세종호텔 노조탄압을 규탄하고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투쟁의 현장에 가보게 되었다. 신돌석씨로서는 사실 시간만 조금 내면 되는 일 정도이지만 왠지 동참한다는 마음에 가슴이 설레고 뿌듯한 느낌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