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다섯째 이야기, 저 낮은 곳을 향하여(1)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71)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가가 있다.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크게 감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경건해지기는 했었다. 그러다 노동운동을 하고 난 뒤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신돌석씨는 그 책을 읽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제목이나 내용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알고 있다. 낮은 곳을 향하여 가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라는 뜻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꽤 된 일이기는 하다. 공중에 올라가서 내려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한스러운 사연들을 품고 공중에 올라갔다. 19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공중에 올라갔다가 밧줄 타고 내려오면서 시위들을 했다고 들었다. 그 뒤 1990년대 이후 요구조건이 지상에서 해결될 기미가 없을 때 공중으로 올라가는 노동자들이 생겼다.
내란정권이 끝장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정책이 눈에 띄게 달라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대통령과 민주노총위원장, 한국노총위원장이 함께 만나 환담하는 뉴스를 보면서 신돌석씨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제 노동계와 정부가 서로 신뢰하며 대화를 나누고 정책을 함께 만드는 일들이 가능해질 것인가? 물론 앞으로 남은 과제도 많고, 어디서 어떤 돌발변수가 터질지 솔직히 모르는 상황이기는 하다. 그래도 일보 전진한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산재 문제를 언급하고, 산재 빈발 사업장을 찾아가서 구체적인 문제까지 지적하는 것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들이다. 이에 발맞추어서 민주노총위원장 출신인 노동부장관이 동분서주하는 모습도 보기가 좋다. 노동부 장관이 임명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감동적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민주당 사람이니 새로울 것도 없다 면서 그의 임명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이전과는 다른 노동부 장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노동운동 전력을 팔아먹으며 반노동정책에 앞장섰던 전임 장관과 비교하면 더욱이 그렇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일 달라진 노동문제 중 하나가 고공농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이 지난달 29일 9미터나 되는 옥상에서 무려 600일 만에 내려와 땅을 밟았다.
지난 8월 28일 농성장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당 내 TF를 구성해서 문제가 된 부당해고와 고용승계 문제를 직접 다루겠다고 약속하자 600일 간의 고공농성을 풀고 땅으로 내려오기로 하였다. 언제나 그렇듯 좀더 확실한 결과를 보고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민주당 대표가 약속을 어기고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잘 한 결정으로 보는 것 같았다.
무려 600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당사자는 이 싸움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정말 몰랐다고 했다. 회사가 폐업을 하고 희망퇴직을 받자 거부하며 농성을 했고, 단전단수를 하고 공장을 철거하겠다고 하니까 일단 간단한 짐만 챙기고 두 사람이 9미터 높이의 옥상으로 올라갔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 회사는 일본의 닛토텐코 그룹의 자회사로 2004년 구미 외국인투자지역에 50년 토지 무상 임대와 세금 감면 혜택을 받고 공장을 세웠다.
이런 특혜를 받는 외국 기업이 있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이 사업장 문제가 이슈가 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특혜를 주는 이유는 지역의 고용 창출을 늘리고자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2022년 10월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공장 가동이 중단되었다. 회사는 1300억 원의 화재보험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공장 재가동에 사용하지 않았다. 두 달 뒤에 법인을 청산하고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을 통보했다.
그렇다면 이 회사가 한국에서 경영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구미공장의 생산물량은 또 다른 자회사인 평택 한국니토옵티칼로 옮겨졌다. 그리고 새로이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다. 구미공장은 폐업되었고 고용 승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은 노동자 17명은 해고되었다. 그 중 두 명이 옥상에 올라간 것이고, 끝까지 회사의 퇴직 요구에 응하지 않은 조합원 중 7명이 해고 상태에서 구미공장의 농성장을 지켰다.
한국옵티칼의 모기업인 일본의 닛토텐코 그룹이 구미 외국인투자지역에서 받았던 특혜까지 포기하고 공장을 재가동하지 않고 법인을 청산하려고 한 까닭은 아주 분명하다. 노동조합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언론은 강성노조라는 말을 쓴다. 어느 정도라야 강성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많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알 만한 사람들도 그러는 것 같다. 신돌석씨는 이런 점이 정말 안타까웠다.
노조를 없애기 위해 회사를 폐업하거나 이전하는 등의 수법은 노동탄압에서 아주 낯익은 수법이다. 그럴 때마다 노조가 강성이라서 기업을 경영할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부터 거의 반세기 전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민주노조들이 그런 구실로 탄압을 받고 와해되었다. 그런데 찬찬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조의 요구 때문에 경영을 못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1979년에 위장폐업에 항의하면서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하다 목숨을 잃은 김경숙 열사 추도식에서 당시 지부장은 추도사를 통해 당시 YH노조의 투쟁 목표는 민주노조의 사수였다고 하였다. 자신들의 요구조건은 관철되지 못하겠지만 다른 민주노조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민주노조를 위해 자신들이 산화하겠다는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었다.
그 오래 전에 그런 정신으로 싸우기도 하였구나.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숙연해짐을 느꼈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투쟁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고 있는 한국옵티칼의 조합원들은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이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차라리 희망퇴직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퇴직금을 많이 받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자본가나 그들의 이익을 위한 나팔수 노릇을 하는 언론들은 소수의 강성조합원들이 의식화되어서 그런다고 한다. 이전에는 심지어 외부세력의 조종을 받거나 세뇌되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그들이 뿔 달린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많은 국민들이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주권자의 한 사람이고,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정신에 투철한 사람들이라는 점에 공감이 되어야 한다.
신돌석씨는 얼치기 노동자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싸움을 하고 보아왔지만 이제 비로소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계급의식’이란 걸 알 것도 같다. 이제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계급의식이란 것은 어렵고 복잡한 말이 아니다. 더욱이 누구에게 주입되는 불온한 사상도 아니다. 자기가 노동자라는 자각, 노동자는 단결해야 하고, 그러려면 개인의 이익은 유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본가들이 노조를 말살시키기 위해 각종 폭압과 꼼수를 쓰는데 노동자도 노조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내게 얼마간 불이익이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높은 곳에 올라가기도 하고, 밑에서는 농성과 집회시위를 하기도 하고, 법적인 조치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은 역시 노동자편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 법은 가진 자들을 위해 존재했다.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해고된 조합원들은 회사의 해고가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라며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경북지노위는 구제 신청을 기각했고, 중앙노동위원회도 초심 판정을 유지했다. 이어진 소송에서도 법원은 해고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인정된다는 것이고, 한국옵티칼과 니토옵티칼이 다른 법인이기 때문에 고용승계의 의무가 없다고 하였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신돌석씨는 한국옵티칼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진 자들이 반민중적이면서 반국가적이라는 것이 명확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특정지역에서 외국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 우리 경제 전체를 위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어떤지 신돌석씨는 판단할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특혜를 주는 만큼 우리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정부나 사법부가 작동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고 하는 1990년대 이후 신돌석씨는 ‘애국’이나 ‘매국’이란 것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자리에 많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거의 듣기만 했고, 그런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지식인 출신들이 했다. 그런데 그들 중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애국’이 보수 혹은 ‘극우’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돌석씨도 이른바 국뽕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생각과 행태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수천 년 전 역사까지 소환하면서 우리가 위대하다는 것을 아무리 이야기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물론 묻힌 역사는 찾아내야 하고, 왜곡된 사실도 바로잡아야 하리라. 하지만 그것이 당장의 문제와 연관되는 듯 여기면서 그것으로 커다란 이슈를 삼으려는 사람들을 신돌석씨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외세의 문제는 핵심 문제 아닐까?
한국옵티칼 노조의 고공농성은 600일이나 지속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국옵티칼 조합원들의 농성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이다. 노동자들이 구미공장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한 것은 화재가 난 이듬해인 2023년 1월이었다. 그러니까 농성으로 치면 900일이 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금속노조는 물론이지만 민주노총 소속 여러 노조들, 그 외에도 시민사회단체들의 많은 지지와 지원이 있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과 진보정당, 국회의 지지도 있었다.
지난해 12월3일 국회의장이 오전에 화상으로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를 만나 위로하고 해결에 힘을 보태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날 밤 윤석열의 비상계엄으로 시간표가 미뤄졌다. 윤석열이 파면된 이듬해 4월에 고공농성 500일을 앞두고, 이들을 응원하러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계획되었다. 4월 26일 구미시 구포동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고용승계로 가는 한국옵티칼 희망버스'가 모였다.
신돌석씨 지역에서도 이 희망버스에 참가하였다. 윤석열 탄핵을 위한 투쟁으로 거리에서 허구한 날 싸워야 했던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구미로 향했다. 하지만 그다지 여론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기는 했다. 결국 대선이 끝나고 정권이 바뀌면서 고공농성은 끝나기는 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결말을 볼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신돌석씨는 이 투쟁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아직 ‘저 낮은 곳을 향하여’를 외치며 고공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종호텔노조 탄압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고공에서 벌이고 있는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고공농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지난 정권 막바지에 세 군데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금속노조 한국옵티칼 지회, 그리고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회였다.
이 중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김형수 지회장이 지난 6월에 내려왔고, 금속노조 한국옵티칼 지회 박정혜 부지회장이 내려와서, 이제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회 고진수지회장만 남은 것이었다. 세종호텔노조의 투쟁은 한국옵티칼노조의 투쟁과 종사하는 산업이나 원인 등에서 여러 가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고공농성으로 투쟁이 귀결되었다는 것이고, 노조탄압과 해고자 복직 문제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세종호텔노조의 투쟁에 대해서 일찍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투쟁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었다. 한화오션 조선하청노동자투쟁을 지원하려면 거제 통영 고성에 가야 해서 너무 멀었고, 한국옵티칼노조투쟁도 구미에 가거나 평택에 가야 하는 것이었다면, 세종호텔노조의 투쟁은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것인데도 관심이 많이 가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산업이 다른 데서 오는 얼마간 거리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이 투쟁에 관심을 좀더 갖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신돌석씨와 지역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목사인데, 그가 매주 세종호텔노조투쟁을 지지하는 노상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신돌석씨도 얼마간 마음의 빚이 있던 차에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함께 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산업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거리감은 정말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새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