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평’의 후손과 [경주이씨세보]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31)

2025-09-15     이양재

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삼국사기] 권제1,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에,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 (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육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신라의 건국 설화이다. 중요한 것은 고조선 유민이 남하하여 사로(斯盧) 육촌(六村)을 이룬 사실(史實)이다. BC.57년에 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즉 “혁거세는 옛 조선의 유민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여섯 부족 연맹체에 들어간 신흥 세력으로 서라벌을 건국한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1. 옛 조선(단군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개국하고 성씨를 갖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尼師今, 재위 AD.24~AD.57)은 서기 32년(유리왕9)에 사로 육촌을 육부(六部)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알평은 이성(李姓)을 하사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성(姓)이라기 보다는, “부족명(部族名)을 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로 육촌의 부족이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신라초가 아니라 훨씬 후로 보아야 하며, 신라초기에 사로 육촌에 성을 하사하였다는 것은 성(姓)이라기 보다는, “부족명(部族名)을 하사한 것”이며, 부족명이 후일 성으로 고착된 것이다. 여기 육촌의 부족은 고조선의 유민이며 이 여섯 성은 우리나라 전래의 토착성씨로 발전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여섯 부족의 영역이 경주(慶州) 한 곳이 아니라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에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왕성(王姓) ‘김(金) 박(朴) 석(昔)’과 육촌의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씨 등을 모두 -누구를 시조로 삼고 있든지 간에- 옛 조선이 망하자, 북방에서 남방으로 내려온 조선의 유민으로 적고 있다.

[표1] 사로 육촌과 촌성(村姓)

이것은 삼한(三韓)의 백성이 고조선의 유민임을 분명히 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관이다. 이러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관이 후일 민족사관의 발아점(發芽点)이 된다.

2. 알천 양산촌은 어디인가?

사로 6촌의 위치에 관해서는 제126회 연재에서도 우리나라의 토성 정씨문중을 다루면서도 언급하였듯이 아래와 같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표2] 사로 육촌의 위치에 관한 여러 학자의 관점

이상의 여려 견해 가운데 경주이씨문중에서는 알천 양산촌의 위치가 경주 동천동 산16의 표암봉이라고 주장한다. [표2]에서 천관우의 주장 그대로이다. 현재 그곳에는 현재 경주이씨 시조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말 그대로 경주이씨의 발상지로서 성역화되어 있는 것이다.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 전경. [사진 제공 – 이양재]

경주이씨 시조 알평(謁平)은 신라 알천 양산촌의 촌장으로 6부의 수장이었고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주관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알평에 관해서도 신화적인 이야기가 전승한다. 그의 탄강설화(誕降說話)는 북방계의 천강신화(天降神話)와 맥을 같이한다. 이것은 사로 육촌은 옛 조선의 유민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설화가 나온 것으로 귀결된다. 이들 사로 육촌의 후예들은 가장 확실한 조선의 토성이 된다.

3. 우리나라 여러 이씨 토성과 외래성

문화사학이나 현대 보학의 측면에서 보면, 경주이씨는 사로 6촌의 알평의 부족에게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하였다는 것에 착안하여 경주를 본관으로 선점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모든 이씨 성을 종주(宗主)하는 씨족이 되었다. 제126회 ‘조선의 유민, 그리고 정씨문중의 족보’에서 언급하였듯이 경주정씨는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종주 본관임을 선언하고 있으나, 경주정씨는 각 정씨의 종주 본관이라는 점에 관한 호응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이씨는 재령이씨와 합천이씨 등등의 여덟 문중의 이씨들이 경주이씨에서 분관하여 나왔음을 주장함으로써,1) 경주이씨가 여러 이씨 성의 종주 본관임이 확정되는 듯하다.

하지만 2015년 인구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이씨는 총 7,306,828명이며 경주이씨(약 156만 명)보다는 전주이씨(약 267만 명)의 인구수가 더 많다. 우리나라의 이씨는 100여 본관이 현전한다. 이 많은 이씨의 90%는 경주이씨와 전혀 관련이 없는 성씨이다. 우리나라의 이씨 성은 광주이씨(廣州李氏)나 덕수이씨(德水李氏) 진보이씨(眞寶李氏) 평창이씨(平昌李氏) 한산이씨(韓山李氏) 인천이씨(仁川李氏, 가야계) 등등처럼 경주이씨와는 혈통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우리나라의 순(純) 토성(土姓) 이씨가 상당수 많으며, 연원을 중국(延安李氏 등) 이나 여진(靑海李氏), 월남(베트남, 花山李氏)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경우도 일부 있다.

경주이씨 분적도 (경주이씨문중 제공)

경주이씨문중을 비롯한 아홉 문중의 조선시대의 과거 급제자를 살펴보았다. 경주이씨는 조선조에 문과 180장, 진사 307장, 생원 255장, 무과 427장의 급제자를 낸다. 여기에 역과 45장, 의과 36장, 음양과 4장, 율과 15장의 입격자를 내는 등 각 과에서 모두 1,269장의 입격자를 내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보학에서는 현달한 문중의 순위를 매길 때 문과의 과괄(科括) 장수로 따진다. 전통 보학의 기준으로 보면 경주이씨의 조선조 문과급제자는 180장으로 19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경주이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12대 연속 문과 급제라는 진 기록을 보유한 유일한 집안이다. 바로 이몽량(李夢亮, 1499~1564)으로부터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까지의 직계 12대가 문과 급제한 것이다.

그리고 그 12대에서 이몽량의 아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이태좌(李台佐, 1660~1739), 이종성(李宗城, 1692~1759) 등 세 분의 상신(相臣)을 무릅쓰고2) 있다. 이시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 1835~?)의 일곱 아들 가운데 문과 급제한 아들은 다섯째 아들 이시영이 유일하다.

[표3] 이알평 후손 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경주이씨 시조 알평(謁平, ?~?)은 [삼국사기]에는 고조선의 유민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경주이씨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그가 진한 땅 표암봉에 내려온 것은 BC. 117년이라 하고 있는데, 그는 200세 가까이 장수하였다고 주장한다.

3. 경주이씨문중의 족보 편찬

경주이씨문중의 문과급제자는 고려 때만 26장이고, 사마시에 9장이다. 즉 고려 때만 35장의 급제자를 낸 것은 여러 문중 가운데 단연 최상의 기록을 보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괄(科括)의 현달(顯達)한 문중이면서도 그 초간보를 1684년(갑자년)에야 낸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경주이씨가 고려시대에 이루었던 과괄과 현달한 사실을 보면, 그들은 1684년 초간 갑자보를 간행하기 오래전에 자신들의 계도나 가승을 편성하여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표4] 경주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실제로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찬술한 익재 이제현의 묘지명 [계림부원군시문충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에 의하면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①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②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②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④윤홍(潤弘)을 낳았다. 윤홍이 ⑤승훈(承訓)을 낳고, 승훈이 ⑥주복(周復)을 낳고, 주복이 ⑦칭(偁)을 낳고, 칭이 ⑧치련(侈連)을 낳고, 치련이 ⑨총섬(寵暹)을 낳고, 총섬이 ⑩춘정(春貞)을 낳고, 춘정이 ⑪현복(玄福)을 낳고, 현복이 ⑫선용(宣用)을 낳고, 선용이 ⑬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文林郞)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인 ⑭득견(得堅)을 낳았다. 상의가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된 ⑮핵(翮)을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檢校政丞)으로 시호가 문정(文定)인 ⑯진(瑱)을 낳았다. 문정이 대릉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지원(至元) 정해년(충렬왕 13, 1287) 12월 경진일에 ⑰공(이제현)을 낳았다.”3)라 하고 있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이미 이알평의 원손(遠孫)이자 경주이씨의 중시조인 이거명으로부터 이제현까지의 17세의 세계를 1376년 묘지명에 기록하고 있다. 고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러한 세계가 모여서, 1684년에 갑자 초간보가 집성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경주이씨문중은 임진왜란 이전의 필사본 세보는 족보 편찬으로 전혀 계수하지 않았다.

[경주이씨세보] 재간보, 1748년,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1748년 [경주이씨세보] 무진 재간보는 보통 족보가 아들은 ‘자(子)’로 적는데, 여기서는 ‘남(男)’으로 적고 있고, 그 시대의 보편적인 족보의 경우와 같이 선남후녀식을 따르고 있다. 한편, [표4]를 보면 공교롭게도 경주이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간행한 모든 족보는 목활자본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위의 경주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이외에도 순조말로부터 고종조에 2책~6책으로 구성된 여러 파보를 간행한 사실이 확인되지만, 권책수가 적은 것은 [표4]의 목록에 포함하지 않았다.

경주이씨문중에서 1684년(숙종10년)에 편찬한 [경주이씨족보] 갑자보는 17세기 말에 편찬한 족보이면서도 10권10책의 큰 분량이다. 책이 방대해진다는 것은 많은 인원이 간여하여야 하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 분질가가 높아진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수요의 축소를 불러오므로 파보가 발전한 것이다. 2015년 현재 남한만의 총인구가 1,391,867명이므로, 본관별 인구순위는 5위이니, 조선중기에도 경주이씨 인구는 다른 씨족에 비하여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4. 알평계 후손들의 족보 편찬 연도

이알평 이후 그의 자손들은 여러 본관으로 분적해 나갔는데, 분적한 문중에서 편찬한 초간보와 재간보 등 최고본 족보의 목록은 [표5]와 같다.4)

[표5]에서 보듯이 알평의 종주가(宗主家)로 자처한 경주이씨문중에서 1684년 [경주이씨족보] 초간 갑자보를 편찬하기 이전에 이미 “합천이씨문중에서 1529년 기축보를 편찬하였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합천이씨 1529년 기축보는 초고보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경주이씨의 1684년 초간 갑자보는 이알평 후손들의 최고본(最古本) 족보로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경주이씨문중에서는 고려말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물과 국당(菊堂) 이천(李蒨, ?~1349)이라는 탁월한 인물이 있어, 이들도 늦어도 고려말에 나름대로의 계보, 또는 계도를 작성하여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목은 이색은 이미 이알평의 원손(遠孫)이자 경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서현으로부터 이제현까지의 17세의 세계를 1376년 묘지명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이제현의 집안에서 목은이 묘지명을 편찬할 때 제공한 세계일 것이다.

이상의 [표3]과 [표5]에서 다룬 경주이씨문중을 포함한 아홉 개 본관은 모두 이알평의 후손이라는 확정적인 주장이 공론화되어 있다. 그러나 [표5]에서 보듯이 순조말년(1834년) 이전에 편찬한 족보가 확인되는 문중은 현재 5개 문중이다. 재령이씨문중에서는 1696년에 [재령이씨족보] 초간 병자보를 편찬하였다고 하지만, 현재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장수이씨와 아산이씨 진주이씨 차성이씨 등 4개 문중에서 갑오경장(1894년) 이전에 편찬한 족보의 현전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가문의 필사본 세보(世譜)라도 확인되었으면 한다.

5. 맺음말

경주이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성 가운데 하나이다. 경주이씨 문중의 최고본 계보는 이색이 찬술한 익재 이제현의 묘지명 [계림부원군시문충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이라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으로부터 이제현에 이르기까지의 17세 직계가 기록되어 있다.

중시조 이거명은 고려 건국초기의 인물이고,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1287년에 태어난 인물이니, 고려건국후 375년이 되는 해에 태어난 것이다. 대략 1세(世)가 평균적으로 22세(歲) 때에 득남한 것이다. 즉 익재 이제현의 묘지명은 현실성이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정황(情況)을 보았을 때 경주이씨 이제현의 집안에는 적어도 13세기 중반 이전에 형성된 세계가 있었다.

그리고 경주이씨는 고려 때 문과 급제자가 26장과, 사마 급제자 9장을 배출하였다는 점을 보아 이미 1300년대에는 벌써 벌족(閥族)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인구수가 적지 않았다. 경주이씨는 조선조에 문과 180장, 진사 307장, 생원 255장, 무과 427장의 급제자를 낸다. 여기에 역과 45장, 의과 36장, 음양과 4장, 율과 15장의 입격자를 낸다. 경주이씨 가문은 고려시대에 이미 벌족의 기틀을 잡았고, 조선에 이르러 인구가 많으니, 각 과에서 모두 1,269장의 입격자를 내었으며, 그 인물들이 여러 요직에 진출하게 된다. 결국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공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주이씨문중은 조선중기와 후기에도 인구수가 많았고 현달한 인물이 많았으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족보보다는 파보 발간이 발달한다. 책이 방대해진다는 것은 분질가가 높아진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수요의 축소를 불러오므로 파보가 발전한 것이다.

경주이씨문중에는 국난 앞에 항쟁의 선봉에 선 인물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회영(李會榮, 1867~1932) 5형제와 이상설(李相卨, 1870~1917) 등은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경주이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12대 연속 문과 급제라는 진 기록을 보유한 유일한 집안이다. 바로 이몽량으로부터 이시영에 이르기까지의 직계 12대가 문과 급제한 것이다. 이몽량의 넷째 아들 오성 이항복은 조정에 나가있는 40년 동안 붕당정치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超然)하였으며, 인품이 넓었고, 천성이 효우(孝友) 돈목(敦睦)하였다.

 

주(註)

주1)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李謁平)에 연원을 두고 있는 본관은 여럿 있으나, 경주이씨로 계대 연결이 확인되는 본관은 여덟 본관이다. 시조 후손에서 분적한 합천이씨(陜川李氏 - 분적조 강양군 李開)·차성이씨(車城李氏 - 분적조 차성군 李渭)·우계이씨(羽溪李氏 - 분적조 중서사인 좌복야공 李陽植)와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의 후손 계대에서 원주이씨(原州李氏- 분적조 23세 경원군 李攀桂)·아산이씨(牙山李氏 - 분적조 6세 증사공공 李周佐)·재령이씨(載寧李氏 - 분적조 7세 재령군 李禹偁)·진주이씨(晋州李氏 - 분적조 18세 대제학공 李永榟. 벽호공 李君榟)·장수이씨(長水李氏 - 분적조 장천부원군 李林幹) 등이 이에 속하며 그 외 몇몇 이씨가 경주이씨 시조의 후손이라고 칭하고 있다.

주2) 전통 보학에서 직계 조상의 후손임을 말할 때 ‘무릅쓴다’는 표현을 쓴다. 일반적으로 ‘창피를 무릅쓴다’라는 표현의 원형은 여기에 있다. 신분사회에서 현달한 조상을 무릅쓰는 것은 자신의 신분 위상을 말하는 것이다. ‘창피를 무릅쓴다’는 표현은 자신의 신분 위상을 던져 버린 매우 굴욕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주3) [목은문고] 권16, 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李穡) / (중략) “公諱齊賢字仲思父姓李氏新羅始祖奕居世有佐命大臣曰李謁平其後蘇判居明生兵部令金現兵部生三韓功臣大守金書新羅王金傅旣納土入朝尙太祖女樂浪公主生女以妻金書生潤弘潤弘生承訓承訓生周復周復生儞儞生侈連侈連生寵暹寵暹生春貞春貞生玄福玄福生宣用宣用生升高升高生文林郞尙衣直長同正諱得堅尙衣生贈左僕射諱翮僕射生檢校政丞謚文定諱瑱娶戴陵直朴仁育之女辰韓國大夫人以至元丁亥十二月庚辰生公” (중략)

주4) 이상의 이알평계 후손 이외에도 이알평의 후손임을 자처하거나 추정되는 본관도 5~7개가 더 현전하지만, 이들에 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는다. 아래의 목록 [표5]에서 경주이씨는 초간보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