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을 넘고 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출전이다!"
[산행기] ‘6.15산악회 창립 18주년 기념 불갑산’ (2025. 8. 24)
류경완 / 6.15산악회 회원
2007년 8월 창립한 6.15산악회가 어느덧 18년이다. 2010년부터 함께 한 나도 벌써 15년째이다. 그 사이 많은 선생님들이 돌아가셨고 일부는 기약 없는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저런 바쁘다는 구실로 근 1년 여러 등산 모임에 빠졌는데 장기수 김영승(91), 양희철(92), 김영식(93) 선생과 마지막 등산이 될 것 같아 이번엔 힘을 냈다. 세 분의 수형 기간만 100년이다.
올해 18주년 6.15산악회 장기산행지는 전남 빨치산 전적지 불갑산이다. 8월 23일 밤 11시 서울역을 출발, 새벽 5시에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용천사 골짜기에 도착하니 전국에서 44명이나 모였다.
6.15산악회원과 양심수후원회, 통일뉴스백두대간종주대, 615합창단 그리고 지방의 여러 단체 선생들과 전남 선우산악회 등 너무나 반가운 분들이다.
불갑산은 전남 영광군과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는 518미터 산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고산준령들이 덕유산을 지나 이어지는 호남정맥과 영산기맥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9월에는 '꽃무릇 축제'가 열려 내장산 단풍 못지않게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남녘의 많은 산들처럼 불갑산 일대 역시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투쟁과 군경에 의한 부역자 색출 및 토벌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 당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산행에 앞서 전쟁 당시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용천사 인근의 격전지에서 '통일혁명열사 불갑산 빨치산' 추모제가 조촐히 열렸다. 총탄의 흔적 선연한 조릿대길 큰 바위 앞에 상을 차리고 한도숙 전 전농 의장 사회로 헌작하며 75년 전의 역사를 떠올린다.
서경원 전 의원의 카랑카랑한 노래 '부용산'과 1988년 방북담 포효, 장기수 양희철 선생의 추모시 낭송에 이어 김강곤 산오락회 가수의 아코디언에 맞춰 '전남빨치산의 노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골짜기로 울려 퍼졌다. 산죽 숲에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들은 이 강산 조국 지키는
인민의 귀염 받는 아들딸이다.
추움도 더움도 두려움 없이
원쑤를 용서치 않는
전남 빨치산"
남녘현대사연구소 박동기 소장의 전남 빨치산 약사 강연도 이어졌다. 김영식 선생이 제상 앞에서 흐느끼고 평소 의연하던 양희철 선생도 낭송 중간중간 울먹이신다.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를 2차 송환의 기대감과 아흔을 넘긴 세월의 한계, 실제로 김영식 선생은 추모제 후 등산을 포기했고, 하루밤 백리를 내달리던 '소년 빨치산' 김영승 선생도 오후 하산 무렵엔 다리가 풀려 고생하셨다.
추모제 후 등산로 초입에서 꿀맛 같은 아침 식사를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그냥밥집 김지영 회원이 커다란 문어 숙회와 파김치 반찬들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용천사-구수재-연실봉-동백골-불갑사 총 7.6km 코스는 기대(?)보다는 편한 능선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마저 오랜만의 등산이라 쉽지 않았다. 불갑산 상봉인 연실봉에서 일행들 서로 소개하고 오락회를 마친 뒤 다리 풀린 김호 아버님까지 모시고 내려오는 하산길은 멀었다.
다음은 이번 산행에 동행해 추모제와 산상 강연에서 당시의 빨치산 투쟁과 학살의 참상을 경험한 '소년 빨치산' 김영승 선생의 생생한 증언이다.
“불갑산은 빨치산 투쟁의 전적지로 유명하다. 군경의 토벌이 시작된 1951년 2월 20일 소위 '2.0작전' 당시 광주 국군 20연대와 경찰기동대 총 1500명이 동원되었다.
빨치산 무력은 전남도당 불갑지구당 산하 14연대라고 하였다. 실제 전투인원은 30~40명에 불과했다. 고지 능선마다 화점을 구축하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밤오락회를 하고 잠든 함평군당은 전멸당했다. 무안군당은 비트에 들어가 있다가 살아났지만 전투 끝에 후퇴했다.
고지 능선을 점령한 토벌대는 공중에서 미제 제트기로 무차별적인 화력을 쏟아부었고 비무장 성원들은 능선 골짝에 삼대처럼 쓰러져 희생되었다. '온 산이 흰 빨래터 같았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들었다.
마을 주민과 보급투쟁 대원, 피난민 등 약 1500명에서 2000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했고 용천사 입구에서 불태워졌다. 군 장교가 한 아기의 발목을 잡고 나무에 패대기쳤으나, 아기는 나뭇가지에 걸려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용천사 능선에 묻은 덮개를 파헤쳐 노인과 어린애 시신 발굴 작업을 했다. 시신이 묻힌 곳은 4~5군데 된다. 최후 격전지였던 3월 18일 용천사 뒤중어길에서 큰 바위에 총탄 구멍이 안 난 곳이 없을 정도로 나 있는 흔적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봄이 되니 눈에 덮인 시신이 나타나자 멧돼지들과 여우들이 시체더미를 찢어 먹는 것을 목격했다는 살아나온 민간인도 있었다.
최후 격전지에서 전쟁 전 오대산 빨치산 대대장 했던 000동지와 불갑산 빨치산 총참모장이 희생되었다. 용천사는 빨치산 아지트로 쓴다고 모두 불질러 버려 새로 지은 절이다.”
산행 내내, 불갑사로 내려와 점심을 마치고 오른 귀경길 버스에서도 내내 김영승 선생의 이야기가 환영처럼 머리에 맴돌았다. 외세의 점령과 분단에 맞서 산으로 간 사람들, 내 할아버지처럼 고향 어귀에서 학살된 수십만 동포들, 그리고 여전히 통일조국을 꿈꾸며 싸우는 '통일혁명 열사들'과 전사들!
뒤늦은 산행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지구촌 역사는 전후 80년 체제를 마감하며 마지막 어둠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이 땅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 미 제국의 패권이 무너지고 더 정의로운 다극화 세계 질서가 떠오르고 있다. 피맺힌 반제 해방투쟁의 역사를 딛고, 모든 모순이 응축된 이 땅 한반도에서 새로운 희망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장기수 선생들이 '신념의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우리 산악회도 백두산과 묘향산에 함께 오를 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