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남부 (글로벌 사우쓰, Global South)와 한국

[기고] 이재봉 원광대 명예교수

2025-09-11     이재봉

이재봉 /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Global South’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이 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지 난감하다. 대부분 학자들이나 언론인들이 ‘글로벌 사우스’라 표기하지만, 난 굳이 순수한 우리말로 바꿔 쓰고 싶어서다. 최근 한 잡지에 실은 글에 ‘지구 남반부’라 썼는데, 이는 적도 남쪽을 가리키는 ‘남반구 (南半球, Southern Hemisphere)’와 혼동될 것 같아 맘에 들지 않는다. ‘Global South’는 ‘Global North’와 대칭적이지만 둘이 지구 (globe)를 지리적으로 절반씩 가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이라 어색하더라도 ‘지구 남부’로 번역해 쓰는 게 적확할 듯하다. 또한 난 국립국어원 <한글 맞춤법>을 지키려고 꽤 신경 쓰지만, 우리말 쌍시옷 (ㅆ)에 가까운 ‘th (θ)’ 음성을 시옷 (ㅅ)으로 표기하라는 <외래어 표기법>에 불만이 크다. 성주에 설치된 ‘THAAD’를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로 바꾸거나 ‘사드’ 대신 ‘싸드’로 써왔듯, ‘Global South’를 ‘지구 남부’로 옮겨 쓰거나, ‘글로벌 사우스’가 아닌 ‘글로벌 사우쓰’라 쓰겠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며 ‘동서 갈등 (East-West conflict)’이란 말이 생겼다. 미국 및 서구 (西歐, Western Europe)의 자본주의권과 소련 및 동구 (東歐, Eastern Europe)의 사회주의권 사이의 이념 대립을 뜻했다. 그 무렵까지는 유럽이 세계 중심이었기에 동.서 유럽의 갈등이 세계적 갈등이었던 셈이다. 1950-60년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남북 갈등 (North-South conflict)’이란 말이 나왔다. 미국이 속한 북아메리카 및 유럽을 비롯한 지구 북쪽 부유한 나라들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를 포함한 지구 남쪽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경제.사회적 갈등 또는 빈부격차를 나타냈다.

참고로, 한국 사회에서 ‘동서 갈등’은 흔히 동쪽 경상도·영남 지역과 서쪽 전라도·호남 지역 사이의 갈등을 일컫고, ‘남북 갈등’은 남한과 북한 사이의 갈등을 가리키니, 국제적으로 쓰이는 용어들과 전혀 다르다.

1950-60년대 수십 개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이들을 포함한 지구 남쪽 가난한 나라들이 ‘제3세계 (the Third World)’라 불렸다. 세계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을 제1세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을 제2세계, 이념적으로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을 제3세계로 이름붙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1970년대 마오쩌둥이 정립한 ‘3개 세계론’에 따라, 제국주의 미국과 소련을 제1세계로,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들을 제2세계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을 제3세계로 분류했다.

제3세계는 거의 모두 지리적으로 지구 남쪽에 위치하며, 역사적으로 식민통치를 받고 신생 독립국이 되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덜 개발된 공통점을 지녔다. ‘후진국 (後進國, undeveloped country)’이라 불리다, ‘개발도상국 (開發途上國, developing country)’으로 격상돼 불리기도 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약 30개 신생 독립국들이 모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며 세계 평화와 협력을 추진한다고 선언했다. ‘반둥 회의’로 불리기도 하고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1961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시작된 ‘비동맹 운동 (Non-Aligned Movement)’으로 이어져 발전했다. 미국이나 소련이 주도하는 동맹이나 연합 (bloc)에 동참하지 않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침략과 점령 그리고 지배와 간섭을 반대한다는 운동이다. 인도,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이 주도했는데, 미국·서방이나 소련·동방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3세계 대부분이 과거 영국,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 제1세계의 식민통치를 받았기에 제2세계에 좀 더 호의적이었다. 1960년대부터 유엔에서 미국보다 소련의 영향력이 더 커진 배경이다.

한국은 지리, 역사, 정치, 경제 등에서 제3세계의 공통점을 모두 지녔지만,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어 제3세계에서든 비동맹운동에서든 제외되었다. 아시아의 일본과 이스라엘, 오세아니아의 오스트레일리아 (호주)와 뉴질랜드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친미적이어서 소위 미국의 ‘51번째 주’로 불리는 국가들이다. 조선(북한)은 제3세계에 속해 비동맹을 ‘쁠럭 불가담 (bloc 不加擔)’이라 부르며 1960년대부터 핵심 외교정책으로 삼아왔다. 1980년 연방제 통일방안에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로 되여야 합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1950-60년대에 제3세계가 등장해 세력화하며 1960-70년대에 ‘종속이론 (dependency theory)’이 개발됐다. 라틴 아메리카 정치경제학자들이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미국·서방 선진국들은 더 부유해지고, 도움을 받는 중·.남미 후진국들은 더 가난해지는 모순적 상황을 분석한 것이었다. 후진국들이 선진국들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자원과 노동력을 값싸게 제공하고 완제품을 비싸게 사들이는 구조 때문에 저발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후진국들이 선진국들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을 본받고 따라 하면 근대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다는 1950-60년대 미국 사회학자들의 ‘근대화이론 (modernization theory)’을 반박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 한국 대학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 종속이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며 공부하기 어려웠다. 미국에 부정적인 내용이라 학문에서조차 금기·단속 대상이었다. 미국 대학에서는 이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는데 말이다. 제3세계의 종속이론에 대해 제1세계가 비판하며 근대화이론을 다듬어 1980-90년대 ‘신 근대화이론 (neo-modernization theory)’을 내놓았다. 여기서 대표적 사례로 꼽은 게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또는 ‘신흥공업경제 (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 NIEs)’였다. 이들은 서양 선진국들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을 따르면서도 종속되어 발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교육과 근면을 중시하는 문화와 전통 등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1990년 전후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져 제2세계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제3세계도 존립기반을 잃었다. ‘제3’은 수량이 아니라 순서이기에 ‘제1’ 다음에 ‘제2’ 없이 ‘제3’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제3세계가 2020년대에 ‘지구 남부 (Global South)’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제1세계였던 미국의 점진적 쇠퇴와 제3세계였던 중국의 급속적 성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장환율로 계산하는 명목 GDP로는 중국이 2010년 일본을 추월해 미국 다음으로 세계 2등이지만, 물가를 반영한 구매력으로 따지는 실질 GDP는 중국이 2014년부터 미국까지 추월해 세계 1위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IMF) 통계에 따르면, 2024년 명목 GDP는 미국 29.2조 달러, 중국 18.7조 달러인데, 실질 GDP는 미국 30.5조 달러, 중국 40.7조 달러다. 대만은 물론 확실한 중국령인 홍콩과 마카오의 GDP를 빼고도 그렇다. 무역량으로는 중국이 2009년 독일을 추월해 세계 제1수출대국이 되고, 2012년 미국을 추월해 세계 제1무역대국이 되었다. 2024년 수출량은 1위 중국이 3.6조 달러, 2위 미국이 2.1조 달러, 3위 독일이 1.7조 달러를 기록했다.

1970년대부터 세계경제를 이끌어온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G7에 맞서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 브릭스 (BRICS)의 경제력이 더 커진 것도 지구 남부의 성장·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G7은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 7개국 모임이고, 브릭스는 2006-11년엔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이었는데, 2024-25년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아랍에미리트, 인도네시아 등 5개국이 추가 가입해 10개국 모임이 되었다. 독일의 세계 자료·정보 플랫폼 <Statista>의 2025년 통계에 따르면, 2000년엔 G7의 GDP 합계가 22.3조 달러로 세계경제의 43%를 차지하고, 브릭스의 GDP 합계가 10.7조 달러로 세계경제의 21%였다. 2015년부터 각각 37.1조 달러와 37.3조 달러로 역전되기 시작해, 2024년 G7은 56.6조 달러로 세계경제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브릭스는 75.6조 달러로 35% 이상을 차지했다. 인구로는 G7의 합계가 7.7억 명, 브릭스가 37.2억 명이다. 한편, 브릭스 홈페이지엔 사우디아라비아도 회원국으로 나오는데, 아직 최종 결정되지 않았다는 정보·보도가 많다. 회의에 참여하되 의사결정권이 없는 동반자국가 (partner country)는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나이지리아, 우간다, 볼리비아, 쿠바, 벨라루스 등 10개국이다. 2024년까지 30개 이상 국가가 회원국 또는 동반자국으로 참가의사를 보였다니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될 모양이다.

이러한 중국의 급성장과 브릭스의 확장에 따라, 제3세계 또는 ‘주변 (periphery)’으로 불렸던 지구 남부 (Global South)가 미국과 유럽 등 지구 북부 (Global North)의 경제력과 무역량을 추월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지구 남부와 북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질 것 같다. IMF 통계에 따르면, 2029년까지 지구 남부의 연평균 예상 경제성장률은 6.3%, 북부의 성장률은 3.9%다. 인구는 전 세계 약 81억 명 중 지구 남부가 약 69억 명으로 85%, 북부가 약 12억 명으로 15%를 차지한다. 인구가 많으면 소비 시장이 크기 마련이다. 천연자원에서도 리튬, 니켈, 코발트 등 핵심 광물의 생산량과 매장량이 지구 북부보다 남부에 압도적으로 많다.

앞에서 얘기했듯, 한국은 1950-60년대 지리, 역사, 정치, 경제 등에서 제3세계의 공통점을 모두 지녔으면서도,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어 제3세계를 멀리 했다. 60여년이 흐른 2010-20년대에도 떠오르는 지구 남부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보다 중국의, G7보다 브릭스의, 지구 북부보다 지구 남부의 경제력이 커지고 무역량이 많아지며 세계적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는데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매달려 G7에 초대받지 못할까봐 안달하며, 중국과의 관계에 소홀하고 브릭스와 지구 남부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계 5-6위의 군사력을 지닌 터에, 12위 안팎의 경제력과 6-8위의 수출량·무역액을 기록하며 다른 선진국들보다 훨씬 높은 90% 안팎의 무역의존도를 보이는 한국이, 속된 말로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언제쯤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대한 의존·.종속 없이 드넓고 풍부한 해외시장으로 나아가는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이 원고는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평화학보』(2025년 8월 31일)와 함께 게재됩니다.

 

이재봉 교수 약력

 

약력: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박사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남이랑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 대표
한국중립화 추진시민연대 공동대표

대표 저.편.역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Korea: The Twisting Roads to Unification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평화의 길, 통일의 꿈』
『통일대담: 역사.문학.예술 전문가에게 듣는 평화와 통일』
『한반도 중립화: 평화와 통일의 지름길』

수상:
2019년 한겨레통일문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