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첨] 제주양씨(濟州梁氏)와 마한(馬韓)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30)
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 2025년 양씨종회보 [탐라국주] 제16호 pp.134~146에 기고
모흥혈에서 삼신인(三神人, 三姓人)이 용출했다는 이야기는 제주의 대표적인 신화로 취급되고 있지만, 그 삼성인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분들은 상당히 많다. 본관으로는 제주양씨와 남원양씨, 제주고씨와 청주고씨, 제주부씨 등으로 대별(大別)된다. 삼성인의 이야기가 신화로 각색(脚色) 및 윤색(潤色) 되었다고 해도, 양고부 삼성인 부족의 실체는 분명히 예로부터 존속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00여 년 전보다 지금의 역사고고학은 놀라울 만치 발전하였다. 한반도에는 없다던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역사가 기록으로 남기 이전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야기로 기록된 신화시대와 유물로 남은 선사시대의 접점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인 문화인류학으로 연결되어아 한다. 이 글은 그 가능성을 돌아보는 시론(試論)이자 시론(始論)이다.
1. 제주에서의 구·신석기 문화유적
제주에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문화유적이 있다. 제주도의 구석기 문화는 한반도 지역과 연륙(連陸)되어 있던 빙하기에 유입된 것이다. 구석기시대 이후 제주는 육지에서 분리되고, 한참 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한다. 현재 제주에는 많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다. 선주민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선사인(先史人)으로 보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삼성인 이전의 선주민은 청동기시대의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후대에 만들어진 탐라국 신화에 의하면, 탐라국의 건국연대는 BC 2337년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라 할 수가 없다. BC 2337년이면 제주에서는 신석기시대가 끝나기 이전이었고, 제주에서는 초기 문명시대가 형성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는 아직 문자나 청동기가 없던 시기이다. 역사학에서 볼 때 삼성인이 BC 2337년 전에 모흥혈에서 용출하지는 않았다.
제주에는 삼성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제주양씨(濟州梁氏)와 남원양씨(南原梁氏), 제주고씨(濟州高氏)와 청주고씨(淸州高氏), 제주부씨(濟州夫氏)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탐라국 초기에 일도(一徒) 이도(二徒) 삼도(三徒)에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일도동(一徒洞) 이도동(二徒洞) 삼도동(三徒洞)에서 말하는 무리 ‘도(徒)’ 자는 각 무리(부족국가)의 근거지, 즉 부족국가의 ‘도읍(都邑)’을 말한다. 일도는 첫 무리 량을나(良乙那) 세력이, 이도는 둘째 무리 고을나(高乙那) 세력이, 삼도는 셋째 무리 부을나(夫乙那) 세력에 지배하였던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화인류학적으로는 일도 이도 삼도는 각기 무리가 장악한 부족국가의 명칭과 각자의 근거지(根據地)이자 도읍지(都邑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 을나가 삼성혈(모흥혈)에서 용출하였다는 이야기가 기록화하면서 신화가 된다. 이러한 신화는 세 을나 세력이 제주도의 정치와 경제의 주도 세력으로서 확립되면서 만들어진 스토리 텔링(이야기, Storytelling)이다. 따지자면 현실적으로는 세 을나 세력도 육지에서 도래한 고대인이다. 그렇다면 신화성을 제외하고 역사적으로는 어느 시기에 어디서 왔는가? 청동기시대인가? 철기시대인가?
2.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 말기가 끝나가던 무렵,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만주)과 한반도에 쌀농사를 짓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주민이 있었다. 그 주민이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오기 직전에 고조선을 형성하였다. 대체로 기원전 3000~2500년 무렵이다. 이를 초기 문명시대라 정의할 수 있다. 초기 문명시대가 고조선으로 형성된 이후의 특징은 고인돌과 비파형 청동단검의 출현과 번성이다. 동북 삼성과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시작 연대에 대해서는 남북 학자의 견해가 다르다. 남한에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를 달리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의견은 “동북 삼성과 한반도의 청동기는 중국의 청동기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라는 것이다. 대체로 동북 삼성과 한반도로의 청동기 유입은 북방 민족의 이동과 관련이 깊다. 신석기시대 말기 이후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시기가 초기 문명시대이며 고조선시대이다.
북한의 학계에서는 기원전 2,500년 이전에, 남한의 학계에서는 기원전 1,500년 이전에 청동기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쓰면서 우리 역사상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고 본다. 남한의 학계에서는 현재 중국의 동북 삼성(三省)과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상한 연대를 기원전 1,500년 이전으로 잡아야 한다는 관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 제품·마제 석기·다양한 종류의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으며, 지석묘·석곽묘·옹관묘 등 새로운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확산하여 생산력을 향상하고, 이에 따라 사회 내부에서 신분적 차이가 생겼다. 제주도에서도 비파형 청동단검의 파편이 출토된 바 있고, 많은 고인돌이 있다. 즉 신석기시대 이후 고조선 문화 전성기(全盛期)의 특성이 제주도에서도 나타난다. 지금 제주에 있는 고인돌의 축조 시기는 청동기시대 유물의 상대 편년과 절대 연대를 비교해 보았을 때, 대체로 BC 1200년대부터 BC 200년 전후한 약 1000년 동안이라 할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 전기에 축조되기 시작해서 중기에 가장 성행하였다가 후기에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쇠퇴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제주의 고인돌에서 비파형 청동단검의 파편이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청동기시대에 제주도는 고조선 문화권이었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3. 삼성인은 BC 3세기 철기시대의 도래인
한국 고고학에서 철기시대란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BC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AD 300년경까지를 말한다. BC 300년경이면 후기 고조선이 망하고 북부여가 일어났고, 삼한(三韓)에서 72소국이 일어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고구려가 발아(發芽)되어 가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삼국사기』에는 AD 37년으로,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BC 2~3세기로 북의 역사학자 손영종은 BC 277년으로 보았다. 즉 철기시대 초기이다. 우리나라의 고고학자들은 이 철기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어 BC 300년에서 서기 전후(혹은 BC 100년)까지를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로, 서기 전후(혹은 BC 100년)부터 AD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구분하고 있다. 반면 일부 연구자는 이를 통합해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칭하기도 한다.
필자는 철기시대 초기에 세 을나 부족이 제주도에 도래한 것으로 본다. 철기시대 초기의 도래는 강력한 무사 세력의 상륙을 의미한다. 제주시 삼양동(三陽洞)에서는 청동기 말에서 철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원형의 주거 형태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은 제주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면을 보고 철기시대(鐵器時代) 초기에 탐라국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한다. 즉, 탐라국은 후기 고조선(後期 古朝鮮)이 망하고, 이른바 한반도에 여러 소국이 생겨나는 BC 3세기에 그 존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삼성인이 실존 인물이라면, 삼성인은 후기 고조선의 유민 또는 부여계의 유민들이 철기로 무장하고 들어온 세력의 부족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BC 3세기에 후기 고조선이 쇠퇴하고 한반도의 남서부에는 마한의 54개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는데, 그 시기에 삼성인이 제주도에 도래한 것으로 본다.
4. 중국 고문헌에 나타나는 주호(州胡)와 탐라
탐라국은 제주도를 비롯하여 그 인근 섬에 실존했던 해상왕국이다. 지금은 그 실체가 희미(稀微)하지만, 제주도 곳곳에 박힌 역사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후일 남겨진 고문헌에 나와 있는 탐라에 관한 단편적인 언급에서 탐라국의 얼개가 적지 않게 드러난다.
탐라국(耽羅國)은 한반도 남쪽에 있는 섬 제주도에 있었던 소국(小國)이다. 그러나 탐라국 시대에 탐라국인이 남긴 직접적인 고문헌은 없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탐라국은 - 후조선(後朝鮮, 후기 고조선)이 망하고 이른바 한반도에 여러 소국이 생겨나는 - BC 3세기에 그 존재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 시기 중국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BC 221년 이전이다.
철기시대의 탐라는 인구가 늘자, 농경에 적합한 토지가 부족하였고, 필요한 물품을 자체에서 충분하게 생산할 환경도 안 되었다. 따라서 탐라국은 주변 지역과 교류를 해야 할 당위성(當爲性)과 자위력(自衛力)이 필요하게 되었고, 제주도에 부족국가형태(部族國家形態)의 소국(小國)으로서 고대의 ‘주호’ 또는 ‘탐라’가 형성된 것이다.
경제사학에서는 단군신화의 신시(神市)를 고대의 시장(市場)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듯이 주호 또는 탐라에서도 고대의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1928년 제주시 산지항 공사 때 출토한 오수전(五銖錢) 4점과,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화포(貨布)를 근거로 삼성혈에서 가까운 산지천에 탐라 판 신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지금의 동문시장 일대로, 이곳은 탐라 시대부터 시장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근 어디에 선창(船廠, 조선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주지』에는 건입포(健入浦)가 언급되어 있다. 건입포는 지금의 건입동으로 제주항만 자리이며 산지천의 하류(下流)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근대까지 선창이 있었다.
탐라에 대한 최고의 기록은 진수(陳壽, 22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마한에 나오는 ‘주호(州胡)’라는 호칭이다. 즉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모두 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에서 물건을 사고판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주호가 바로 제주에 있던 고대 탐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이 기록은 마한전 기록에 들어 있는 기록으로, 당시 제주도에는 주호라는 마한계(馬韓界) 부족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외에도 탐라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 탁라(乇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특히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편찬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참고하면 7세기 탐라인들의 생생한 삶이 되살아난다. 당시 제주인들은 개와 돼지를 키워서 고기를 먹은 후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여름에는 초가에서 살다가 추운 겨울 되면 자연 동굴에서 기거했다. 오곡이 나지만 소로 밭을 갈 줄을 몰라 따비로 땅을 파 농사를 지었다.
『당회요(唐會要)』 「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儒李)이고 이름은 도라(都羅)인데, 성황(城隍)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용삭 원년(문무왕1, 661) 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나라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5. 마한(馬閑)과 탐라(耽羅)
고조선이 멸망한 후 동북 삼성과 한반도에는, 즉 우리 민족의 역사 영토 영역에는 72국이 훨씬 넘는 많은 소국이 명멸(明滅)하였다. 그중 하나가 탐라로 이 해상왕국은 72국이 훨씬 넘는 소국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72국’ 조에 “72국 /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70여 국이 되었는데, 지역은 모두가 사방 백리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에는 “서한이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후에는 2부를 두었더니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되었으니 각각 만 호씩이다.”라고 하였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소읍(小邑)이 모두 나라로 일컬었으며,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어 12개의 소읍이 나라를 일컬었고,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12개의 소읍으로 각각 나라를 일컬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이 소국들은 철기문화가 시작되는 BC 3~2세기경부터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한반도의 고대사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 72개 소국은 연맹 형태로 후에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따르면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개국이 있다.(‥‥‥馬韓在西, 有五十四‥‥‥)라고 하였다.
마한을 구성하는 소국의 개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54개국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을 걸로 추정된다. 달리 말하면, 중국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세력이 큰 마한 내 부족 국가체(國家體)가 최소한 54개나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소국들은 당시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가 쉬운 서해나 남해에 인접한 지역이다. 벽랑국은 이 서해나 남해에 인접한 마한의 한 성읍(城邑) 국가였을 것이다. 벽랑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마한의 어느 해변가에 있는 소국일 것으로 보인다. 벽랑국은 말과 소를 키우고 오곡을 재배할 수 있는 평야를 낀 지대(地帶)의 부족국가일 것이다. 필자는 벽랑국은 해남과 남원을 포함한 현재의 전라남도 일원에 위치한 마한의 일부 부족국가 연합체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벽랑국의 세 공주는 각기 다른 부족국가의 공주일 수도 있다. 이 부족국가 벽랑국은 마한 남부에 있었던 소국 연합체 ‘신미제국(新彌諸國)일 것이다.
역사를 판독하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제주의 개국시조 세 을나도 제주의 도래인이고, 이들도 실제로는 철기시대 초기의 도래인으로 볼 경우, 마한이 형성되기 직전이나 직후의 시기에 건너간 무사(武士)로 판단한다. 특히 나주나 해남 등 현재의 전라남도 지역의 고대 소국 연합체 신미제국은 옹관(甕棺)을 쓰는 장례문화가 있는데 제주에서도 용담동이나 삼양동 유적에서 옹관(제주도 기념물 40호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이것이 마한과 제주 삼성인 부족국가의 관계를 연결시키도록 한다.
6. 양씨(良氏, 梁氏)와 마한의 신미제국
제주양씨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374년(내물왕19) 신라에 입조하여 작록(爵祿)과 의관을 받은 후에 양(梁)으로 바꿔 불렀다”라고 한다. 이에 관한 기록은 고려 중기에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나 『삼국유사』(1281년),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1454년)에는 없다. 이들 사서(史書)는 제주고씨가 제공한 사료를 사용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나오는 탐라의 인물이 어느 부족에 속하는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양씨인지 고씨인지 부씨인지를 밝히는 부족이나 성씨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것은 씨족(氏族)의 발전이 부족(部族)의 형성보다 늦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양탕의 존재로 인하여 양씨에 관한 사적(史籍)이 고씨나 부씨보다 앞서 나타난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남원양씨 문중 일각에서 말하는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374년(내물왕19) 신라에 입조하였다”라는 주장은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기록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지만,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탐라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데 서기 374년 일화는 탐라국에 관한 직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미국(新彌國)의 수장 양탕(良宕)이 신미국이 망하면서 신라로 도망갔고, 당시 신라의 내물왕(奈勿王)에게서 양성(梁姓)을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양탕의 후손이 남원이라는 “본관을 갖게 된 것은 양우량(梁友諒)이 757년(경덕왕16) 남원의 부백(府伯)으로 봉해진 이후”라고 한다. 즉 남원을 본관으로 갖게 된 연유를 757년으로 밝힌 것이다. 양탕의 전설적인 일화가 역사적 사실이든 단순한 과시적 주장이든지 간에, 과거의 제주-남원양씨 문중에서는 탐라와 마한의 접근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매우 중요한 사실로서 이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원양씨 병부공파 세계도
사실상 삼성인이 실존 인물이고 육지의 도래인이라면 고대의 탐라국도 마한의 부족국가 연합체일 수 있다. 육지의 신미국을 위시한 벽랑국과 탐라국은 정치적 동맹체일 수도 있다. 제주의 탐라국은 일도의 양을나, 이도의 고을나, 삼도의 부을나, 이렇게 3개 부족국가 연합체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한다고 하였는데, 이 주호는 탐라국의 별칭(別稱)일 수도 있지만, 탐라국 이전에 제주에 있던 어느 부족의 국명(國名)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의 문헌이 부족한 탐라국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주호’나 ‘모라’를 탐라국 이전의 국명으로 받아들인다면 탐라국이라는 하나의 명칭을 쓰는 나라가 천년을 이어왔다는 점은 수정하여야 할 수도 있다. 탐라국을 한 성씨의 왕국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신라는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등 세 부족의 연합 국가로, 가야는 여섯 부족의 동맹국으로 시작하였다. 고대의 탐라국은 세 부족이 연합한 부족국가였고, 세 부족의 족장이 연합하여 다스렸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기존의 세 을나 세력은 지금의 전라남·북도에 있던 마한과 관련이 깊다. 특히 전라남도의 해남이나 나주와 연관된다. 해남과 나주는 마한 맹주의 신미국이 주도한 연합체 신미제국(新彌諸國, 침미다례)이 있었다. 이 신미제국과 탐라국의 관련성은 검토되어야 한다. 그들 마한의 무사 세력이 제주로 왔는가? 제주에 있던 세 부족국가의 세력이 마한으로 진출하여 이들과 연합했는가를 검토하여야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남원양씨의 중시로 주장되는 양탕(良宕, 梁宕)이다. 양탕은 마한의 한 부족국가 신미국(新彌國)의 성주였다는 주장도 있다.
“梁(良)양씨 씨족의 연원 : 삼성인은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살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어느 날 동해에서 기이한 나무상자가 떠내려 와 가서 열어보니 무지갯빛 광채 속에서 아리따운 세 처녀와 오곡의 씨앗과 가축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삼성인은 세 처녀와 각각 결혼해서 살았으며 그중 맏이인 양을나가 탐라국을 개국하여 왕에 즉위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양을나 시조의 원손인 양탕이 광순사(廣巡使)로 AD 373년 신라 내물왕18년에 성주왕자의 작호를 받아 신라국에 입조하였고 그때 개양성위양(改良姓爲梁) 즉, 양(良)을 양(梁)으로 사성(賜姓)하여 양(梁)씨를 쓰게 되었으며 또한 양탕의 후손인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경덕왕 때에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게 되면서, 그들은 남원양씨로 관향을 쓰게 되었다.”
남원양씨의 중시조 양탕이 마한의 신미국의 수장이었다면, 그것은 삼성인이 제주로 도래한 이후에 그 세력을 키워 다시 마한에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양씨만이 아닌 탐라국의 다른 부족 고씨나 부씨도 상당수가 육지의 마한에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양탕의 신미국 진출은 상당한 세력의 마한 진출을 의미할 수도 있다.
7. 모흥혈 신화의 접근
탐라국의 모흥혈 신화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신화는 고대인들의 믿음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경』을 종교문학 작품으로도 정의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인간이 글이나 말로 표현한 것(Storytelling)은 결국은 문학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도 역사 문학작품으로 볼 수가 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백두산 문학의 시작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선(古朝鮮)」조. 즉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그렇다. 필자는 제주 문학의 시작은 고대 탐라인들이 글이나 말로 표현한 것(Storytelling)으로 보며, 그 핵심에 모흥혈의 삼성인(三姓人) 신화가 있다고 본다. 제주의 다른 신화는 모흥혈 신화가 만들어진 이후에 나온 것이다. 모흥혈 신화가 수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세종때 편찬한 『고려사』에 나온다고해도, 그 원형은 탐라국 중기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강력한 권력을 추구할 때 이러한 신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는 분명 실존 인물이고, 탐라국은 실체가 있는 국가이다. 모흥혈 신화는 “고대인들이 왜 그러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문화사학(文化史學)의 입장에서 돌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 신화의 대부분은 천강신화(天降神話)이다. 단군신화가 그렇고, 가야나 신라의 신화도 그렇다. 고주몽의 탄생설화도 천강신화의 일종이다. 그러나 탐라의 신화는 신인이 땅에서 용출(湧出)한 신화이다. 사람이 땅에서 나왔다는 용출신화는 『성경』 「창세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첫 인간 아담을 흙으로 지었다는 것과 상통(相通)하기도 한다.
필자는 모흥혈을 가볼 때마다, 마치 새 둥지처럼 안온(安穩)함을 느낀다. 세계에 이토록 작은 공간을 성씨의 발상지이자 국가의 발상지로 지목된 장소는 달리 없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이나 신화학에서 볼 때 모흥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8. 탐라에 관한 옛 기록
『삼국사기』에는 탐라 및 탐라국 관련 기록이 5건 있다. 탐라국이 우리 역사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의 기록이다.
①『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제4 문주왕 /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②『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제4 동성왕 /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다.
③『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 탐라가 항복하여 속국이 되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기록에서 탐라국인의 이름이 나오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도동음율’ 또는 ‘진’이 양고부의 어느 부족인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④『삼국사기』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둘러보게 하다.
⑤『삼국사기』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哀莊王. 날이 매우 춥고 탐라국이 조공을 보내 오다.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탐라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 황룡사 9층탑의 제4층이 탐라국이라는 기록은 신라의 진평왕 때의 고승 안홍(安弘, 安含)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의 기록에 있다. 즉,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었으므로 구한(九韓)이 침범하였다. 만약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에 구층 탑을 세우면 곧 이웃 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으니, 제일층은 일본(日本), 제이층은 중화(中華), 제삼층은 오월(吳越), 제사층은 탁라(托羅), 제오층은 응유(鷹遊), 제육층은 말갈(靺鞨), 제칠층은 거란(丹國), 제팔층은 여적(女狄), 제구층은 예맥(穢貊)이다.”라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탐라가 여러 번 언급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남대적천황 계체천황(男大迹天皇 繼體天皇) 조에서 탐라와 백제가 처음으로 통교하였다 히였다. 즉, “508년 12월.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二年, 十二月 南海中耽羅人 初通百濟國).” 『일본서기』에서는 상당히 늦추어 잡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6, 문주왕 2년(476) 4월조에 “탐라국이 방물을 바쳤다”고 한 기록이 있고, 동성왕 20년(498) 8월조에도 탐라와의 관계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서기』의 508년 언급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비하여 때 늦은 기록이다. 508년은 백제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 8년이다. 그 시기에 탐라가 백제와 처음 통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 무령왕의 치적을 높이기 위한 꾸밈(修飾) 문장이다. 백제 무령왕은 462년에 일본 규슈 쓰쿠시(築紫) 북쪽 가카라시마(현, 일본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 북쪽 야산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백제 동성왕인데,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곤지왕자라 한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의하면 ‘주호(州胡)’ 곧 제주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육지를 왕래하며 무역한다고 하였다. 이 책은 190년~280년(90년)의 역사를 다룬 기록으로 편자인 서진의 진수(陳壽, 233~297)는 이 시대말을 살았다. 이 기록을 근거로 우리나라의 사학계 일각에서 “제주도는 김해의 본가야 사람들에 의해서 개척된 하나의 무역 중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주호’를 독자적으로 언급한 것을 보아 가야국의 무역중계지라기 보다는 둑자적인 해상무역국으로 보아야 한다. ‘주호’를 탐라국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호’로 기록하였는데, ‘주호’는 탐라국 이전의 제주에 있던 마한에 속한 해상국으로 볼 수도 있다. ‘주호’는 한때 마한의 맹주였던 신미제국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물론 탐라도 마한에 포함히고 있다. 그런데 중국측이 조선에 관하여 남긴 기록은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왜곡이 상당수 있다.
9. 맺음말 ; ‘제주사관’이 필요하다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 이래, ‘민족사관(民族史觀)’을 말한다. 제주에서도 제주의 역사관이 필요하다. 제주의 역사관을 ‘제주사관(濟州史觀)’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제주사관이란 무엇인가? 제주사관은 “제주사를 역사 주체로서 제주인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사관의 근간(根幹)은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 옛과 오늘(古今)의 제주사는 제주사관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하되, 제주사관은 공감대가 넓은 보편적 사관이어야 한다. 제주사관의 정립은 한반도에 심어진 모화주의 사대사관, 그리고 일제의 식민사관과 서구 중심의 신 식민지사관을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정립되어야 한다. 제주의 모화주의 사대사관의 핵심은 진시황 시대의 희대 사기꾼 서복(徐福. 徐市)의 설화이며, 서구 중심의 신 식민지사관이 뿌린 핵심은 4.3의 왜곡과 폄훼이다.
- 제주는 빙하기와 구석기시대에 한반도 및 중국과 연결되어 있었다(황해가 없었다). 그러나 바다가 해빙(解氷)되고 수위가 올라가자, 육지와 단절되었다. 제주의 구석기 유적을 남긴 사람들과 신석기 유적을 남긴 사람들은 연결되지 않는다.
- 제주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한반도의 전라남도 지역이고, 신석기 유적을 남긴 사람들이나 제주의 초기 문명시대 유적을 남긴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제주의 고대인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면, 한반도의 정치 및 역사 변동 시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찾아야 한다. 왜? 제주의 도래인을 한반도 인으로 보아야 하는가? 제주사관은 해류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을 우선 중시하여야 하며, 생물학적 유전자 검사 결과도 중시하여야 한다. 속칭 제주 ‘조랑말’은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 재래의 과하마(果下馬)이다.
- “삼성인이 어느 시대의 도래인이냐?”하는 것을 보기에 따라 제주도에는 최소 3개 이상의 부족국가가, 필자가 보기에는 적어도 7~8개의 부족국가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삼성혈(모흥혈) 說話는 철기시대의 강력한 도래인들이 자신들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만든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다. 제주 최고의 구비문학이 기록된 것으로, 그 문화인류학적 가치라든가 문학적 가치는 매우 높다.
- 기존의 제주사에서 탐라는 천여 년 이상을 존속하여 온 국가이다. 그러나 지금 탐라시대로 뭉뚱그려 말하는 탐라국 시대는 하나의 국가 시대로 보기에는 너무 길다. 우선, 양고부가 도래하여 장악한 시대 이전의 시대는 탐라국이라 할 수 없을 것이고, ‘주호’나 ‘탐라’ ‘탐모라’라는 것은 각기 별개의 정치세력을 말하는 것 일 수도 있다. 일도 이도 삼도에서 말하는 무리‘도(徒)’는 각 무리(부족국가)의 ‘도읍(都邑)’을 말한다. 일도동은 첫 무리 양을나 세력이, 이도동은 둘째 무리 고을나 세력이, 삼도동은 셋째 무리 부을나 세력이 지배하였던 곳이고, 일도 이도 삼도는 각기 무리가 장악한 부족국가의 명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양고부 삼성 부족은 제주에 도래한 이후, 연합한 후 세력을 키워 육지의 마한 세력으로 진출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제주인의 눈으로 본 제주의 주체적 역사관이다. 그렇게 볼 때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중시조 ‘양탕(良宕)’의 이야기는 실제적 사화(史話)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양탕’은 탐라 세 부족의 연합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제주의 삼성인 사화는 신화학(神話學)이나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 민속학(民俗學), 문학사(文學史), 문화사학(文化史學), 고고학(考古學)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역사학에서 삼성인 사화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여야 한다. 그러한 종합적인 고찰과 평가가 제주사관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외지에서 제주로 도래한 것도 중요하지만, 제주에서 외지로 출도한 세력의 활약도 중요하다. 거기서 ‘양탕(良宕)’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2025.01.13.)
주(註)
주1) 탐라국의 형성은 고인돌을 만든 청동기시대라기 보다는 철기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은 제주에 있던 고대국가의 명칭 ‘주호’가 AD 3세기의 저작물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또한 삼성인의 후손들의 한반도와 연결되는 활동이 AD 4~5세기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2)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丁謙曰, 州胡, 卽今之濟州無疑. 其人差短小校勘,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校勘, 好養牛及豬.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校勘. 乘船往來, 市買韓中校勘. 范書, 作乘船往來, 貨市韓中.”
주3) 『唐會要』는 북송의 왕부(王溥)가 송 태조 건륭2년(961년)에 찬한 책이다.
주4) “七十二國 / 通典云 朝鮮之遺民 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 後漢書云 西漢以朝鮮舊地 初置爲四郡 後置二府 法令漸煩 分爲七十八國 各萬戶 [馬韓在西 有五十四小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 稱國 卞韓在南 有十二小邑 各稱國]”
주5) 남원양씨 병부공파 홈피에서 인용.
http://www.yangsungji.com/skin/sub_page.php?page_idx=27
양을나의 후손은 제주에 있는 제주양씨와 출륙한 남원양씨로 크게 나뉜다. 그러나 모두 양을나의 후손이라는 혈연 의식으로 결속력은 강하다.
주6) 마한은 일본의 규슈(九州) 지역까지 포함하여야 한다.
주7) 남원양씨 문중의 주장을 인용. 양탕이 AD 373년에 양(良)을 양(梁)으로 사성을 받았다는 것, 양탕의 후예인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경덕왕 때에 남원군에 봉해지게 되면서 남원양씨의 관향을 고쳐 쓰게되었다는 것은 사실(史實)이다.
주8)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21년 12월에 “冬十二月 耽羅國太子末老來朝, 賜星主王子爵.”이라 하며 ‘말로(末老)’의 이름에 성씨(姓氏)를 붙여 기록하지 않았다. 고씨로서 성을 붙여 기록한 최고(最古)의 인물은 『고려사』 권98 「열전」 권제11에 나오는 고조기(高兆基, 1088~1157)로서 그는 말로(末老)의 손자이다.
주9) 백제 문주왕, 476년. 夏四月, 躭羅國獻方物, 王喜拜使者爲恩率.
주10) 백제 동성왕, 498년.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躭羅即躭牟羅.
주11) 신라 문무왕, 662년 2월 미상. 躭羅國主佐平徒冬音律 一作津. 來降. 躭羅自武徳以來, 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降爲屬國.
주12) 신라 문무왕, 679년 2월 미상. 二月, 發使略躭羅國.
주13) 신라 애장왕, 801년 10월 미상. 冬十月, 大寒, 松竹皆死. 躭羅國遣使朝貢.
주14)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 이 기록은 상당히 왜곡된 기록이다.
주15) 필자의 신조어(新造語). (2024.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