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공개]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日관헌자료...강덕상자료센터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2주기 기고 ②]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 센터장

2025-09-02     이규수

『진재에 따른 조선인과 지나인에 관한 범죄 및 보호 상황 기타 조사의 건』

조선인학살 문제는 일본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이해 사회민주당 대표 후쿠시마 미즈호 참의원은 관동대지진 당시 내무성 경보국장이 작성한 문서를 제시하면서, 당시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의 전파와 학살에 관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답변에 나선 경찰청 간부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입헌민주당 소속 스기오 히데야 참의원 역시 국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을 제대로 다룰 마지막 기회라며 진상 규명과 반성을 외면해 온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지만,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는 ‘모르쇠’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견해만 반복하는 셈이다.

강덕상자료센터는 조선인학살의 진실이 담긴 중요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일본 국회에서 소개된 자료의 원본이다. 일본의 역사 부정을 타파할 수 있는 귀한 사료다. 

『진재에 따른 조선인과 지나인에 관한 범죄 및 보호 상황 기타 조사의 건』표지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료명은 1923년 11월 21일에 작성된 『진재에 따른 조선인과 지나인에 관한 범죄 및 보호 상황 기타 조사의 건』(震災ニ伴フ朝鮮人並ニ支那人ニ関スル犯罪及ビ保護状況其他調査ノ件)이다. 이 문서는 야스코치 아사키치(安河內麻吉) 가나가와현 지사가 관동대지진 당시 현 내에서 일어난 조선인 살인 사건 등을 소노다 다다히코(園田忠彦)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내무성 경보국은 전국의 경찰을 지휘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일본의 경시청에 해당한다. 보고서는 조선인 살해 등 범행 시간과 장소, 범행의 동기⋅목적, 범죄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상정보를 정리했다. 군대와 경찰은 빠져 있고 민간인들인 자경단 중심의 범죄 사실이 적혀 있다.

이 자료는 내무성이 ‘조선인 문제(수용 보호, 조선인 범죄,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각 지방에 제출을 요청한 보고서다. 내무성의 전국 조사 기초 자료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각 지방에 유사한 조사 보고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이 자료뿐이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조사 내용이 처음으로 밝혀진 셈이다.

『진재에 따른 조선인과 지나인에 관한 범죄 및 보호 상황 기타 조사의 건』일본인의 조선인 살상사건 조사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관동대지진 당시 이 자료가 다루고 있는 가나가와현은 유언비어의 발생지로 학살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료 부족으로 조선인학살 기소 사건 2건만이 알려졌다. 이 자료는 가나가와현의 실태를 전달하는 첫 번째 공식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는 학살 사건을 실제보다 축소하거나 철저히 은폐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을 남기지 않고 학살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못했다. ‘불상사’로 분류해 조사 기록을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중 대부분은 ‘㊙’ 문서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았다. 조사하고 파악은 했지만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태도였다.

이 문서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평생 연구해 온 강덕상 선생이 소장한 것으로 자료의 가치는 매우 소중하다. 관동대지진 당시 가나가와현에서 조선인학살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하는 일본 정부의 ‘공문서’가 처음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조선인학살과 관련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해 온 일본 정부의 태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다. 

문서를 보면, 일본인이 조선인을 죽인 살인 사건은 9월 2~4일 사흘 동안 총 59건으로 모두 145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사건별로 조선인은 적게는 1명부터 많게는 7명까지 죽임을 당했다. 20대 남성이 가장 많았다. 이름이 적혀 있는 조선인은 차태숙(車泰淑) 등 14명이다.

차태숙은 34살 남성으로 9월 4일 오전 가나가와현 다치바나군(橘樹郡)에서 살해된 것으로 나와 있다. 범행 동기 및 목적은 “조선인이 범행을 저지른다는 선전(유언비어)을 오인해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결과”라고 적혀 있다. 범죄 사실에는 “요코하마 쪽에서 조선인이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가와사키를 습격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피해자 차씨가 자경단 근처에 나타났다. 범행 계획이 있다는 정보가 있었고, 차씨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예방 차원에서 살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차태숙을 죽인 가해자는 31살 남성으로 이름은 사쿠마 히사키치, 직업은 ‘인부’로 되어 있다.

2일 오후 가나가와에선 30대 초반의 조선인 7명이 한꺼번에 학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피해자의 이름은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직업이 토목 노동자로 기재되어 있다. 범행 동기는 비슷하다. 범행 사실에는 “조선인이 각종 범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있어 불안과 공포가 있었다. 자경단이 걸어가는 중에 피해자들(조선인 7명)을 만났다. 약간 수상한 태도를 보여 심문했다. 이상한 점이 있었고, 장래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어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을 ‘예방 차원’에서 무차별하게 학살한 것이다. 당시 학살이 조선인의 폭동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라는 왜곡된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자료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살상 사건의 기록이다. 이 조사가 이른바 조선인학살 사건이다. 사건은 59건으로 살인 57건 145명, 상해 2건 4명이다. 이 사건 가운데 43건이라는 압도적 다수가 요코하마시에서 일어났다. 다른 지역은 당시부터 현의 보고를 통해 밝혀졌는데, 대부분의 피해자 이름과 직업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요코하마는 43건으로 압도적 다수의 사건이지만, 이름이 밝혀진 것은 2건뿐이다.

우선 순서에 따라 살펴보자. 범죄의 일시와 장소는 명확하다. 장소는 번지까지 밝혀져 있고, 일시까지 기록되었다. 오전과 오후, 시간까지 밝힌 경우가 많다. 지금이라도 그 장소를 찾아가서 확인하면 당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다음으로 범죄의 동기다. 이는 모든 사건이 똑같다. “선인 범행의 소문을 잘못 믿어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 결과” 범행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범죄 사실은 조선인 범행이 잘못 와전되어 자경 중에 범죄를 감행했다고 판단해 학살했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요코하마의 경우 피해자의 주소는 거의 불명이다. 직업은 인부 모습, 막벌이 모습, 노동자 모습, 토공풍, 인부풍, 노동자풍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어 있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름도 거의 불명이다. 연령은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다른 지역은 대부분 이름과 직업을 파악할 수 있다.

죄명은 살인, 상해다. 검거자 수는 요코하마시에서는 이름, 주소, 직업도 거의 알 수 없다. 검거의 전말과 처분 결과는 수사 중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도 모른다는 의미다. 요코하마 이외의 지역은 명확히 파악하고 있지만, 왜 요코하마 지역은 연령과 직업 등은 파악했으면서 이름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 범죄의 목적이 모두 똑같은데, 살인이라면 전쟁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피해자와 검거자 수를 조사해야 한다. 왜 요코하마 지역만 명확하지 않은 것인가? 과연 이 사람들의 사망신고는 이루어졌을까? 고향에는 알렸을까? 만약 알렸다면 유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족을 쉽게 알 수 없는 것은 왜일까? 많은 의문이 남는다.

『관동대지진 정보 연습함대 군함 이와테 통신실 수신』

강덕상자료센터 소장 자료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로, 「관동대지진 정보 연습함대 군함 이와테 통신실 수신(関東大震災情報 練習艦隊軍艦磐手 電信室)」이라는 제목의 복사판 제작 소책자가 있다.

표지 뒷면에 “폐품/요코스카 진수부 도서관”이라는 고무 인장이 찍혀있으며, 해군의 요코스카(横須賀) 진수부 도서관(도서관)에 있던 것이 처분되어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쿄 신주쿠 구 신주쿠 시의 ‘신센도(泰川堂) 서점’ ‘1만 5,000엔’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취득 경위를 알 수 있다. 전신의 본문이 38페이지에 걸쳐 있으며, 그 안에 144건의 감청된 전신이 기록되어 있다.

관동대진재정보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이와테는 연습함대의 기함으로 지진 발생 당시 연습 항해에서 귀국 중이었고, 중국 산동 반도 해역을 항해 중이었다. 무선 통신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급속히 발전하여 보급된 새로운 장비였다. 일본 해군도 그 보급과 교육에 힘썼다는 것이 연습함대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훈련 항해 중에도 해당 훈련을 펼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과정에서 지진 관련 전보를 포착해 감청을 계속했고, 그 기록을 정리해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계엄군사령부가 펴낸 『계엄사령부 정보』도 소중하다. 이 자료에는 제1사단 사령부가 발행한 각종 포고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계엄군은 출동 이후 사태의 진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사태의 진정을 위한 군사작전을 비롯해 각종 정보도 취합했다. 이런 활동은 계엄사령부 정보로 정리되었다. 

이 자료에는 계엄 관련 각종 공문과 재향군인회 회보, 자경단 관련 정보, 지도, 신문 기사 등의 원본이 수록되고 있다. 삐라 중에는 독이 든 빵에 대한 검사 결과, 설사병 환자의 발생 건, 미국의 원조에 대한 정보, 계엄군의 결사 행동 등에 관한 자료 등이 포함되었다. 문건에는 사령부의 직인도 찍혀있다. 계엄군의 활동과 재향군인회의 움직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계엄사령부정보 표지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덕상자료센터는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1931~2021년)은 일본의 조선사 연구, 특히 근대사 연구의 초석을 쌓은 연구자다. 우방협회를 토대로 한 조선근대사료연구회의 활동을 비롯해 일본 사회에서 조선사 연구가 갖는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제시했다. 자료집 『현대사 자료』는 한국 역사학계에 소중한 사료를 제공한 대표적 업적이다.

강덕상의 삶은 재일조선인으로서 살아온 격투의 역사였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면서 근대사 연구에 매진했다. 연구 영역은 다양했다. 초기에는 경제사 관련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조선의 내재적 발전을 추적했고, 3⋅1운동 연구에서도 민족 대표 논쟁을 통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강덕상은 ‘시무의 역사’라는 문제의식을 널리 알렸다. 시무란 시대의 의무, 다시 말해서 지금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선생의 대표적 연구인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과 여운형 연구로 이어졌다.
강덕상 선생은 ‘재일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연구를 제시했다. 시무의 역사학이 추구하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이다. 

강덕상은 ‘사상이 없는 역사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인이 언급하지 않은 숨겨진 역사의 규명이 ‘재일사학’의 본령이라고 강조한다. 일본인이 다루지 않은 영역, 일본인이 피하고 싶어 하는 영역을 일본 역사학계에 제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역사 연구가 지닌 문제점과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2024년 2월, 동농문화재단(이사장 김선현)에서는 강덕상 선생의 유지와 업적을 계승하기 위해 강덕상자료센터(센터장 이규수)를 설립했다. 소장 자료는 니시키에 등의 다양하고 귀중한 자료와 700여 박스의 원자료・마이크로필름・단행본・자료집・팸플릿 등 약 10만 건에 이른다. 자료 중에는 강덕상 선생만이 소장한 유일본도 많다. 

강덕상자료센터는 앞으로 소장 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 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할 예정이다. 2025년 8월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기초자료사업에 선정되어, ‘비문자’ 사료의 DB화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자료 정리와 더불어 관련 연구도 심화하고, 다양한 학술회의와 시민강좌도 개설해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역동적인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장)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공은 동아시아 속의 한일 관계사며,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등을 역임했다.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으로 역사 문헌을 바탕으로 근대 일본과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상호 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