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하나 되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 밝혀내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2주기 기고 ①]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 센터장
지난 8월 23일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 방문에서 두 가지 의미있는 기록을 세웠다. 취임 후 미국에 앞서 일본과 먼저 정상회담을 한 것,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대한민국 정부가 하지 않았던 102년 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 전 현지 재일동포들과 만난 자리에서 "100년 전 아라카와 강변에서 벌어진 끔찍한 역사, 그리고 여전히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골의 넋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라카와 강변'은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이 자행된 곳 중 한군데인 도쿄 스미다구의 기네가와 다리(옛 요츠기 다리) 아래 둔치를 말한다. 60년이나 지난 1982년 처음으로 유골발굴 작업이 그곳에서 이루어졌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현장에서 학살을 면한 조인승(曺仁承) 할아버지의 증언이 다큐멘터리를 찍던 오충공 감독의 카메라에 담겨 '숨겨진 발톱자국'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 대통령이 이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토대를 강화'하자는 제안이 석연치 않다는 반응이 나오는 건 여전히 '진실에 기초한 역사정의'가 확고부동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성과 야만성, 그 민낯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일본정부는 '정부내에서도 그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남북이 공동으로, 재일조선인사회, 그리고 일본 시민사회와 함께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 센터장의 기고를 2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2025년 9월 1일은 관동(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이 일어난 지 102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억하는 일은 그저 숫자만을 기억하자는 이벤트가 아니다. 100년 전 일로 일본 정부의 무릎을 꿇게 하거나 정치적 논란을 일으켜 일본을 역사적 가해자로 못 박자는 일도 아니다.
조선인학살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직시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야만 행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기억하자는 제안이다.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여, 역사적 죽음으로부터 억울함을 걷어내는 일이 절실하다.
그동안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연구가 축적되었다. 이 작업은 일본 사회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차별과 배외주의를 뛰어넘어 자신의 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숨겨진 자료의 발굴, 학살의 실태 조사와 유골 발굴, 추모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이어졌다. 재일조선인과 양심적인 일본인 연구자들은 시민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밝혀 온 것이다.
조선인학살의 진실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40주년을 맞이한 1963년 무렵이었다.
자료집으로는 강덕상(姜徳相)과 금병동(琴秉洞)이 편찬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과 조선대학교가 편찬한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학살의 진상과 실태』가 간행되었다. 이들 자료집은 재일조선인의 노력과 끈기로 이루어진 소중한 성과로 일본 사회에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계기였다. 강덕상의 말을 빌면, 그것은 ‘시무(時務)’, 즉 역사가가 담당해야 할 시대의 책무였다.
자료집을 토대로 학살의 실태를 밝히는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심에는 강덕상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강덕상은 “조선인학살은 일본 관민이 하나가 된 범죄이고, 민중이 동원되어 직접 학살에 가담한 민족적 범죄이자 국제 문제다.” 라며 조선인학살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가 출동했는가? 강덕상은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계엄령을 조선의 민족 해방 투쟁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선인학살은 계엄령 아래 자행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을 제시한 것이다.
조선인의 체험담과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활동도 이어졌다. 이를 주도한 것은 일조협회(日朝協會)였다. 1963년에 ‘일조협회 조선인 희생자 조사 위령 특별위원회’가 발족되어, 관동 지방 일원의 현장을 조사했다. 일조협회는 1973년에 도쿄와 사이타마현(埼玉県)에서 학살의 목격자를 취재한 기록집을 간행했다. 치바현(千葉県)에서도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과 관련 시민 단체 등은 각종 조사 보고서를 간행했다. 조선인학살의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진상 규명과 추모 운동의 성과는 공식적인 추도식 행사로 이어졌다. 관동대지진 50주년이던 1973년 도쿄도 의회의 찬성으로 ‘위령 공원’으로 불리는 스미다구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에서 공식적으로 추모행사가 열렸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자 추도비’가 세워졌고, 비석에는 “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자”는 글귀가 새겨졌다. 조선인학살을 밝히려는 재일조선인과 일본 시민 단체의 치열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한편, 최근 일본에서는 역사 부정론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관동대지진 진상 규명 운동의 성과를 무력화시키려는 돌출 행동이 빈번해졌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관동대지진 당시 6천여 명이라는 조선인 희생자는 과장된 것이고, 설령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해도 정당한 방어 행위였다고 강변한다. 이들의 논리를 반영하여,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는 2017년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식전’에 추도사를 보내는 일조차 거절했다. 식민지 지배 행위 자체를 부정하려는 네오내셔널리즘과 연동하여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려는 이런 움직임은 관동대지진 사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인학살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동시에 조선 민중의 해방 투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학살과 식민지 지배, 민족 해방 투쟁의 고양은 명확한 인과 관계로 맺어졌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던 일본인이 강력한 적인 조선 민중을 두려워한 데서 발생한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다. 한일 간의 부조리한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돌출한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을 규명하기 위해 여전히 많은 시대적 과제가 남아 있다. 연구의 심화와 함께 다양한 활동이 요청된다. 한일 간의 역사 문제를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조선인학살이라는 야만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승할 것인가? 바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조선인학살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착수하지도 않았고, 일본 정부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해 외롭지만 꾸준하고도 힘 있게 문제를 제기해 온 재일조선인과 양심적인 일본인의 운동을 거울삼아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1923년 9월 1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한일 간의 역사적 화해를 위한 첫걸음이다. 앞으로 한국은 물론 북한도 이 작업에 동참하여 한반도 전체가 하나 되어 일본 정부에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학살당한 6천여 조선인의 죽음을 그냥 묻어두는 일은 또 다른 역사적 범죄이기 때문이다. 남북한과 재일조선인 사회, 그리고 일본 시민사회의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공은 동아시아 속의 한일 관계사며,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등을 역임했다.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으로 역사 문헌을 바탕으로 근대 일본과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상호 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