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넷째 이야기,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1)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68)

2025-08-30     정해랑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삽화-백소(白笑)]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이제 광복의 그 순간에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 매우 어린 나이였던 사람들일 뿐이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광복은 미완의 광복이다.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분단이 되었고, 그것이 파생시킨 전쟁 위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매국행위를 했던 자들의 후예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당장 ‘광복’이란 말이 맞느냐 에서부터 논란이 있었다. ‘해방’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부터 광복도 해방도 된 적이 없고, 식민지의 연장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주장은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므로 일단 무시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광복이 맞느냐는 진보적인 사람들 속에서 계속 이야기됐던 것 같다.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이런 논의가 굉장히 무성했었다.

신돌석씨는 지금도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서로 싸울 정도로 논란을 벌일 문제인가 생각한다. 당시 골방에서 학생 출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골치가 아팠었다. 그 중 지금 의미 있게 새겨들을 말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논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광복’은 부르주아식 표현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1930년대 만주와 조선 북부에서 있었던 무장단체인 ‘조국광복회’에 대해 듣고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신돌석씨에게 광복절 하면 떠오르는 것이 꽃전차이다. 광복절이 되면 꽃으로 치장한 전차를 보러 전차 종점에 갔었다. 신돌석씨가 살던 동네인 망태산에서 전차 종점은 걸어서 10여 분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덜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에는 꽤 먼 길이라고 여겨졌다. 아무튼 그래도 이웃 동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놀러 가는 곳이었다. 꽃전차가 종점으로 들어오면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곤 했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날이라는 것만 알았다. 일본놈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못된 인간들 보면 나까무라상, 다나까상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사람들이 예의 바르고, 물건도 잘 만든다고 이따금씩 말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놈들은 분열만 좋아하고 두들겨 패야 정신을 차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무엇이 맞는지 헷갈렸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광복절은 노는 날이었지만 방학 때였으므로 신돌석씨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이 되면 학교에서 소집을 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별로 학교에 흥미가 없었고, 불량학생까지는 아니어도 모범생도 아니었던 신돌석씨는 거의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온 같은 반 친구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 말이 담임 선생님이 오늘 안 온 사람은 사회 점수를 10점씩 깎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딱 한 해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마도 1968년이었다. 그 해에 광복절 임시소집에 가서 광복절 노래를 배웠다. 담임 선생님이 풍금을 치면서 가르쳐 준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로 시작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괜히 가슴이 뛰는 듯한 느낌을 가졌었다. 그때 선생님은 이어지는 대목을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가난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잘 산다’ 그러면서 한숨을 쉬었었다.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괜히 화가 났다.

이어지는 대목은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였다. 얼마 전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 말을 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신돌석씨 생각에 만만치 않은 과제라고 여겨졌다. 그때 선생님은 특별히 진보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튼 그 선생님이 좋았다. 신돌석씨의 선생님들 중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선생님이다. 유명한 방송 작가와 탤런트 이름과 같아서 더욱 기억되었다.

1968년은 광복이 된 해로부터 고작 23년이 지난 뒤이다. 아마도 그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도 많이 살아계셨을 것이다. 그 부모, 조부모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도 팔팔하게 활동했을 시기이다. 그때를 제대로 파악한 분들은 이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서훈을 받고 예우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그 뒤로도 한참 지난 뒤라고 한다. 물론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삽화-백소(白笑)]

이 해를 생각하면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이른바 68혁명이 떠오른다. 신돌석씨는 이것을 강조하는 사람만 보면 한 마디로 웃긴다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를 경험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과 그 후손이 설쳐대는 세상, 그들이 독재를 강화하던 시기에 무슨 혁명이냐? 그것이 없어서 우리가 문제라는 주장을 버젓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유럽의 경험을 교조화해서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는 것에 정말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야 그 사람 자유라고 여겨지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 때 깜짝 놀라게 된다. 신돌석씨 주변에서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천연덕스럽게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진짜 그것이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신돌석씨는 제국주의였던 나라들과 식민지 경험을 하고 그 유산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나라를 동일하게 보는 것에 대해서는 단연코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광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래서 정말 중요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광복절이 왔다.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하게 된 이후 40년이 되었으니, 1/3 이상의 광복절은 아무 생각 없이, 나머지는 자기 나름대로 고민을 하면서 보낸 셈이다. 올해도 8.15대회를 한다. 그 동안 광복절 때마다 범민족대회, 범국민대회, 범시민대회 등의 이름이 달린 대회를 했다. 올해는 80주년에 정권도 새로 출범하니 당연히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다.

신돌석씨가 경복궁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8.15범시민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대회가 경복궁역 부근에서 열리기 때문에 거기서 내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회 장소에 가려면 1호선이나 2호선을 타고 시청역으로 가는 것이 빨랐다. 그런데도 굳이 경복궁역으로 간 것은 거기서부터 광화문 전체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기 위해서였다. 원래 범시민대회는 탄핵시위의 중심이었던 동십자각 부근에서 열리기로 했다고 들었다.

신돌석씨는 그 논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범시민대회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주로 이전에 비상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단체들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돌석씨 지역에서는 최미숙이 다른 단체의 대표로 참여해서 여러 정황을 전달해 주곤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동십자각을 중심으로 북광장에서 범시민대회를 여는데 이전과는 달리 낮이 아니라 밤에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위해 1박2일로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였다.

1박2일은 공식 논의는 아닌 듯한데 이전에는 그렇게 한 적이 많이 있었다. 신돌석씨도 8.15범민족대회를 한다고 해서 참여해서 밤을 꼬박 새운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는 대체로 대학교 내에서 집회를 했고, 경찰들이 주위를 둘러싸거나 심지어 침탈을 해서 피하거나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 정권도 바뀌고, 동력도 떨어지면서 사라졌던 1박2일 투쟁이 다시 등장하자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신나게 집회를 해보리라는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저녁 집회는 광화문에서 하고 밤 10시부터 장소를 이동해서 여의도에 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갸우뚱해졌다. 지금 그렇게 해서 여의도 집회를 규모 있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공식 논의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 이야기는 흐지부지 된 것 같다. 그리고는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광화문에서 정부가 행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에서 국민이 대통령을 임명하는 행사를 치르겠다고 했다고 한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른바 대통령에 대한 국민임명식인데 광복 80주년에 맞추어 국민 80명을 각계각층에서 선발해서 그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준다는 발상이었다. 누가 생각했는지 몰라도 일단 그럴 듯하게 보이기는 하였다. 저녁 8시에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범시민대회는 거기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혹시 미리 이야기라도 되었느냐고 최미숙에게 물어 봤는데, 자기도 모르지만 아마 정부가 일방적으로 하겠다고 한 것인 모양이라고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이 이야기를 듣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봤다. 국민 80명을 광장에서 싸웠던 사람들 중심으로, 아니 중심은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참여시킨다면 그야말로 멋진 행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한 바람이었다. 정부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광복절이 되면 범민족 혹은 범국민대회가 있어 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아무런 논의도 없이 의도적인지 아니면 모르고 그랬는지 무시하고 자기들 행사만을 생각한 것이었다.

일단 추진위는 장소를 숭례문 쪽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여기저기서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대규모 행사를 하고 국민들 관심도 그쪽으로 쏠릴 텐데 독자적인 집회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시간을 조절해서 우리가 행사를 하고 거기에 합류하는 것은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추진위는 우리들만의 행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도 미련이 있는 사람들은 행진을 통해 그 대회장에 들어가고 거기 참여한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어떠냐는 의견도 제시했다. 하지만 정부 측이 일단 그것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경찰은 미국대사관은 물론이고 일본대사관 앞까지도 행진을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래서 송현광장까지만 가기로 했다고 한다. 일본대사관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정부 대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지 아리송하였다.

아직 시간이 안 되어서 그런지 광화문 일대는 조용했다.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은 극우집회가 12시경에 광화문에서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이들이 정부 대회를 방해하려고 하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네거리 쪽으로 가서 원표공원을 지나갔는데 태극기와 성조기 깃발을 든 노인들 몇 무리가 삼삼오오 벤치에 걸터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미 집회는 끝난 것 같고 정부 대회를 훼방 놓는다든지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경복궁에서부터 광화문을 가로질러 최미숙이 말한 대로 시청역 8번 출구를 지나서 가니 숭례문이 바라보이는 곳 앞에 대형스크린이 보였고, 사전대회로 노동자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는 길에 부스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걸어가는 도중에 자신들 조직의 기관지를 열심히 나눠 주고 판매하는 이들도 역시 있었다. 신돌석씨는 아주 오래 전에 집회마다 참여해서 유인물을 돌리던 생각이 났다. 의지는 높이 평가하지만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오른쪽으로도 부스가 죽 설치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곳에 최미숙이 앉아 있었다. 올해 여대 두 군데에서 민주동문회가 창립되었다고 하는데, 한 대학은 작년부터 지금까지 학교와 투쟁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유인물을 받고 서명을 해달라고 해서 했다. 최미숙이 그 대학 출신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고, 연대 활동을 통해 아는 동지들이라고 하였다. 바로 옆 부스에서는 탄핵시기의 활동을 쓴 책을 판매하고 있었다. 신돌석씨도 한 권을 샀다.

신돌석씨는 무대 뒤쪽으로 걸어가서 길을 건넜다. 반대쪽 상황도 보기 위해서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집회는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집회 인원은 탄핵시기보다는 적었다. 숭례문 앞 도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시청역 8번 출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대부분 민주노총 옷을 입은 조합원들이었다. 사이사이에 시민단체, 진보정당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집회 참가 인원이 줄어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윤석열의 내란 기도를 분쇄했고, 정권을 교체시켰다. 사람들이 언제나 광장에서 싸우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집회 인원이 줄어들어서 큰일 났다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정도 인원이라도 모이는 것은 진보진영 혹은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확고한 세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6시 반부터 기수단 입장이 있고, 7시에 집회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시청역 8번 출구 앞에 기수단이 모이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들의 깃발들도 뒤로 왔다. 많은 시민단체, 진보정당, 민주동문회 등의 깃발들이 속속 모였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깃발을 들고 행진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머리가 허연 사람들이 기수로 행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신돌석씨가 속한 단체의 깃발은 김민호가 들고 있었다. 환갑은 아직 안 되었어도 거의 육박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