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 강명희, 재일 조선민족음악 한길에서 이룬 기적

[기고] 재일 민족악기중주단 ‘민악’ 강명희 단장의 은퇴에 부쳐 - 이철주

2025-08-27     이철주

이철주 문화기획자

 

유명 소해금 연주자이자 재일 최고의 민족악기중주단인 ‘민악(民樂)’의 강명희 단장이 은퇴를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 17일 기념 연주회에서 연주 중인 강명희 단장. [사진 – 김일태 재일 사진작가]

재일 조선민족 음악계의 거목이 은퇴를 발표했다. 유명 소해금 연주자이자 재일 최고의 민족악기중주단인 ‘민악(民樂)’의 강명희(1957년) 단장이 35년의 민악 생활을 마감하면서 아름다운 마침을 선언한 것이다.

지난 2025년 8월 17일(일) 동경 TOPPAN홀에서 민족악기중주단 민악의 특별한 기념 연주회가 열렸다. 1990년 3월 창단을 하여 그해 12월 첫 연주회를 한 이래로 35년 만이다. 순수한 민간 단체로 매 5년마다 정규 연주회를 개최하고 역시 매 기간마다 기념 음반을 출시해 온 저력이 그대로 드러난 공연이었다.

1960년대 만들어진 합주곡 <목련못의 전설>을 프롤로그로 시작한 공연의 첫 곡은 1974년 리석이 작곡한 유명한 무용음악 <풍년맞이>. 이어서 금강산가극단 소속의 공훈배우 이문기의 장새납 독주 <만경대의 봄>이 대동강가의 만경대의 화창한 봄날처럼 경쾌하고도 화려하게 연주가 되었다.

오랜 기간 연주가 양성소 역할을 한 민악 출신의 대표적인 스타 연주가인 이미향의 연주가 뒤를 이었다. 재일 조선학교 시절부터 탁월한 소(4현)해금 연주자로 재능을 보인 이미향은 지금은 전통악기인 (2현)해금 연주가로서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발랄하고 화려하기까지 한 지영희류 해금의 흐트러진 소리(산조)를 멋스럽게 들려주었다.

민족악기의 인기 연주자들을 앞에 배치한 것은 바로 민악의 연주로 본 공연의 취지를 살리겠다는 의도가 반영이 된 듯 본격적으로 실내악 특유의 섬세함과 치밀한 구성으로 마치 악기들이 대화하듯 연주가 이어졌다.

고은 시인의 <세노야 세노야>를 시작으로, 수많은 (소)해금 연주가를 양성한 평양음악대학의 한남용 교수가 편곡한 <도라지> 독주곡이 소해금 5중주곡으로 연주가 되었고, 조선(북)의 대표적인 민요 명곡인 <용강기나리>가 중주로 연주가 되었다.

공연 포스터. [사진 – 김일태 재일 사진작가]

대미를 장식한 것은 중주단과 출연진 전원이 참가한 합주인 <키춤>과 <바다의 노래>였다. <키춤>은 1972년 선보인 혁명가극 <피바다>에 삽입된 무용곡으로, 이 무용은 조선(북)의 4대 명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작으로도 유명하다. <바다의 노래>는 강원도의 노동요인 <뱃노래>가 원곡인데, 1957년에 <배노래>로 1차 개작후 1978년 추가 개작을 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로 메기고 받으면서 흥겹게 흐르는 선율의 역동성으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최근 한국에서 <꽃이 피다> 앨범을 출시한 소해금 연주자인 량성희도 공연을 관람하고“출연자 모두 음악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서로 같은 방향으로 음악을 만들어 나가자는 하나된 마음이 연주에 드러나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민악 공연에서 ‘악기 소개’ 코너는 많이 봤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강 선생님께서 소해금 주법에 대한 해설을 특별히 강연해주셔서 인상이 깊었습니다. 동시에 강 선생님의 솔로 연주도 들을 수가 있어서 특별함을 느꼈습니다”라며 “조선 민족음악 보급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오신 강 선생님에게 깊은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소회를 전하였다.

이번 기념 연주회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조선민족악기의 꽃인 ‘소해금’이다. 음역대에 따라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의 소리가 나는 매력적인 악기로, 민족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서양 클래식에서 바이올린의 인기가 많은 것처럼 ‘조선 클래식’에서도 소해금의 인기는 대단하다.

조선(북)에서는 1960년대부터 악기 개량이 시작되었다. 음량과 음정의 확대, 원할한 연주(legato)와 튕기는 연주(Pizzicato)의 해결, 보다 섬세한 연주와 보다 맑고 아름다운 음색 등을 위해 3현으로 바뀌었고, 최종적으로는 4현 악기로 1980년대에 완성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조선(북)에서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가 깃들어 있는 전통적인 민족악기인 해금을 오늘의 시대적 미감에 맞게 새롭게 개량한 해금속 악기들 중 하나"라고 소해금을 소개하고 있다. 국영 매체인 <조선의 오늘>에서는 “본래의 해금은 부드럽고 우아한 민족 고유의 뚜렷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지만 악기 자체의 기능과 주법상 결함도 있었다”며 “이러한 해금이 소해금, 중해금, 대해금, 저해금의 해금속 악기로 개량 발전됐다”고 적고 있다. 또 “개량 완성된 해금속 악기들은 발음 원리와 연주법, 표현 능력에서 관현악의 바탕을 이룰 수 있는 온갖 조건을 원만히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적 정서의 그 어떤 섬세한 표현도 훌륭히 살려낼 수 있다”며 “소해금은 고음 악기로서 민족적 정서가 풍기는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연주법이 매우 다양하고 형상력이 풍부하다”고 밝히고 있다.

소해금의 발전에 절대적인 공로자는 바로 “소해금 연주가의 으뜸이다”라고 평가받은 ‘국보적’ 연주가인 인민배우 신률이다. 5살 어린 시절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문해 13세에 소해금으로 전환, 신동이자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해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다. 18살에 이미 개인 독주회를 개최하기도 한 그는, 당시 악기 개량화 사업으로 소해금의 개량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한남용과 함께 소해금 발전에 주력했다. <청춘도시 평양에로>(1986)로 알려진 작곡과 학과장이던 김덕모가 주도한 혁명가극 ‘피바다’의 기악곡 창작 및 연주에서 ‘피바다가’ ‘울지마라 을남아’ 등에 참여했다. 1980년경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 후 만수대예술단에 발탁이 되어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 이후 피바다가극단에서 작곡과 연주를 병행하면서 관현악단 악장으로 재임하였고, 2015년부터 평양음대 교수로 재직 후 현재는 퇴직하여 작품 창작과 저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또 한 명의 공로자는 한남용이다. 1961년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부에 입학하여 민족음악을 전공. 1969년 11월부터 민족음악학부 해금 교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기악학부 학부장을 역임. 해금 전문가와 음악이론가로 활동하면서 대표적인 저서로 『해금교측본』,『해금연주법』등을 남겼다. 그리고 작곡가로서도 해금 독주곡 <방목공의 붉은 마음>, 소해금 독주곡 <우리의 동해는 좋기도 하지>, 소해금 협주곡 <세월아 가지 말아> 등을 창작해 해금 연주와 해금 교육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 소해금이 조국(북)에서 재일로 다수의 민족악기와 함께 전달이 되었다. 정확히 59년 전의 일이다. 당연히 그 주류에는 금강산가극단 기악부 소해금 연주자들이 있었다. 김정진(작고), 황강성, 강명희, 김정화, 현경혜(2.16예술상 수상), 윤혜경(2.16예술상 수상), 하명수, 김명순, 권미설, 최경주, 량성희(2.16예술상 수상), 리사애, 오향애, 김선아, 안희순, 류명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강명희 단장은 소해금을 비롯한 재일 민족음악 연주와 기록 등 발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 – 김일태 재일 사진작가]

조국(북)의 민족악기 전달식 현장에 학생으로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소해금 연주가로 활동을 시작한 강명희의 역할은 소해금을 비롯한 재일 민족음악 연주와 기록 등 발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강명희는 도쿄 조선제1초중급학교를 거쳐 도쿄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를 졸업 후 조선대학교 사범교육학부(현 교육학부) 음악과 1기생으로 소해금을 전공했다. 그녀는 1990년 3월 ‘민악’(民樂)을 창단하였다. 금강산가극단에서 소해금 연주자로 8년간 활동한 강명희 단장이 금강산가극단 출신을 중심으로 중주단을 만든 것이다. 창단 당시 단원은 16명. 현재 민악 단원은 30여 명 정도 활동하고 있다. 그간 민악을 거쳐 가거나 양성한 민족악기 연주자들이 1,500명에 달한다.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2000년 7월 서울동포예술제에서 초청을 받아 출연을 하였고, 2013년 10월에는 필자가 기획 주관한 ‘성동겨레의 소리’ 축제에 이미향 등 단원 일부가 출연을 하였다. 2018년에는 국립국악원 초청으로 내한 공연이 확정되어 좌석까지 매진된 상태에서, 한국으로의 입국 하루 전에 당사자 간에 합의한 출연 계약도 무시하고 이루어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의 제동으로 공연이 취소가 되기도 하였다.

민악을 거쳐간 수많은 아티스트 중에 걸출한 세 명의 연주가가 한국과 큰 인연을 맺고 있다. 1994년 재일조선학생예술경연대회에서 소해금 독주 금상을 받은 이미향은 현재 전통 해금 연주자로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산가극단 출신의 가야금 연주가인 박순아는 한국에서 KBS국악대상(2021) 연주현악상을 받을 만큼 인정받는 정상급 연주가로 활약을 하고 있다.

금강산가극단 출신의 단소 연주가인 이동신도 마찬가지. 동경 출생의 그는 조선학교에서 단소를 배우기 시작해 평양음악대학에서 전동환 선생을 사사했다.

한국에서 출시한 그의 <북한 단소산조> 음반은 잊혀졌던 전용선과 최옥삼 명인의 산조 가락을 담고 있어서 의미가 크다. 이들은 남북을 오가며 조선(북) 음악과 한국의 전통음악을 소개하는 오작교가 되고 있으며, 일본과 세계를 향해 조선(한) 민족의 음악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가 외면하는 동안 조선(북) 정부의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에 대한 재일사회에 대한 지원은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는 ‘생명수’와 다르지 않았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민족권을 수호해야 하는 절박한 시절에 민족악기는 버팀목이었고 민족음악은 “대를 이어” 가는 혼이나 다름이 없었다. 강명희 단장 역시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가장 먼저 민족음악을 접한 후 깊은 애정과 신념으로 소해금과 민족음악을 올곧게 지켜온 지도자이다. 변변한 지원도 없어 부업 등으로 버텨내며 오로지 본인의 강고한 의지와 투철한 사명감으로 35년간 흔들리지 않고 민악을 지켜온 강철같은 혁명가였다.

결국 한 사람의 35년의 희생과 헌신으로 재일 최고의 민간 중주단인 민악은 한 세대를 뛰어 넘어 생존을 하였고, 지금은 새로운 세대들이 힘을 모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각오를 밝히고 있다. 민악에 온 삶을 갈아 넣은 강명희 단장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항일투쟁 시기 험난한 역경도 맞받아 뚫고 나가는 조선혁명의 불굴의 정신인 “백두의 칼바람 정신으로” 재일 조선민족 음악의 개척자의 길에서 후대들을 위해 큰 족적을 남긴 그녀의 불굴의 삶은 마땅히 민족음악사에 기록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아티스트 강명희 단장의 삶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여, 아름답게 떠나는 그녀의 여생이 이제는 평온하리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