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서 수집 50년 이야기(1) - 족보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28)
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1975년 6월, 생일 용돈으로 내가 수집한 첫 번째 고서는 목판으로 찍은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 초판본 2책이다. 인쇄 상태로 보아 거의 초쇄본에 가까웠다. 이 고본을 당시 인사동에 있는 고서점 문고당(사장 박찬익)에서 10만 원에 매입한 후 30여 년간 소중히 보관했지만, 2007~8년경 내가 서울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임의로 가져갔다. 절도 당한 것이다. 이것은 내 삶을 시작을 빼앗기고 부정당한 첫 번째 일이다. 이제 고서 수집의 지난 50년간을 결산하는 측면에서 ‘나의 고서 수집 50년 이야기(1) - 족보’를 일부 적는다.
1. KBS 한국방송사업단과의 사업
1982년 KBS(사장 이원홍)에서는 [풍운(風雲)]이라는 역사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방송이 끝나면서 1982년 KBS의 자회사 한국방송사업단(사장 이덕주)에서는 역사 드라마 [풍운]의 후속 작업으로 문화재 관련 전시 [풍운(風雲) - 한말 유물자료전]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미 80년대 초반에 고서수집가들 사이에서 족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마니아로 널리 알려져 있던 나에게 한국방송사업단에서는 자문을 요구하였고, 전시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변을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주었다. 나는 이 행사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진행위원으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982년 10월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1983년 1월 7일부터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 전시실 전체를 사용하는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2개월) 동안 준비한 이 전시는 매우 구성이 치밀하고 많은 자료들을 전시한, 역대급의 전시로 첫 손가락에 꼽히고 있다.1)
당시 월간 [방송]에서는 중요 전시물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소개 기사를 청탁하였다. KBS의 공신력에 의하여 이 전시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켰고, 당시 발생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독립기념관을 만드는 계기를 갖게 된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국편위)의 최창규 위원장과 최근영 이현희 박사 등등이 이 전시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많은 관심을 가지고 KBS로 찾아왔다. 국편위가 이 전시의 구성을 모방(벤치마킹)한 것이 독립기념관의 전시 내용 설계안이다.
이 [풍운(風雲) - 한말의 유물자료전]으로부터 1994년 서울정도 600년 자료전까지 10여 년간 나는 KBS가 주최하고 한국방송사업단이 주관하는 여러 문화재 관련 전시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거나 진행위원으로 참여한다.
2. [매일경제], ‘서화 골동 야화’ <30> - 연일정씨 [대종보(大宗譜)]
1983년초, KBS 전시를 계기로 하여 [매일경제] 문화부 김 모 기자는 내게 ‘서화 골동 야화’ 난의 원고 청탁을 한다. 지금 나의 이름 석 자와 ‘족보학’이라는 단어를 결합하여 구글에서 검색하면, 1983년 4월 9일자 [매일경제] 신문에 기고했던 글 한 편이 나온다.2) 42년 전의 글이고, 당시 김 모 기자가 내 원고를 일부 고쳤던 기억이 나지만, 이제 다시 읽어 보니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 나는 28세의 청년이었지만, 족보 수집에 관해서는 벌써 큰소리하였던 것 같다. 그 기사의 저작권자로서 맞춤법과 오타, 당시 기자가 임의 수정한 것을 바로잡아 여기에 전재한다. 1983년 4월 9일 자, 이 기사를 보면, 내가 [대종보]를 발견 시기는 1981년 5월이다.3)
[자료1]
- 서화 골동 야화 <30> 연일정씨 대종보 - 입력 : 1983-04-09 20:56:59
4백여년 뛰어넘는 일가의 생명력 - 멸실 일보직전 쓰레기 속에서 찾아내 – 정 송강도 기록돼…후손들 ‘팔라’에 진땀 / 이양재 <고서수집가·인물사연구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왕대종록」으로 고려 의종(1124~1170)때 김관의가 편찬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족보로 가장 오래된 것은 「안동권씨성화보」로 1476년에 간행됐다. 성화보가 현존한다는 사실도 불과 3년전에 확인된 것인데 지금은 서울대학교에 소장돼있다. 그것도 문종에서는 알지못하는 새에 사라진 족보가 이를 갖고있던 개인이 서울대에 기증하면서 밝혀진 것으로 문중엔 알리지도 않고 단독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성화보 초간 원본은 서울대 소장품 외에 2질이 더 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족보가 기록화되기 시작한것은 고려말부터. 그이전까지는 대개 구전으로 기억력에 의존해 오던 것이 이때부터 기록으로 남기 시작했다고 한다. 족보를 기록하는 것은 개인의 일이었지만 정부의 보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족보를 만들기 위해 공금을 유용했을 경우엔 법이 묵인해 줬을 정도였지만 족보가 위보인 경우엔 상당한 형벌이 가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 이후로부터 위조된 족보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돈을 주고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로까지 발전했다. 이렇게 그 계보를 마음대로 갖다붙인 족보들은 성화보나 대종보와 비교해 보면 그 거짓이 다 밝혀지는데 이 둘은 그 연대가 오래됐을 뿐 아니라 친족·외족까지를 아주 상세히 기록해 왔기 때문이다. 갖고 있는 수집품들이 인물사와 인맥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족보 방목 문집 등이 주류를 이루는 바, 필자가 소장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가 1545년경 연일정씨 감무공파 집안에서 필사한 대종보 원본이다. 연일정씨 감무공파 집안에서 첫번째 족보라 주장하는 것이 임진란 후의 것이고 보면, 이 대종보는 그보다 2백년이나 더 앞서 편찬된 것이다.
이 대종보를 구입한 것은 81년 5월경 청계천8가 중앙시장의 골동가게에서 였다. 목기와 고서를 취급하는 그 가게는 고서를 대량으로 구입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목기를 만든 후 옛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헌책들을 목기의 안 쪽과 뒷 부분에 바르기 때문이다. 이 대종보는 주인이 비교적 깨끗하고 귀하다고 보이는 책들을 고르고 남긴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한 것이다. 폐지더미에서 귀중한 서적을 발견한 경험이 더러있어 그 무더기를 뒤지던 중 이책을 발견했을 땐 책 자체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느꼈다.
목기 수리점 사장에게 “얼마에 파실겁니까?”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2천원만 줘”하기에 두말하지 않고 돈을 지불하였다. 말이 쓰레기지 귀중한 선본이다. 완전히 한장 한장 찢겨 장롱속이나 뒷변에 붙여지기 일보 직전에 소중한 문화유산을 구한 셈이다. 고서들은 대개 시골서 구입해 오는 사람들이 쓸 만한 것들은 우선 개인적으로 수장가들에게 넘기고, 그 다음 처분 안 된 것들이 인사동으로 나오는데 일단 인사동으로 나오면 값이 상당히 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이 관당 파지 가격으로 일반적인 고서점이나 헌책방 등에서 팔리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쓸만한 것들이 가려지고, 남는 것이 장롱이나 목기 등의 뒷면에 붙여지는 것이다.
귀중한 문화재를 멸실의 위기에서 구했다는 기쁨에 서지학자 안춘근씨에게 “다 떨어져 너덜거려도 그토록 예쁘고 귀여울 수가 없어 정이 쏟아지는 책”이라 했더니 “아 여자가 예쁘지 다 떨어진 헌책이 뭐가 예뻐”하면서 “책에 최면술 걸렸구먼”하기에 웃기도 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아들 딸 구분없이 출생순으로(여자는 남편이름으로) 기록했다는 점, 둘째 외손이 상세히 기록됐고 셋째 성과 휘(이름), 관직만이 간단히 기록된 것은 다른 족보와 같으나 반드시 성을 휘 앞에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일정씨의 외손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여기서 찾을 수 있어 이런 이유로 해서 연일정씨 족보로 하지않고 대종보라 한 것 같다. 특히 이 필사본에서 송강 정철이 10살경까지 ‘발’이라는 아명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처음 발견하게 됐다.
내가 특히나 족보를 수집하게 된 것은 인사동 모 서점에서 외국인이 헐값으로 귀중한 초간보를 몰아가던 것을 목격한 후부터였다. 이젠 초간보만은 국내서 거의 독주하다시피 할 정도로 수집했다. 특히 한국의 고족보 값은 내가 수집하면서 올려놓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상의 [매일경제] 기고 후, 나는 KBS 한국방송사업단의 주선으로 1983년 7월 13일 KBS 제2TV의 심야방송 대담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한다. 당시 대담은 후일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계진 아나운서와 오미희 연기자가 진행하였다.
3. [인협신보]와의 인터뷰
방송에 나간 지 3일 후, 1983년 7월 16일 [인협신보]의 요청으로 인터뷰하였고, 그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 인터뷰 기사는 [인협신보]의 후속 매체인 월간 [프린팅 코리아] 2007년 7월호 통권 61호에 다시 게재된다. 월간 [프린팅 코리아]에서 다시 게재한 이유로, “우리 민족의 ‘근대인쇄’ 시기를 따지자면 해방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해방 이전에는 근대식 인쇄가 별로 없었고 그나마 일제가 운영하던 인쇄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의 인쇄역사 기록을 찾자면 1954년에 창간되어 오늘날까지 발행되고 있는 ‘인쇄신문’이 유일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지난 역사를 더듬어 보는 의미에서 195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쇄역사를 월별로 정리해 시리즈로 보도한다.”라는 현대의 인쇄역사를 정리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7월호 보도를 발췌하여 전재한다.
[자료2]
“2. 화제의 인물 / 화제의 인물, 뿌리를 찾는 젊은이 이양재씨.
1983년 7월 13일 당시 KBS 제2TV의 심야방송 프로그램이었던‘11시에 만납시다’에는 앳된 모습의 한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그가 초대되어 들고 나온 물건이 조금 색달랐다. 그가 앉은 옆에는 화면에서 보기에도 누렇게 바랜 한지로 묶인 책들이 의자의 키만큼이나 쌓여 있었던 것. 책갈피는 낡고도 낡아 어떤 것은 종이가 건드리기만 하면 찢어질 것 같았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금속활자의 고서 수집가’인 이양재씨.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리고 그가 방송에 출연한지 3일 후에 인협신보는 그를 직접 만났다.
이씨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됐느냐는 신보 기자의 물음에 대뜸 “계보가 없는 나라는 없다”고 답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그 아버지를 알 때 하나의 세계가 형성된다”는 것. 그는 처음엔 인물사를 주로 연구하던 학자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인물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족보에 손을 대게 되었고 이는 다시 고활자로까지 연구 범위가 넓어졌다. 그가 수집했던 고서와 연구범위는 대략 1400년대부터 1800년대말의 납활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양재씨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고려 고종19년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설이 있다”며 “고종 때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이들이 동서로 진출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유출시킬 가능성이 많았다”고 말했다. 결국 독일의 구텐베르그 역시 한국 활자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
신보는 이씨가 고서 수집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씨는 취미 역시 고서 수집으로 30여 군데의 단골책방을 두고 있었는데 돈을 조금 아끼려다가 불과 몇 시간 만에 아까운 책이 폐지로 넘어간 일도 있었고, 한권의 책이 필요해서 한질의 책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고. 이런 그에 대해 신보는 우리조상의 숨결과 자랑스런 체취를 더듬어가는 이씨가 28살의 나이 답지 않게 우람해 보이는 것은 단지 입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며 옛 문화에 대한 열정을 높게 평가했다.” (월간 [프린팅 코리아] 2007년 7월호 통권 61호에서 전재)
4. 내가 쓴 족보에 관한 글
나는 1982년 5월 21일에 창립한 ‘한국고서동우회’(회장 안춘근, 현재의 ‘한국고서연구회’)의 첫 간사를 하는 등, 고서동우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 모임은 당시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서린동에 소재한 ‘한국출판판매’(사장 여승구) 사옥의 3층 사장실을 연락처로 쓰고 있었는데, 이 모임은 우리나라에서 현대 애서운동의 시작이었다.
1983년 KBS 한국방송사업단과의 사업 이후 나의 이름은 고서 상인들에게 전국적으로 인지되었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를 수집하는 일이 이전보다는 비교적 수월해졌다. (1982년경부터 나는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를 참고로 하여 [동의보감]을 편저한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의 묘소를 3년여간 찾아 나선다. 1988년 5월 26일 해외로 이민을 한 이후에도 틈틈이 계속 진행한다. 나의 활동 영역은 1991년을 기점으로 하여 미국 일본 중국으로 확대되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1년 늦 여름에 허준의 묘소를 민통선 안에서 기어코 찾아내게 된다.)
이후 여러 문중의 초간보를 입수하면서 알게 된 점을 메모하여 1985년 5월 25일에 발행한 우리 [한국고서동우회보] 제2호 pp.64~70에 「족보와 계보의 서지학적 소초(상)」를 발표한다. 아마 이 글이 내가 족보학에 관하여 쓴 첫 글일 것이다.
같은 해, 11월 30일(토) 오후 4시 30분에 개최된 ‘한국고서동우회’의 제8회 고서간담회에서 「논단(論壇) - 위보(僞譜)·탁보(濁譜) 소론초(小論抄)」를 발표한다. (참조 : [한국고서동우회 월보] 제6호, 1985년 11월 30일). 이 글은 짤막한 논고이지만, 조선시대 계보 위조 및 변조의 심각한 실태를 고발한 중요한 논고이므로, 이번 회 논고의 끝에 첨부한다.
이후 나는 수집한 옛 족보와 관련자료 155종을 가지고 1988년 1월 23일(토)부터 2월 27일까지 36일간 특별전 [한국희귀족보전]을 ‘한국출판판매’ 1층 전시장에서 개최한다.4) 특별전에 전시한 옛 족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 두 종이 영인본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본이었다. 당시 [고서통신] 5호(1988년 1월)에 필자가 쓴 ‘족보와 계보의 서지학적 소초(하)’와 ‘출품목록’을 기고한다.
이 특별전 [한국희귀족보전]을 통하여 옛 족보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더 많은 옛 족보를 수집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으나, 상황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서울 성균관대와 대구 계명대의 도서관에서 아차 싶었는지, 후일 옛 족보 수집의 경쟁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전시품을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의 수집품으로 오해하고 그쪽으로 일부 매물이 들어가는 거꾸로 된 현상이 나타났다. 경쟁자가 생겨난 상황에서 옛 족보 수집은 장기적으로 나가야 했고, 나는 옛 족보 수집 부진의 탈출구를 거래처 확대에서 찾아야 했다.
제1차 전시회 이전의 거래처는 주로 서울의 인사동과 청계천 8가, 그리고 서울 지역을 오가는 지방의 거간상 정도였던 것을, 대구 부산 대전 전주 광주 등 전국의 고서점과 골동품상, 그리고 거간상과의 거래로 확대한 것이다. 1988년 이후, 약 10년 이상을 그렇게 수집하였고, 2000년대 들어와서는 고서경매나 고미술품 경매에서 주로 매입하고 있다.
내가 1993년에 혜원 신윤복이 고령신씨임을 계보를 통해 규명한 것과 1996년에 이상좌(李上佐) 4대를, 다시 2017년에는 이상좌 5대를 규명한 것 등은 나의 보학 연구 방법으로 올린 성과 중의 하나이다.
1996년부터 약 20년간은 자료의 부족을 더욱 더 절감하여 족보 수집에 치중하였다. 이제 수집과 연구를 마무리해야 하는 노년에 이르자, 2022년 연말부터는 나의 옛 족보 수집품을 소개하는 원고를 써서 [광주이씨회보] 2023년 1월호(제384호)부터 9월호까지 7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2024년애는 이를 묶어 소책자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옛 족보 이야기]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원고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정정(訂正)하지 못한 부분이 좀 있다.)
2024년 2월 27일, 나는 양천허씨대종회(회장 허평환)로부터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아내어 성역화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으로하여 33년만에 감사패 한 장을 받았고, 12월에는 고령신씨대종회(회장 신광성)와 고령신씨안협공파종친회(회장 신왕수)로부터도 감사패 두 장을 받는다.
그해 하반기에는 고령신씨안협공파종친회와 은평한옥역사박물관(관장 표문송)이 공동 주최할 ’혜원 신윤복 학술대회‘ 준비 모임을 수차 갖는다. 그러던 6월초의 어느날 고령신씨연구소의 신경식 소장이 “한국 옛 족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자”는 제안을 한다. 나는 족보를 모으고 연구하려는 데만 치중하였지,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분명 등재가 가능한 제안이었다.
여기에서부터 한국의 옛 족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구상한다. 이 제안이 처음 나온 2024년 5월부터 현재까지 일 년이 조금 넘는 동안의 문제 상황은 ’특별전 한국의 옛 족보‘ 전을 진행하며 기술(記述)할 예정하며, 이제 지난 50년간 내가 진행하여 온 여러 문중의 족보 수집에 관한 회고를 일차 마무리하고자 한다.
5. 맺음말 ; 현대 보학의 형성
나는 2022년에 여기 <통일뉴스> 연재에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을 기고하면서, 간헐적으로 족보에 관한 나의 관점을 썼다. 2023년 7월 이후로는, 특히 2025년 6월부터는 이 연재에서 족보에 관한 나의 논고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지난 회까지 모두 15편을 넘게 연재하였는데,5) 앞으로 35편을 더 써서 50편을 채우겠다.
이미 연재한 15편의 글에서 25문중 이상의 초간보를 다루었듯이, 글을 쓰는 방법에 따라서 나머지 35편에서 70문중 이상을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총 50편에서 100여 문중을 다루는 선에서 글을 마치려 한다.
이 연재는 그저 써지는 대로 쓰는 것이니, 아직 체계는 없다. 지금 예상하는 정도면, 그런 정도면 나의 머릿속에 있는 족보와 관련한 많은 것들을 꺼내 놓는 것이 될 것이다. 책을 엮을 상황이 되면, 이미 나의 족보론은 일목요연하게 체계가 정립되어 있을 것이다. 이번 회 연재에서는 내가 옛 족보를 수집하게 된 목적이 현대 보학의 형성임을 다시금 밝히며 이번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나라의 족보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물사를 연구하거나 사회사 및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본학을 연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래식 전통 보학은 문중 보학이라고도 하는데, 소속 당파나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대체로 문중 보학은 과괄(科括)과 현달(顯達)을 위주로 다룬다. 즉 우리나라에서 사회문화학(社會文化學)이나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으로서의 현대적 보학은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현대적 보학을 정립하여야 할 시점이다.” 우리 현대 족보학의 시작은 방대한 수집품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함께 시작합시다.
특별전 ‘한국의 옛 족보’ 개최 변경 공지
8월 18일 자로 공지하였던 [특별전 ‘한국의 옛 족보’] 전의 개최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변경합니다.
학술위에서 일시와 장소를 협의 결정한 후에 확정하여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통일뉴스’에 온-라인 전시를 병행하는 문제도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의 : 이 양 재, 010-4815-3615. onecoree@naver.com
첨부(添附) ; 1985년 11월 30일 자, [한국고서동우회월보] 제6호, pp.2~3에서 전재.
[자료3]
☆論 壇☆
僞譜・濁譜小論抄
李亮載(書誌・族譜研究家)
僞譜라 함은 거짓된 족보를 말한다. 濁譜라 함은 흐려진 족보를 말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우리의 古族譜는 清譜였으나 現代에는 淸譜란 없다. 이는 족보를 여러 해 연구한 필자의 단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위보와 탁보가 출현하였고 그 실상은 어떠하였는가? 바로 그 점이 이 論抄의 核心이다.
Ⅰ. 僞譜 騒動
오늘날 각종의 史書와 文集을 들추어 보면, 壬亂前에 위보나 탁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위보에 대한 첫 기록은 1685年(肅宗11年)에 持平 崔奎瑞(1650~1735)가 上疏한 것인 듯싶다. 최규서는 후에 領相을 지냈던 인물인데 [艮齋謾録]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肅宗乙丑 持平崔奎瑞 疏論奸人冒印族譜 移易宗派之罪 蒙允置法”
즉, 숙종 을축년 (1685)에 지평 최규서가 상소하여 간사한 사람이 족보 발행을 함부로 하여 종파를 바꿔놓는 죄가 있으니, 법으로 다스려 달라고 하였다. 따라서 몇 씨족의 족보를 조사하여 본 결과 몇 종의 위보를 적발하였다. 그중, - 최규서가 속한 씨족(해주최씨)의 - 족보에 6~7代씩이나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 記載되어 있는 위보도 있었다. 따라서 최규서의 상소는 정당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를 그 후에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英-正朝 당시에 某 氏族의 경우에는 족보가 있는 서울의 벼슬아치 몇 사람을 새로 만드는 위보에 끼워 넣으며 宗派와 조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고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어리석은 자를 속여가며 족보를 팔아먹었다. 결국에 가서는 서울에 있는 벼슬아치들이 그 일을 알아 관청에 고발하였고 위보를 만든 자들이 잡혀 처벌되었다. 또한 각지에 팔아먹은 위보를 회수하여 없애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현재에도 그 위보로 보이는 것이 남아 있어 필자에게 입수되어 있는데 그 위보의 위보까지 - 필사본으로 - 현존하고 있다.
위의 두 경우는 가문에 의하여 위조가 묵인되지 않은 것이지만 때로는 가문에 의하여 족보 발간 경비와 재물 등을 목적으로 묵인되는 경우도 흔했다. 이외에 自身이 自身의 僞譜를 만든 예는 金慶禧에게서 볼 수 있다. 譯官 金慶禧는 1764년 무쇠로 活字를 주조하여 족보를 印出하였는데, 그는 당시 사회에서 자신의 身分 階層을 상승시키고자 족보의 내용을 바꾸고 거짓으로 만들어 실었다가 처형되었다. 또한 조선조 후기에 木活字를 짊어지고 다니며 족보·문집 등을 印出해 주던 移動式 出版 印刷業이 성행하였는데 이 역시 위보 간행에 관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Ⅱ. 編入方法
대개의 경우 어느 집 족보든지 系代를 위조하는 방법은 無後한 집의 양자나 자손으로 들여 보내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경우 이미 돌아가신 - 자신이 先代인 줄 아는 - 父祖 몇분을 타인에게 편입시키므로 白骨養子했다고 한다. 때로 양자로 편입시킬 자리가 없으면 허구의 인물들로 上代의 계대를 만들어 넣어 그곳에 記載해 놓는다. 대체로 돈이 생기고 친척들이 생기면 우선 그중 한두 사람이 매관매직하는 첩지를 사고 다시 - 같은 친척은 아니더라도 - 同姓 중 양반집에 출입한다. 서울 안에서 무위도식하는 일부의 양반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돈을 긁어먹으며 系代를 맞추어 주었다.
그러한 경우 대개는 족보에 註를 달아 놓기에는 旧譜엔 기록이 없었으나 자손이 모처에 살아남아 收單해 왔으므로 기입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런 표시도 없이 그대로 편입시키는 경우가 흔했다(順庵 安鼎福의 [橡軒隨筆] 참조). 그런데 이러한 경우 대개 名人의 系統으로 넣어 주었다.
또한 같은 친족 내에서 庶孫의 경우 그 自身들이 서손인 것을 숨기기 위하여 嫡子의 家乘으로 위조하여 족보 수단에 제출하거나 金力으로 청탁하여 오히려 名人의 長孫과 가까운 친척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大王의 子孫이나 功臣의 子孫은 軍役이나 세금 등을 면제해 준다는 受教가 있기 때문에 이를 틈타서 利得을 취할 수가 있으므로 名人의 子孫이 되려고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 경우 系代를 위조한 후 宗親府나 忠勲府에서 일하는 吏屬에게 뇌물을 주어 文案을 작성케 하여 堂上官에게 넘긴다. 그러면 당상관도 역시 뇌물의 일부를 받아 먹었으므로 그대로 手決을 하고 官印을 찍어 준다.
따라서 국가의 軍布 수입은 줄어 들었다. 그렇게 되자 숙종 39년 (1713)에 教書를 내려 □△× 등등의 子孫이라 칭하는 자는 모두 軍役을 내도록 정하라고까지 하였다(참조: [新補受教輯録] 康熙癸巳承傳), 이는 軍役을 피하면서도 軍布를 안내는 자가 많아지고 또한 名臣의 子孫이라는 자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내린 교서라고 볼 수 있다.
Ⅲ.僞系實例
系代의 위조는 때로는 황당무계하여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朝鮮朝 後期에 初刊譜를 내면서도 그 始祖를 新羅의 王孫이나 高麗初의 功臣으로 주장하여 系代를 일일이 맞추는 경우가 흔했다. 이는 시대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麗末이나 鮮初로 先代를 잡으면 僞系임이 금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先代의 系代 위조의 예는 상당히 그 年代가 올라가는 것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하나를 살펴보자.
1335년에 出生한 人物 ○○○(1335~1408)은 鄭襲明(?~1151)의 20代 外孫이라 記載되어 있다. 鄭襲明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151년에 死亡하였다. 즉 鄭이 사망한지 184년 후에 ○○○가 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184년 동안 적어도 18代가 즉 평균 10여세에 계속 得男을 했다는 것이 된다. 譜學의 상식으로는 18代가 내려오기까지는 400~500년이 걸린다. 그런데 鄭氏의 族譜는 共信力이 있어 보이게 鄭襲明의 10代孫 鄭夢周(1337~1392)가 1337년에 出生한 것으로 되어 있다. 人物 ○○○의 系代위조는 조선초부터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 이외의 임란(1592) 전 족보는 神聖하고 各氏族의 初刊譜는 대개 정확하다.
그런데 이러한 예보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子子孫孫代代로 분쟁의 불씨를 만들어 놓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同姓異本이면서도 始祖가 同一人인 어느 氏族끼리의 일인데 朝鮮末期에 족보를 편찬한 氏族이 400여년 전에 족보를 편찬한 氏族을 自氏族에서 分派해 나간 것으로 記録하여 놓았고, 더군다나 그 人物과 先代의 系代마저 뒤바꾸어 놓은 예이다. 이것은 마치 寓話 가운데 나이 자랑을 생각나게 한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갑오경장 (1894년)이 일어나 신분사회가 붕괴되자 상민과 평민이 과거의 양반계급으로 소급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하여, 그 이전의 다른 어느 시대보다 系代의 위조와 매매행위가 보편화되고 극에 달하였으며 - 따라서 필자는 古族譜를 갑오경장을 중심으로 한 이전의 것으로 본다 - 1920~30년 대의 大同譜 및 族譜・派譜・世譜 刊行의 붐을 이루었고 그러한 행위는 각 씨족마다 20~30년에 한번씩 족보 증수의 목적아래 계속되고 있다.
IV. 論抄를 끝마치며
僞系와 眞系의 分別은 文武科榜目이나 司馬榜目 등의 人名資料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등등의 史書, 그리고 誌石 등의 金石文・文集・行狀 등에 의하여 족보 전문가들은 가려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史類들에서 族譜에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거나 족보에 틀린 점들도 바로 잡을 수 있다. 오늘날의 평등사회에서 과연 僞系와 眞系를 따진다는 것이 필요한 일이며, 구태여 名人의 白骨養子되는 것이 필요한 일일까? 父母가 못생겼으면 못생긴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子女의 도리이듯 親系가 빈약해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
주(註)
주1) [매일경제], [풍운(風雲) - 한말의 유물자료전] 보도,
https://www.mk.co.kr/news/economy/576971
주2) [매일경제], ‘서화 골동 야화 <30> - 연일정씨 [대종보]’ 기사.
https://www.mk.co.kr/news/economy/588263#none 1983.04.09.
주3) 최근 글에서 나의 본격적인 고족보 수집이 1982년경의 일이라고 회상한 바 있는데, [대종보]의 입수가 1981년 5월이므로, 1975년 고서수집 초기부터 고족보를 수집한 것으로 정정(訂正)한다. 사실상 [광주이씨좌의정공파보(廣州李氏左議政公派譜)] 3책을 조부로부터 인수한 것이 1975년이고,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을 처음 매입한 시기가 1975년 6월 15일이기에 내가 족보를 수집하기 시작한 최상(最上)의 연도는 1975년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수집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이다.
주4) 정정(訂正) 사항 :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25), ‘나의 족보 수집과 우리 문화 연구’ (2023년 8월 21일자)에서는 “나는 고족보 수집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자 1985년에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의 서린동 사옥에서 나의 고족보 수집품 100여 점을 가지고 고족보 전시회를 개최하였다.”라고 언급하였다. 2023년에 1985년도라고 언급한 것은 오타이므로 이번 글에서 “이후 내가 수집한 옛 족보와 관련자료 155종을 가지고 1988년 1월 23일(토)부터 2월 27일까지 36일간 특별전 [한국희귀족보전]을 ‘한국출판판매’ 1층 전시장에서 개최한다.”로 바로 잡는다.
주5) 필자가 통일뉴스에 연재한 글 가운데서, 보학이나 족보와 관련한 글 목록입니다. 참조 바랍니다.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 모두 4편.
- (3) [광개토태왕릉비]의 재조명 – 2022.02.22. #광개토태왕릉비 #17세손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376
“광개토태왕은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로부터 13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13세손의 계수(系數)를 직계(直系)로 보고, 17세손이라는 계수를 왕계(王系)로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여 오고 있으나, 보학(譜學)에서 세손(世孫)의 계수를 왕계로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릉비문은 당대의 1차 사료로서 신빙성이 우선이며, 『삼국사기』의 13세손과 차이가 나는 것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서 왕의 직계 계보에서도 4대(四代)가 삭제되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 (13)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 - 2022.05.03. #기자 #위조된계보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915
- (27) 가야국의 실체와 『가락국기』 - 2022.08.09. #김해김씨 #양천허씨 #인천이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47
- (32) 민족사관과 문중 보학의 상충 – 2022.10.04. #한국성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316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 / 2025년 8월 21일 현재, 15편.
- (22) 광주이씨(廣州李氏) 가문 등의 한글 가승 – 2023.07.31. #광주이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594
- (33)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사료 가치 - 2023.10.16. #안동권씨 #문회류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187
- (82) 신라 경순왕릉과 17~18세기 『경주김씨세보』 - 2024.09.23. #경주김씨 #김알지 #경순왕릉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625
- (90) ‘혜원 신윤복의 계보와 연고지’에 관하여 – 2024.11.18. #고령신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106
- (115) 1476년 『안동권씨세보』에 관하여 – 2025.05.26. #안동권씨 #경주김씨 #김알지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556
- (118) 『문화류씨세보』에 관하여 – 2025.06.16. #문회류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743
- (119) 『광릉세보』와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의 형태서지학적 평가 – 2025.06.23. #광주이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803
- (120) 가락국 수로왕계 『김해김씨족보』에 관하여 – 2025.06.30. #김해김씨 #가야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851
- (121) 해주오씨 [족도]와 족보에 관하여 – 2025.07.07. #해주오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916
- (122) [이존록]과 [선산(일선)김씨족보]에 관하여 – 2025.07.14. #선산김씨 #경주김씨 #김알지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973
- (123) 『청송심씨족보』 1545년 을사 초간보에 관하여 – 2025.07.19. #청송심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013
- (124) 1392~1600년; 서른여섯 문중의 옛 족보, 그리고 국가문화유산의 지정에 관하여 – 2025.07.28. #임진왜란이전족보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073
- (125) [고령신씨족보] 어성보에 관하여 – 2025.08.04. #고령신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124
- (126) 조선의 유민, 그리고 정씨문중의 족보 – 2025.08.11. #영일정씨 #동래정씨 #청주정씨 #해주정씨 #경주정씨 #하동정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165
- (127) 『진양하씨세보』에 관하여 – 2025.08.18. #진양하씨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