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셋째 이야기, 자본이 있는 곳 어디에나 노조 깃발을 휘날리리(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66)

2025-08-16     정해랑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삽화-백소(白笑)]

김진기는 1981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신돌석씨가 공장 생활을 했던 그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부모님들은 그 도시의 시장에서 야채 가게를 운영했다. 김진기가 장남이었고, 밑에 동생 둘이 있었는데, 남동생이 고등학교, 여동생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김진기 집안은 친가 외가의 사촌, 육촌까지 통틀어도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이나 집안 어른들의 김진기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은 물론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뒤 고교 때부터 대학 가면 등산을 하리라 마음먹고 산악서클에 들어갔는데 그곳이 이념서클인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비공개 이념서클에 있던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와서 이념서클로 변모시키는 중이었다. 주말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갔는데 가서 부르는 노래나 하는 이야기들이 당시로서는 좀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선배들이 싸우는 일들이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왜 등산만 하면 되지 자꾸 이상한 의도로 서클을 변질시키느냐고 문제제기하는 선배들이 있었고, 김진기와 동기인 신입생 중에는 그만두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반대 쪽 선배들은 계속 그런 주장을 하고, 몇몇을 데리고 세미나도 하는 것 같았다. 김진기에게는 따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눈치는 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당시는 그 전 해에 있었던 광주민중항쟁 때문에 대학가가 조용한 날이 없던 때였다. 김진기가 다니던 학교도 그랬다. 몇 차례 시위도 있었고, 유인물도 뿌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기가 들어갔던 산악서클 선배 하나가 시위를 주동했다. 산악서클 회원답게 밧줄 타고 옥상에서 내려오면서 유인물을 뿌렸다. 김진기는 그 시위 계획은 사전에 모르고, 10분 전에 모이라는 말을 듣고 현장에 갔었다. 유인물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광주학살 자행한 전두환 일당 타도하자!’ ‘학우여! 총단결하여 광주학살 진상 규명하고, 학살범을 처단하자!’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선배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밑에서 구호를 따라 외치는 선배들이 스크럼을 짜려고 했지만 워낙 사복경찰이 많아서 순식간에 체포되었다. 밧줄 타고 내려온 선배는 3층 베란다에서 밧줄을 풀고 구호를 외치며 선동을 했다. 학생들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봤지만 따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있다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경찰에 선배는 체포되었다. 불과 5분 정도일 텐데 그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김진기는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3학년 몇 명이 밑에서 호응하기로 했는데 초동 진압되어 끌려갔고, 2학년 몇 명이 구호 외치는 사람을 따라서 하기로 했지만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김진기는 사방에 흩어진 유인물 하나를 집어 들고 가방에 넣었다.

그날 저녁에 학교 부근의 술집은 만원이었다.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술에 취해 우는 학생들도 많았다. 김진기도 서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술 마시다 시간이 늦어서 그 날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선배의 자취방에 따라갔다. 그 해까지 통행금지가 있어서 차가 일찍 떨어졌었다. 네 명이 함께 가서 소주를 사다가 더 마셨는데 마시다 그만 취해서 잠이 들어버렸다.

자다가 뭔가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자기 직전에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귀를 기울여 보니 함께 간 선배 하나가 뭔가 중얼거리는 잠꼬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이 왠지 귀에 익숙한 것 같아서 자세히 들어 보니 그날 시위할 때 살포한 유인물의 내용이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걸 외워서 잠꼬대로 줄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며칠 뒤 선배가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을 했고, 김진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새벽부터 나가서 야채 가게에서 고생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천진난만한 동생들이 계속 어른거렸다. 하지만 도저히 안 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었다. 나도 선배들과, 친구들과 함께 저 무도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싸우리라.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소그룹에서 공부를 하면서 김진기는 스스로 굉장히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갈등이 거의 사라졌고, 과 친구들이나 서클 친구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선배가 조직 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전국민주학생연맹이라고 부르는 조직이었는데, 김진기는 전혀 알지도 못했다. 3학년, 4학년 선배들이 연행되었고, 산악서클에서는 김진기를 소그룹에서 지도하던 선배가 조직원이라고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며칠 조사를 받고 나왔다. 주로 서클 활동과 학습소모임에 대한 것이었다. 아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학습을 지도하던 선배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그가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했는데 너희들에게는 그런 말하지 않았냐고 하였다. 그런 말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선배는 당면한 반파쇼투쟁 이외의 말을 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선배에게 김일성과 전두환 중 누가 나쁘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배가 둘 다 나쁘다고 하니까 그래도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하더란다. 하도 보채서 전두환이 더 나쁜 것 같다고 했더니 남자답게 솔직히 말해서 좋다고 했단다. 그 진술이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것으로 둔갑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정말 나쁜 놈들이라고 치를 떨었다.

조사 받고 나온 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방황했다. 곧바로 기말고사를 치렀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조사받던 선배도 조직에 단순 가담했다고 풀려났다. 집에서 부모님 일 도와주고 있는데 선배가 가게로 찾아왔다. 근처 다방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가 말하기를 자기는 강제 휴학 당했고 곧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단다. 앞으로는 다른 선배와 공부를 하란다. 곧 합숙을 할 것이니 부모님께 어디 놀러간다고 하라고 하였다.

잠시 쉬어서 그런지 마음에 부담이 왔다. 안 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부모님 도와주면서 효도하고 살고 싶었다. 경찰서에서 풀려 나올 때 아버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라 걱정하고 데모하는 사람은 다 그만큼 살 만하니까 그런 거다. 아버지 고향 사람들 중에 그런 일 하다가도 돈 있는 사람들은 이후에도 다 잘 살았는데, 없는 사람만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고는 앞으로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선배들을 보면 꼭 집이 잘 사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못 사는 사람이 오히려 운동을 더 많이 했다. 김진기보다 가정 형편이 훨씬 더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선배는 그런 이야기 끝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됐다고 하면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배가 군대에 안 가고 데모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그만 한 것이었다.

선배에게 알겠다고 하고는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데 자꾸 눈물이 났다. 가게에 도착해서 쭈그리고 앉아서 채소를 다듬는 어머니 모습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져서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서 친구 만나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한참을 걸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일까? 누구든 이런 고민은 할 거다. 그리고 이겨 나갔을 것이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술을 마시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학기가 되고 그 선배가 집을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데모를 준비한다고 하였다. 그 정보가 샜는지 여러 사람이 연행되었다. 김진기도 학교에서 끌려갔다. 이번에는 경찰서가 아닌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눈을 가리고 끌고 갔다. 들어가자마자 선배 행방을 물으면서 두들겨 팼다. 물고문도 당했다. 결국 선배가 집에 찾아왔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합숙을 하라고 했다고 하였다. 물론 그것은 이미 그들이 다 알고 있었다.

끌려갔던 알 수 없는 곳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무시무시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와서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차라리 잘 된 일이니 가서 3년 열심히 살고 새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라고 했다. 경찰서에서 형사들과 함께 바로 논산으로 간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이라도 먹이고 보내고 싶다고 경찰에게 사정을 했지만, 경찰들은 난처한 표정만 지으며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고만 했다.

그렇게 해서 군대에 갔다. 군대 생활은 초기에는 그런대로 무난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고 행정병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대한 이듬해부터 보안대에 여러 차례 불려갔다. 서울에 있는 모처에 가서 며칠을 조사받고 오기도 했다. 이른바 녹화사업이었다. 그러던 중 서클 선배가 군대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봄에 시위가 있던 날 밤에 자취방에서 잠꼬대로 유인물을 줄줄 외우던 바로 그 선배였다.

[삽화-백소(白笑)]

군에서는 자살이라고 말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죽음이었다. 선배가 왜 죽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녹화사업이란 것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을 그들에게 기록으로 넘겨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차마 해서는 안 될 프락치 노릇을 해야 했다. 휴가 나갈 때마다, 그리고 휴가에서 돌아올 때 죽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차례 느꼈다. 휴가를 가도 그를 대하는 친구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옮은 사람 대하듯 했다.

간신히 참아내고 제대를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전의 서클 친구들과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될 때는 피했다. 이공계라서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운동권 친구들이 적었다. 그리고 1학년 때 군대에 갔기 때문에 후배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3학년쯤 되었을 때 집안이 급격히 어렵게 되었다. 가게가 잘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핑계 삼아 학교를 그만두고 공단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신돌석씨가 있던 조직과 연결되게 되었다.

신돌석씨가 그를 알게 된 것은 현장소모임에 지도하는 사람을 보조하러 들어가면서였다. 그 지역에는 커다란 빵공장이 있었다. 어용노조가 있던 곳이었다. 거기에 조철구의 학교 후배가 들어가 있다가 거기 입사한 김진기를 알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을 알아서 셋이 한 팀이 되어 소모임을 꾸린 때였다. 지도선이라 불리는 사람이 그들을 이끌었는데 현장 경험이 부족하여 보충하는 의미에서 신돌석씨가 그 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때 그에게서 받은 인상은 무척 온순하면서도 깐깐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정세 이야기 등을 할 때는 주로 듣기만 하다가 현장 이야기에는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래서 별명이 조단조단이었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도선이 감을 못 잡아서 그냥 듣기만 하다가 그런 제기가 거듭되면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신돌석씨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모임이 끝나면 보통 뒤풀이를 하였다. 그 방에서 그냥 하는 때도 있었고, 근처 막걸리집에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서로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의 학생운동 때 일이나 군대 시절 녹화사업 이야기도 이때 많이 들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교유한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잘 안 다면 잘 아는 사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특히 서로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므로 더욱 그러할 것 같았다.

그가 겪은 녹화사업은 이제 많이 알려졌지만 그때만 해도 신기하게 들렸다. 신돌석씨가 군대 있을 때 보안대의 요시찰 대상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그렇게 연결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녹화사업은 들으면 들을수록 최악의 짓이다. 인간으로서 패륜이고,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자들로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괴롭히는 반헌법적 행위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런 짓을 한 자들이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형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는 술 대신 물을 한 컵 따라 마시면서 인사를 했다.

요즘도 왕성하게 활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원표공원에 와서 조선일보 폐간 투쟁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 사무실이 그 뒤에 있습니다. 한 번 찾아뵙고 점심이라도 함께 해야 하는데 날짜를 몰라서 아직 못했습니다. 언제 오실지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제가 시간 맞추어서 나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무실은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을 말하는 듯하였다. 광화문에 사무실이 있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조선일보 폐간 실천을 위한 1인 시위를 하러 나가는데 아마 그것을 어디선가 들어서 알게 된 것 같았다. 하긴 페북을 비롯한 SNS에 올리니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김진기의 모습이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는 공장에서 노조민주화를 시도해 보다 해고된 뒤 복직투쟁으로 3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복직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 생활이 어려워서 이것저것 했다고 한다. 컴퓨터 공학과를 나와서 수학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므로 과외와 학원을 하면서 노동단체에서 일했다. 수학학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무리를 해서 그런지 그러다 위암에 걸렸다. 다행히 초기였다. 요즘은 암이라도 초기만 발견하면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노동단체 일은 접고 학원도 문을 닫은 뒤 이것저것 해봤는데 모두 잘 안 됐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결국 찾은 것이 대리운전이었다. 2년쯤 했을 때 노조가 있다는 걸 알았고, 노조에 가입하고 조금씩 활동을 하다 결국 상근자가 되었단다. 이렇게 결국 운동으로 귀결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신돌석씨는 정말 많이 봤다. 그 운동이 어떤 것이든 그가 진정한 운동을 했었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김진기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