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그림 [그림 감상] 1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43)

2025-08-08     심규섭
단원 김홍도/그림 감상/18세기 후반/종이에 수묵담채/27cm×22.7cm/보물 제527호/단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단원 김홍도/그림 감상/18세기 후반/종이에 수묵담채/27cm×22.7cm/보물 제527호/단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 무리의 남자들이 모여 종이나 천으로 보이는 것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등장인물은 7명인데,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이부터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장년까지 다양하다.

6명의 남자는 유건(儒巾)을 쓰고 있고, 한 남자만 뒤로 자락이 늘어진 복건(幞巾)을 쓰고 있다.
복건은 유학자의 상징으로 학창의(鶴氅衣)나 심의(深衣) 등과 같이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넓은 소매에 곧은 깃이 달린 엷은 옥색, 황색 도포를 입고 있다.
도포는 양반, 선비, 평민, 천민을 가리지 않고 입는 일반적 예복이다.
격식을 차리고 있다는 말이다.

발이 보이는 4명 증에 미투리를 신은 사람이 2명이고, 목이 긴 신발을 신은 사람이 2명이다.
7명의 남자는 이 두 종류의 신발 중에 하나를 싣고 있을 것이다.

“뭐 하는 사람들인가?”

“배경이 생략되어 있네. 따라서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하기는 어렵네. 복식과 나이, 행동 따위로 추정해야 하지.
정체를 알려 줄 핵심 물건은 유건일세.
유건(儒巾)은 조선 시대에 벼슬이 없는 선비나 성균관 유생, 생원 등이 실내에서 착용했지.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말이네.”

“젊은이와 장년의 남자들이 함께 공부했단 말인가?”

“공부하는데 나이가 뭔 대수인가? 공부가 빠른 사람도 있고, 늦은 사람도 있네. 당시에는 다양한 나이의 사람이 모여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네.”

“알겠네.
다소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끝까지 들어보게.
풍속화는 국가사업으로 기획, 제작, 창작, 유통되었다고 알고 있네. 민본정치에 따른 통치 수단이지.
풍속화의 내용은 백성의 평범한 일상을 표현한다는데, 유생의 생활도 풍속화의 영역에 포함되는지 궁금하네.”

“김홍도의 풍속화 중에 [서당]이라는 그림이 있네. 서당은 기초교육을 담당하는 사회적 교육기관이고, 여기에 다니는 학생들은 그야말로 백성의 자녀들이지.
하지만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유생은 관직을 통해 출세(사회정치 활동)를 추구하는 사람일세. 따라서 이들의 당면 목표는 과거 시험이었지.
백성의 일반적 생활과는 거리가 있네.”

“풍속화가 아니란 말인가?”

“풍속화가 아닐세.
특정 내용을 주제로 한 주문형 그림으로 추정하네.
이를테면,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 사학(四學)에서 유생의 학업을 그려달라고 김홍도에게 주문을 냈다는 말이지.
국가 교육기관에서 고작 손바닥 크기의 작은 그림 한 점만 요구했겠는가?
작은 크기에 엷게 채색한 그림은, 당시 가격으로도 10만 원 내외였을 것이네. 이 정도의 비용으로 당대 최고 화가인 김홍도에게 그림 주문한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네. 시쳇말로 차비도 안 되는 수준이지.”

“다른 그림이 있다는 말인가?”

“최종 그림은 비단에 채색한 8~10폭 병풍 그림이었을 것이네.
이 정도 병풍 그림을 제작하는 비용은 최소 1억 원이 들었지. 국가 교육기관이 빠듯한 운영예산으로 1억 이상의 비용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지.
여러 사람이 비용을 추렴한 계병(契屛)이거나, 후원자가 큰돈을 기부한 것이네.
병풍 그림은 최소 2점을 제작해 학교에 기증하고 나머지 한 점은 후원자가 가졌을 것이네.
이 외에도 족자형 그림, 화첩형도 제작했지.
이 그림은 화첩용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하네.”

“억대가 넘는 창작 프로젝트였다는 말인가?”

“김홍도를 비롯한 3~5인의 화가가 참여하여, 최소 6개월 정도의 기간에 걸렸을 것이네.
병풍 그림을 제작하려면 최소 8폭의 독립된 그림이 필요하네.
학교 건물과 주변 풍경이 최소 2폭, 실내 수업 장면 2폭, 실외 수업 활동 2폭, 교수나 지원자의 모습 2폭 정도는 그려야 하지.”

“그렇다면, 이 그림이 김홍도 풍속화첩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뭔가?”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제작한 풍속화첩의 형식이나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네.
하지만 김홍도 풍속화의 대부분 커다란 병풍으로 제작했네. 이 작품은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있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풍속화첩은 후대의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끌어모아 묶은 것으로, 위작과 모작이 뒤섞여 있네. 어떤 연구자는 연습용 모사본 그림이라고 주장하지.”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자 중에는, 시험 답안지를 돌려 보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던데?”

“펼쳐놓은 화면이 백지여서 글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네.
나는 그림이라고 확정하네.
이유를 설명하겠네.
배경이 생략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유생들이 신발을 신고 있지. 이는 사학, 서원, 성균관과 같은 학교 교정이나 마당이라는 말일세.
답안지는 실내에서 보아도 전혀 문제가 없지. 돌려 보면서 설명해도 충분하네. 답안지를 벌건 대낮에 마당에서 볼만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개연성이 없다는 말이지.
또한 답안지라면 베껴 쓰거나 기록하는 게 일반적이지. 하지만 마당에 서서 필기할 수 없고, 실제 필기구를 든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렇다면 하필 실외 마당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림이 상당히 크네. 족히 150cm 이상일세.
최소 두 사람이 잡아 펼치고 7명의 건장한 남자가 보기에는 실내공간이 너무 좁네.
무엇보다 실내는 그림을 보기에는 적절치 않네.
조선 후기, 실내의 밝기는 창이나 문을 통해 들어오는 채광에 의존했네.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림을 감상하는데 적절한 밝기는 아닐세. 너무 어둡다는 말이지.
미술 전시장에서 강한 조명을 작품에 비추는 이유일세. 반대로 박물관 미술작품은 약한 조명 때문에 감상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지.
아무튼, 해가 나 있는 실외에서 그림을 감상하기 좋은 시간대는, 오전 10시에서 11시경, 혹은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가 가장 좋네.”

“알겠네. 그렇다면, 김홍도가 유생의 그림 감상을 선택해 그린 이유는 뭔가?” (계속)


<참고>

1)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눈다.

관학에는 서울의 성균관(成均館)과 4부 학당(四部學堂), 지방의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원(書院), 서당(書堂), 서재(書齋)가 있었다.

향교는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면 전국 대부분의 군현에 설립되어 그 수가 329개에 달했다. 향교마다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향교 운영의 재원으로 삼게 하고, 교관(敎官)을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교생(校生)에게는 군역을 면제하는 특권을 주었다. 향교의 운영은 그 고을의 수령(守令)이 맡았기 때문에 대부분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官衙)와 가까이 있었다.

성균관의 입학 연령은 사부학당 출신은 15세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특별한 규정이 없다. 특히 과거 시험을 치르는 나이 제한은 없다. 60세에 급제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관직생활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 권위와 명예는 지역에서 충분히 활용되었다.

유숙/수계도권/종이에 연한 색/30×800㎝/1853년/조선/개인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2)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이었던 유숙이 그린 작품이다.
병풍이 아니라 두루마리 형식이다.
그림에 나오는 30명의 중인이 계곡에서 시모임을 갖는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은 최소 30점이 제작되어 참여자들이 가져갔다.
그림 중앙에는 시를 쓰고 평가하는 장면이 있고 풍경을 중심으로 계곡을 거닐거나 담소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 27세였던 유숙은 앞선 세대 그림을 따라 배운 도화서 화원이었다.
도화서는 국가 미술기관으로 보수적이다.

사계풍속도병/김홍도/비단에 옅은 채색/100.0×49.0㎝/18세기/프랑스 기메박물관. [사진 제공 – 심규섭]

3) 전체와 부분을 함께 그린 <수계도>는 전형적인 구성 방식이다.
김홍도가 학교의 모습을 8폭 병풍으로 제작했다면, 학교 전경과 주변 풍경을 양쪽 끝에 배치하고, 중앙에는 교수와 유생이 공부하는 장면을 넣었을 것이다.
김홍도 풍속화첩의 주요 내용은 비단에 채색하여 병풍으로 제작했다. 손바닥 크기의 화첩과 대작인 병풍과는 내용과 형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최소 10좌 이상의 병풍 그림으로 제작했을 것이다.
작은 화첩용 풍속화는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어 여럿이 돌려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