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신씨족보] 어성보에 관하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25)

2025-08-04     이양재

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지난 회 연재 [1392~1600년; 서른여섯 문중의 옛 족보, 그리고 국가문화유산의 지정에 관하여]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족보를 간행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목판본으로 간행한 현전하는 족보는
‘①1476년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와 ②1545년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③1565년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와 ④[강릉김씨족보(江陵金氏族譜)],
⑤1576년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⑥1578년 [고령신씨족보(高靈申氏族譜)],
⑦1580년 [안동김씨성보(安東金氏姓譜)]-구 안동’ 등등의 7종에 불과하다.
필사본으로는 ①[대종보(大宗譜)]와 ②1553년 [의성김씨세보(義城金氏世譜)] 등 2종이 있다.
이상의 7종의 목판본과 2종의 필사본 족보는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1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일본이며, 그 희소성은 삼국시대나 후기 신라시대 불경의 현전본보다도 적다. 임진왜란 이전의 족보 9종은 반드시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야 한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현전하는 여섯 번째 목판본 족보 1578년 [고령신씨족보] 어성보를 다루고자 한다.

 

1. 고령신씨문중의 옛 족보

고령신씨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지방 호족에게 주어지던 호장(戶長)을 지냈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다. 시조는 13세기 전반기의 인물이지만, 고령신씨문중 일각에서는 고령신씨가 고령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大伽倻, 42년~562년)의 왕족 출신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고령신씨 종원(宗員)들은 역사에 관심이 깊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자랑스러워하는 종원이 많은 것을 보면, 이는 민족사관의 주창자 단재 신채호를 배출한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고령신씨의 시조 신성용의 5세손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이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지만,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지낸 아들 신포시(申包翅)와 함께 전라도 광주(光州)의 서석산에 은거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신포시의 장남 신장(申檣)은 대제학, 차남 신평(申枰)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삼남 신제(申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신장(申檣)에게는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 5형제가 있었고, 신숙주가 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고령신씨가문의 고려조 문과급제자는 2인인데, 조선조 문과급제자는 모두 88명이고, 생원시에는 94명이, 진사시에는 122명이 입격하였다. 의외로 조선조 무과급제자는 문과보다 적은 70명이 입격하였다. 또한 역과에는 32명, 의과에는 14명, 음양과에는 3명, 율과에는 4명이 입격하였다. 2015년 국세조사에서 현재 인구가 129,718명으로 조사되었는데, 현존 인구수에 비하여 입격자 비율이 상당히 높다.

고령신씨문중에서는 1578년에 초간보를 간행한 이래 조선시대에 모두 5차에 걸쳐 족보를 편찬 간행하였다.

[표1] 고령신씨문중에서 조선조에 편찬한 중요 족보 목록

- 1578년 [고령신씨족보(高靈申氏族譜)] 무인년 어성보는 고령신씨의 초간보이다. 목판본, 3권2책으로 충청도관찰사 신담(申湛, 1519~1595)이 충청도 직산군 성거산에 있는 구암사(龜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족보이지만, 고령신씨는 적서의 차별이 심하여 서자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혜원 신윤복의 직계 조상으로는 적손(嫡孫)인 9대조 신공섭(申公涉, 안협공)까지만 수록하고 있다.

[고령신씨족보](어성보), 1578년(무인보), 초간보, 목판본, 3권2책. 간기(왼쪽)를 보면 선조조와 광해군조에 활동하였던 전서의 대가 신여도(申汝櫂)가 판하서를 썼다. 그러나 그는 서손이라는 이유로 계보 수록에서는 제외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 1753년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계유년 진주보는 초간 어성보가 나온 지 175년 후에 신성권이 편성하여 간행하였다. 목판본 6책인데, 이 진주보에서도 서손(庶孫)은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초간보와 재간보에서 외면당한 서손들은 독자적인 가승을 편성하여 보유하기 시작한다.

- 위의 목록에는 포함하지 않았지만, 서손들이 집성한 필사본의 결과물로 보이는, 정조 말(1790년경)에 편성한 필사본 [고령신씨가승] 1책이 2005년경에 발견되었는데, 이 가승에는 안협공 신공섭(申公涉)의 소실로 광주이씨 이효천(李孝薦)의 딸을 명시하고 있고, 소실의 후손을 기록하고 있다. 안협공의 광주이씨부인은 신수진(申守眞, 또는 申狩眞, 申滇, 1520~1594)을 낳았고, 묘소는 양주 연서 구산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필사본 족보에는 혜원의 직계 윗대로는 14세 신극해(申克海, 1601~1685)까지 수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서손들도 나름대로 필사본 가승을 편성(編成)해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필사본 가승도 중인들의 족보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1804년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갑자년 한성보 9책, 목활자본. 이 한성보는 서자들을 대거 수록하여 만든 족보로서, 혜원 신윤복의 부친 신한평까지 수록하고 있다. 이 갑자보가 안협공 서손들이 나온 첫 족보로서, 고령신씨문중의 보학자들은 이 한성보를 가장 정확한 족보로 본다. 그러나 1850년에 묵정보를 만들면서 가장 정확한 족보라는 평가를 받는 1804년 한성보를 서손들이 많이 들어간 족보라고 트집을 잡아 훼철(毁撤)시킨다.

- 1850년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경술년 묵정보, 신윤모 편, 21책, 목활자본. 묵정보는 청주에서 만든 족보로서 적서 차별을 크게 반영하여, 다시 적서(嫡庶)가 첨예하게 갈라서는 족보가 되며, 또한 부분적으로 매보(賣譜) 현상이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1850년 묵정보는 1804년 한성보보다 편찬 의도가 편협하고 차별적인 족보라는 평가를 받는다.

- 1898년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무술년 유동보는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 신헌구가 편찬하여 27권26책으로 발행한 족보이다. 목활자본인데, 한성보와 비교하여 보면 신공섭의 소실 광주이씨 부인의 후손 일부를 떼어내어 적손의 후손으로 입보하고 있다. 즉 신분제가 철폐됨으로써 차별을 받던 많은 서손이 적손의 후손으로 편입되며, 결국에는 서손들의 집성촌이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1898년 유동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탁보(濁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령신씨문중의 족보를 세계기록유산이나 국가 문화유산으로 등록할 대상은 1578년 ‘어성보’와 1753년 ‘진주보’가 우선되며, 1804년 ‘한성보’도 등록 검토대상이 될 수 있다. 고령신씨문중에서 편성한 1804년 한성보에서부터 1850년 묵정보, 그리고 1898년 유동보까지의 편찬 의도와 상황을 보면 순조 이후 조선말기의 족보 편성의 현실을 알게 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령신씨문중에서 배출한 역과 급제자는 모두 32인인데, 그 대다수가 안협공 신공섭의 소실 광주이씨부인의 후손이며, 그는 양주 연서 구산리에 묻힌다. 광주이씨부인의 후손들은 지금의 은평구 구산동에 선산을 두고 16세기 중반부터 그 인근에 세거하였다.

이들 조선시대에 역관은 일종의 기술직이기도 하며, 그들은 사행길에 동행하며 많은 수입을 올렸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1804년 한성보를 편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부담하였기에 입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50년 묵정보를 편성하면서 다시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이러한 예가 어찌 고령신씨문중에서만 있었겠는가!

신분사회가 무너진 지금에서 보면 18세기로부터 19세기 중반에 연서 구산리에 살던 고령신씨 서손들은 성리학으로 인하여 주어진 신분 차별의 굴레를 극복하고, 실사구시로 일어선 그 시대의 실학적 선각자였던 듯싶다. 지금 그 서손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도 필사본 가승을 들고 당당히 나타났으면 한다.

2. 계대를 통해 본 고령신씨문중의 문화 예술적 소양

앞에서 언급한 고려조의 고령신씨 문과 급제자 2인은 신례(申禮)와 신포시(申包翅, 1361~?)이다. 신례는 고려 명종20년 1190년 경술방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신례의 부는 신작효(申作孝)이며 조는 신숙(申淑, ?~1160)이다. 고령신씨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지방 호족이므로, 신례와는 거의 같은 시기의 인물이지만 이들과는 혈연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신례는 고려 방목(榜目) 기록상에는 고령신씨라고 나오지만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계보가 없는 것을 보면 현재의 고령신씨들과는 무관한 인물로 보인다.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으로부터 신포시에 이르는 여섯 대의 계대는 아래와 같다.

고령신씨 어성보에는 이들 6대를 포함하여 보한재 신숙주까지 직계 8대가 모두 문과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과거급제자 명단에는 위의 여섯 분 중에 신성용과 신덕린, 신포시 등 3인만이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위의 여섯분 가운데 과거 급제 연도가 확인되는 인물은 6세 신포시(申包翅, 1361~?) 한 분으로서, 그는 우왕9년 1383년 계해년 계혜방에 문과 급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신포시의 아내는 경주김씨인데, 수은당(樹隱堂) 김충한(金沖漢, ?~?)1)의 딸이다. 김충한은 1395년에 경주김씨 계도(系圖)를 작성한 인물이다. 이는 김충한이 1395년에 편성한 계도에 신포시가 그의 사위로서 이름을 올렸을 것임을 말하여 준다. 조선전기의 계도나 족보, 세보에는 대체로 배위(配位)는 나오지 않으며, 딸의 이름도 나오지 않으나 사위와 외손의 이름은 나온다. 사위의 본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령신씨의 계보를 연구하여 보면, 고려말 조선초로부터 고령신씨문중에서는 문화예술 면에서 여러 탁월한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고령신씨가문을 사실상 중흥시킨 인물은 순은 신덕린(申德隣, 1330~1402)2)이다. 순은 신덕린과 그의 손자 암헌 신장(申檣, 1382~1433)3), 신장의 아들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1475)4)와 귀래정 신말주(申末舟, 1429~1503)5), 보한재의 손자 삼괴당 신종호(申從濩)6), 신종호의 아들 영천자 신잠(申潛, 1491~1554)7), 조선후기의 일재 신한평(申漢枰, 1726~?)과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8) 등등이 있다.

이러한 인물 중에 보한재 신숙주는 단종조와 세조조 예림(藝林)의 핵심 인물이었다. [보한재집]에 남겨진 미술 관련 기록을 보면 보한재 신숙주는 안평대군 이래, 예림의 총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대는 다르지만, 한 가문에서 이렇게 특출한 예술가를 남긴 예의 문중은 고령신씨문중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여겨진다.” 문화 예술적 소양이 깊은 가문이다.

3. 초간 ‘어성보’의 간행 과정과 해제

임란 전 옛 족보의 선본을 꼽자면 오래된 년대로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3권3책이 제일이며, 방대한 분량으로는 1565년 [문화류씨세보] 10권10책이 제일이다. 그리고 1578년 [고령신씨족보] 초간보 3권2책도 적지 않은 분량으로 매우 우수한 선본이다.

[고령신씨족보](어성보), 1578년(무인보), 초간보, 목판본, 3권2책.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족보] 초간보 어성보(무인보)는 어성(漁城) 신담(申湛, 1519~1595)이 1578년에 충청도 직산군 성거산에 있는 구암사(龜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신담은 조선 최초의 민중시인이라 할 수 있는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6세조이다. 신담은 157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578년에 파직되었는데, 그는 충청도관찰사 시절이던 1578년 3월에 [고령신씨족보] 초간보를 편찬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11년 4월 7일 1번째 기사를 보면 “집이 한산(韓山)에 있는데 그곳에 묵으면서 폐해”를 끼쳤다는 사간원의 파직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파직 두 달이 지난 후 곧이어 6월 23일자에,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었다. 즉, 신담이 파직된 것은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비(官費)와 관인(官人)을 이용하여 족보를 편찬하는 데 힘썼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으므로 이러한 가문의 족보를 만들기 위한 폐해는 묵인되었다. 고령신씨의 초간보 편찬에 신담이 파직되면서까지 주도하였으므로 이 족보는 ‘어성보(漁城譜)’라고도 부른다. 이 어성보는 임진왜란 이전의 족보이면서도 의외로 서자(庶子)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고령신씨족보(高靈申氏族譜)], 1578년 무인보(어성보), 초간보, 3권2책, 구암사 목판본. 판심은 상하내향태흑구(上下內向太黑口)에 서명 [고령신씨족보]와 권수, 장차가 표시되어 있다. 사주단변이고 책 크기는 세로가 38cm이고 가로가 30cm이다. 한 면을 여섯 단으로 나누어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어성보’는 3권2책이지만 권수(卷數)를 세분하면 아래와 같이 해제된다.

책1.
- 고령신씨비명묘지 (高靈申氏碑銘墓誌) ; 16장. (맨 앞의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문충공행장(文忠公行狀)’ 1장 결락). 16행25자. (현전본 15장 있음)
- 고령신씨족보목록 (高靈申氏族譜目錄) ; 2장.
- 상권일(上卷一) ; ‘천(天)’ 장 1장.
- 상권이(上卷二) ; ‘지(地)’ 장에서부터 ‘현(玄)’ 장까지 3장.
- 중권(中卷) ; ‘우(宇)’ 장에서부터 ‘수(收)’ 장까지 18장.
- 하권일(下卷一) ; ‘동(冬)’ 장에서부터 ‘체(體)’ 장까지 102장. / ‘강(羌)’장 앞면 일부와 뒷면 낙(落), ‘하(遐)’장 앞뒤 훼손, ‘이(邇)’장 결장, ‘체(體)’장 결장. (즉 2장반 결장과 일부 장 훼손되어 현전본은 모두 99.5장.)

책2.
- 하권이(下卷二) ; ‘솔(率)’ 장에서부터 ‘량(量)’ 장까지 68장.
- 신담(申湛)의 지(誌) ; 2장.
- 신극청(申克淸) 근지(謹誌) ; 1장.
- 편찬자 명단 ; 1장.

이상과 같이 ‘어성보’는 총 214장 중 210.5장이 남아있다. 1476년 [안동권씨세보] 3권3책은 모두 186장이니, 단순히 장수로 보면, 102년 뒤에 나온 1578년 ‘어성보’ 3권2책의 분량이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한 족보 가운데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이어 두 번째로 두터운 족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성보’에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편찬 이후에 태어난 안동권씨와 혼인을 맺은 인척이 상당수 보여, 어성보의 편집에 나타나는 편성법(編成法)은 1476년 [안동권씨세보]를 표준 삼아서 약간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1476년 [안동권씨세보]에는 권씨 본손일 경우 ‘권(權)’씨 성을 기재하지 않았으나, 1578년 ‘어성보’는 신씨 본손일 경우 ‘신(申)’씨 성을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어성보’보다 33년 먼저 나온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의 예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하나로 이어지는 변화는 족보 편성의 발전 과정을 보는 듯싶다.

4. 맺음말; 어성보의 평가

조선조에 고령신씨문중에서 간행한 [표1]의 족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578년 어성보와 1804년 한성보이다. 어성보는 1578년에 충청도 직산군 성거산에 있는 구암사(龜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고령신씨세보] 초간보로서, 현전하는 목판본 옛 족보 가운데 여섯 번째로 빠른 족보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족보 가운데 분량 면에서 1565년 [문화류씨세보] 10권10책과 1476년 [안동권씨세보] 3권3책의 사이에 있는 두 번째로 분량이 많은 3권2책 본이다.

조선후기까지 족보는 한정 부수로 간행하였기에, 현전하는 임진왜란 이전의 초간보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복본(청구기호, 규41, 규42.)으로 소장된 1576년 청주보살사(淸州菩薩寺) 목판본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1책(66장) 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유일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족보, 특히 초간보의 희소성이란 삼국시대와 후기신라시대의 불경 현전본처럼 극히 희소하다. 복사본이나 영인본이 원본을 대체할 수 없으므로, 원본이 없어지면 국가적으로 아주 큰 손실이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는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예를 들자면 사료가 적은 발해사 연구에서 영순태씨(永順太氏)의 족보는 여러 중요한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1578년 [고령신씨족보] 초간 ‘어성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의 경우와 같이 횡간보 6칸 형식을 하고 있다. ‘어성보’ 상책의 맨 앞장 1장과 뒷부분이 일부가 훼손되기는 했지만, 개인 소장의 이 ‘어성보’는 현전하는 유일본이다. 무엇보다도 본 ‘어성보’는 편찬자 어성(漁城) 신담(申湛, 1519~1595)의 6세손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선생의 가문으로 전래한 옛 족보로서 전승 유래도 명확한 선본이므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사족(蛇足) 

필자는 1975년부터 고서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수집 초기에 필자가 목격한 사실은 1970년대 초부터 30여 년간 우리나라의 고 족보는 종로1가에 있던 ㈜범한서적의 창구를 통하여 매년 해외의 어느 유명 대학교로 상당수 팔려 나갔다. 최근 필자는 당시 인사동 모 서점에서 필자의 매입 시도를 거절했던 어느 고서점의 초간보를 어느 유명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하였다. 지금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수 많은 초간보들도, 필자가 서둘러 매입하지 않았다면, 미국이나 일본으로 상당수 유출되었을 것이다. “세계 유수의 대학교 도서관에 자기네 문중의 옛 족보가 있다고 자랑하는 분들,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거 귀 문중에서 가치를 몰라 버린 것이에요.”

지난 50년간 삶을 희생하며 우리나라의 역사 자료와 기독교 자료를 어렵게 수집한 필자에게 감사를 못할망정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폄하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 말없이 침묵을 지키며 보다가 이번에는 이렇게 사족을 붙인다.
 

주(註)

주1) 김충한(金沖漢), 생졸년 미상.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고려의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고려말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분으로, 자는 통경(通卿), 호는 수은당(樹隱堂)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전라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증조부는 김궤(金軌)이며, 조부는 김영(金瑩)이고, 부친은 김서인(金瑞仁)이며 모친은 형군소(邢君紹)의 딸 진주형씨(晉州邢氏)이다. 부인 서흥김씨(瑞興金氏)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령(縣令) 김자(金磁)‧부사(府使) 김승(金繩)‧직제학(直提學) 김작(金綽)이며, 딸은 좌찬성(左贊成) 신포시(申包翅)와 혼인하였다.

주2) 신덕린(申德隣)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서화가이다.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 해서와 초서, 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이를 ‘덕린체(德隣體)’라 부를 만큼 일세를 풍미하였다. 순은 신덕린은 율정 윤택(尹澤, 1289~1370)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1347~1434) 등과 더불어 고려말 육은(六隱)이라 불렸다. 참조: 필자,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75) - [려말선초의 서화가 순은 신덕린과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294

주3) 신장(申檣)은 신포시의 아들이자, 김충한의 외손자이고, 신숙주의 아버지이다. 신장은 숭례문(崇禮門)의 편액 글씨를 썼던 조선초기의 명필이다.

주4) 신숙주는 회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 『보한재집(保閑齋集)』 권제14에 안평대군이 「화기(畵記)」를 남기는 등 그 시대의 회화에 관한 여러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주5) 귀래정 신말주가 그림에 관한 이해가 깊었다는 것은, 그가 남긴 문인풍의 그림 『申末舟先生 十老契帖』(11폭)으로 입증된다.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주6) 삼괴당(三槐堂) 신종호(申從濩, 1456~1497)도 명필로 이름이 났다.

주7) 영천자 신잠은 시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에 삼절(三絶)로 불렸다.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난초와 대나무를 가장 잘 그렸다.
참조: 필자,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02) - [아차산 아래의 선비화가 영천자 신잠].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797

주8) 참조: 필자,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0) - [‘혜원 신윤복의 계보와 연고지’에 관하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106
필자,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89) - [‘혜원 신윤복의 미술 창작 분야와 화풍’에 관하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