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는 미국의 동북아 냉전전략 집행 과정
[서평] 박문수의『왜 지금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주목하는가?』- 고승우
고승우(한미일연구소 공동대표. 언론사회학박사)
박문수 박사가 최근 펴낸 『왜 지금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주목하는가? - 동아시아와 한반도 냉전 체제 형성 과정을 해부하다』라는 책은 ‘역사제도주의’의 관점에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냉전시대 분석과 그 영향을 분석한 역저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미국 주도의 전후 냉전체제의 아시아판인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형성과 작동 원리를 해명하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8년간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분석,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한반도 문제가 국제정치에 영향을 많이 받는 영역이고 주제라는 점에서 거시적 시각으로 미국의 세계 정책 속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문제를 설명했다. 이는 한반도 근현대사에 국내 학계의 연구 업적이 한반도의 영역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아쉬운 점을 고려할 때 매우 긍정적이다. 과거사의 정리는 객관적 사실관계의 파악이 그 첫 출발이어야 하는 바, 보이고 들리는 것의 발원지까지 포함되어야 전체를 파악하는 조건이 충족된다 하겠다.
한국 근현대사는 미국의 국익 실현과 강화를 위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한반도 문제를 미국의 세계 전략 속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향후 한반도 근현대사 연구가 주체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고려해 이 책의 서평은 한반도 근현대사에 대한 과거 연구 업적의 특성, 미흡한 점을 살펴보고 이어 사회과학 관점, 이론 등의 특성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한반도 근현대사의 기존 연구 주요 패턴과 문제점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국의 남한 점령정책을 다룬 국내 학계의 기존 연구는 주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하지는 미국 정부가 임명한 군 지휘관으로,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 본국의 지시를 전달받아 집행했을 뿐이다. 야전군 출신인 그는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단순히 실행하는 역할에 국한되었으며, 한반도 근현대사가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 냉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의 일부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은 한계가 있다.
미국이 1945년 남한에 점령군을 파견한 것은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였다는 점, 특히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탈 과정에 공범으로 가담했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남한에 대한 미군정은 맥아더가 일본에서 본국 지시대로 행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방식으로 취해졌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세력을 미군정의 집행기구에 참여시켜 해방정국의 지배적 계급으로 참여시켰다. 미 국익을 위해 친일세력을 친미세력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국내 학계는 일제 잔재 미청산을 이승만의 반민특위 관련으로 국한하지만 당시 이승만은 미국의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은 군정을 통해 남한을 대소 방어 전방 진지로 만들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추진을 강행하고 이승만이 그에 동조해 분단체제의 구조를 강화했다. 남한 단독정부 추진에 대한 반대가 제주 4.3으로 폭발하자 미국은 소련의 사주를 받았다는 등의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남한 군경을 지휘해 제주도민 3/10을 살해하도록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에서도 다수의 양민이 학살당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제주 4.3과 여순사건이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전쟁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진압했다. 미 국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체질이 재현된 것이다.
이승만은 여순사건이 터지자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북한 지역 전체, 주민 전체를 반국가단체와 구성원으로 규정해 남북 소통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포함시킨 동북아 방어 전략에 크게 부합하는 조치라 하겠다. 미국이 국보법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짐작되는 부분이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세울 때까지 남북 접촉이나 협상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것도, 미국이 분단 상태를 원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승만이 정부 수립 이후에도 북진통일을 외치며 대북 강경책에 올인하고 있을 때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을 앞세워 모택동을 타도하려 군사 지원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다가 믿었던 장개석이 패퇴하자 남한 정부도 장개석 정부처럼 부패가 만연하다는 등의 이유로 그 존재가치가 미흡하다고 보고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을 덜컥 선포하게 된다. 이는 6.25 전쟁 발생과 무관치 않은 변수의 하나였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일본을 동북아 대소 방어진지의 주요 기지로 삼기 위한 작업을 벌이는데 그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이 조약은 태평양전쟁 종전 후 논의가 시작되어 1951년 9월 체결되어 일본의 전후 처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체계가 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을 서방 진영의 대소련 방파제로 확고히 삼으려 했고, 한국은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요소로 취급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선심을 베풀면서 전후 처리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를 재편하는데 기여했다. 미국은 냉전 전략을 위해 일본을 반공 전초기지로 재활용하려고 일본에 전쟁 책임을 묻기보다 주권을 회복시켜주는 방향으로 조약을 설계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전범 처벌 회피, 재무장 허용, 미군 주둔 등을 얻어내며 냉전 체제 내에서 미국에 편입됐다. 일본의 전범 기업과 정치 세력은 조약을 통해 과거사 청산 없이 부활했고, 이는 한일 관계 악화의 뿌리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을 경제적 파트너로 삼으면서도 군사적 통제권을 확보해 태평양 지배 전략을 실현했다. 이 조약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역사적 정의와 민족적 상처를 덮어버린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범죄 응징을 최소화하고 전후 배상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베르사유 조약과는 판이하게 일본과 피해국 간의 개별 협상 방식을 채택하는 것과 같은 당근정책을 이 조약에 도입했다. 그러면서 일제로부터 가장 오랜 기간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한국을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물론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이승만은 당시 6.25 전쟁 중이기는 했지만 국제정세에 밝았던 평소와 달리 이 조약 협의 당시 이렇다 할 문제 제기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의 동북아 냉전체제 구축에 침묵으로 동조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이 이 조약의 협상을 주도하면서 동맹국들과 초안을 만들던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선포해 한국을 미국의 동북아 방어선에서 제외했던 방침을 백지화시켰다. 남한이 적화될 경우 일본이 위험하다는 논리로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서 다국적군을 구성하려 시도했다. 미국이 유엔 깃발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한국전 참전을 주도하는 안보리 회의가 3차례 열리는데 소련이 불참하면서 거부권 행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이 그렇게 한 것은 동구권 챙기는데 주력하면서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에 묶어놓으려 했다는 음모론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정전협정을 반대하다가 반공포로를 불법 석방하는 식으로 저항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국제회의에서 미국과 함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미국 권리(right)로 인정하고 치외법권적 지위로 인정해 주면서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이승만은 전쟁 재발 시 미군의 자동 참전을 보장받으려 했으나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는 자국의 법적 절차에 따라 참전한다는 식으로 정리했다. 이승만은 군사주권을 넘겨주면서 미국만이 한국을 보호할 수 있다고 애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모습을 윤석열이 반복하다가 탄핵당했다.
이승만이 나라를 36년간 강탈한 일본의 전쟁범죄와 배상 문제를 다루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외면하고 미군 주둔에 특권을 준 의미는 대단히 심각하다. 일본이 물러간 뒤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 식민지로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제2의 매국이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이승만은 미국이 주한미군의 공군력 등으로 중국, 러시아를 위협하게 하는 전략적 임무를 수행케 하는 것에 적극 협조했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전략적 임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분단이 필수적이었고 이승만은 분단 고착화를 추진해 미국에 적극 협조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주한미군의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략임무 수행 사실이 한국 국민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한국의 역대 정권이나 언론, 학계는 그것을 비밀로 하는 카르텔에 오늘날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러시아의 미사일이 주한미군을 겨냥하고 있어 유사시 주한미군 기지 주변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이 파괴될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한국이 전혀 원치 않는 상황에서 강대국들의 무력 충돌로 잿더미가 될 수도 있다 하겠다. 한국 정부는 자국민의 생사가 외세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까맣게 모르게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촌이 비웃을 한국 지배층의 태도는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것과 같은데 새 정부는 이를 어떻게 할지 주목된다.
박문수 박사가 저서에서 분석 기간을 1947년부터 1954년까지 8년으로 삼았는데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도 만들어놓은 냉전방어체제를 만들어 미 국익을 챙기는 과정을 위에서 간략히 소개했다. 같은 기간 동안은 물론 오늘날까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전략은 동북아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관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한국에서는 한미관계를 한미혈맹으로 부르면서 미국을 엄청난 시혜자, 은인국가로 미화하는 인식이 광범위하다. 미국이 일제를 물리치고 해방시켰다면서 점령군으로 온 사실에 눈을 감는가 하면 6.25전쟁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무수히 희생하면서 한국을 구해주었다고 칭송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가짜뉴스다.
미국이 한반도에 점령군을 보내고 6.25전쟁에 참전한 것은 미 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한 것이지 한국을 배려하거나 돕는다는 차원은 아니었다. 이는 월남전을 경험한 한국 참전용사의 경우를 살피면 이해가 될 일이다. 군은 정치가 결정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국가의 일반론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연관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았는데 한국 학계의 주류도 21세기 들어서는 각성을 해서 가짜뉴스를 걷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김 박사의 저서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는 미국 냉전정책의 집행 과정이었다는 진실 확인의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사회과학 관점, 이론 등의 특성
박문수 박사가 펴낸 『왜 지금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주목하는가? - 동아시아와 한반도 냉전 체제 형성 과정을 해부하다』라는 저서의 관점과 이론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회과학의 일반론으로 대신한다.
사회과학자가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어떻게 설명하려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관점과 이론이다. 사회과학에서 관점, 이론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연구자의 선택 문제다. 그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같은 말이다. 사회과학에서 관점은 십인십색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관찰자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동시에 사회과학의 본질과 한계를 잘 포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처럼 보편적 법칙을 도출하기보다,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맥락, 의미구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러므로 같은 현상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사회과학에서 사회를 보는 시각은 몇 가지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실업 문제를 두고도 구조기능주의자는 사회 통합의 문제로 보며, 갈등이론가는 자본주의 구조의 불평등 탓이라 본다. 반면 상징적 상호작용론자는 실업자의 자아 정체성과 낙인 경험에 주목한다.
이처럼 사회과학에서는 연구자의 이념, 가치관, 시대적 배경, 이론적 전통 등에 따라 사회를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 달라질 수 있다. ‘객관성’조차 구성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따라서 ‘십인십색’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주관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과학 이론이 갖는 다원성, 상대성, 그리고 맥락 의존성을 반영한다. 동시에 사회과학의 복수이론 구조와 해석적 다양성을 요약한 표현이며, 이론적 절대주의를 경계하고 열린 탐구 태도를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관련해 제기한 관점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것이다. 사회과학 이론은 사회라는 바다 위의 실 한 가닥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이는 사회과학 이론의 한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사회과학 이론은 사회라는 복잡하고 유동적인 바다의 일부분이나 그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예측하려는 시도이다. 실 한 가닥의 설명 논리는 그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현실의 일면만을 조명할 뿐이다. 즉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과학 이론이 자연과학 이론과 달리 매우 제한적인 것은 사회가 경제, 정치, 문화, 심리, 역사 등이 얽히고설킨 총체적 실체라서, 이를 단일 이론이나 개념 틀로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사회과학은 다양한 이론들이 병존하거나 충돌하는 다원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기능주의, 갈등이론, 상징적 상호작용주의, 제도주의, 페미니즘, 후기구조주의 등은 그 실 한 가닥들에 해당한다.
각 이론은 마치 바다 위를 떠도는 부표처럼 특정 국면을 살필 수는 있지만, 바다 전체의 움직임이나 깊이를 담기는 힘들다. 더 나아가 이론 자체도 현실 변화에 따라 수정되거나 무력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 이론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기보다는, 복잡한 사회를 이해하려는 잠정적, 도구적 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에는 바다 전체를 설명하려는 이론이 거대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오늘날에는 설명 대상을 축소한 중범위 이론이나 마이크로 이론이 대세라 할 것이다.
사회과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사회가 ‘다인다과(多因多果)’라는 점이다. 이 표현은 하나의 사회현상이 여러 원인에 의해 발생하며, 또한 하나의 원인이 다양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사회과학의 인식론적 전제 중 하나로,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의 틀로 기능한다.
이러한 다인다과적 사고는 사회현상을 단선적 인과관계로 설명하지 않고, 다원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단순한 원인-결과 관계를 넘어서려는 이러한 노력은, “빈곤은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다”와 같은 편견을 경계하고, 보다 정교하고 정의로운 정책 설계를 가능하게 한다. 사회과학이론은 자연과학처럼 보편적이고 반복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사회과학은 인간의 행위와 사회현상이 시대․문화․맥락에 따라 달라져 보편적 법칙을 정립하기 어렵다는 한계 때문이었다.
사회과학과 그 이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미국 학계의 경우 냉전시대의 도구로 이론을 개발하기도 했다. 국익을 위해 학계가 동원된 경우다. 미국 사회학의 기능주의가 그것이다. 이 이론은 맑시즘(Marxism)에 대한 대안이자 견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기능주의는 사회를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적 체계로 보고, 각 제도나 구조는 사회 전체의 안정과 존속을 위해 기능한다고 본다. 맑시즘이 계급 갈등과 사회경제적 모순을 구조적 원인으로 보며 혁명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데 반해, 기능주의는 기존 사회 질서가 안정과 균형 속에서 유지되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가 하나의 발전된 형태로 지속될 수 있다는 낙관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기능주의가 미국 사회학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미국 내에서 일반화된 소련 혁명 이후 맑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공포와 적대감, 이른바 ‘레드 컴플렉스(Red Scare)’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사회에서의 맑시즘에 대한 적대감은 단순한 이념 차원을 넘어서, 국가안보, 체제 유지를 위한 적극적 정치 전략의 일부였으며,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능주의는 비갈등적이고 체제 옹호적인 이론으로서 정치적으로 안전하고 유용한 학문적 도구로 채택되었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의 공산주의에 대한 국가적 반감과 광범위한 사상 검열, 탄압이 전개되면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매카시즘(McCarthyism)’이 등장해 공산주의자 색출을 명분으로 수많은 예술가, 학자, 공무원, 지식인이 고통을 당했다. FBI(미국 연방수사국) 등 정부 기관이 좌파 지식인과 노동운동가를 감시하고 리스트에 올리고 대학 내에서도 맑시스트 경향을 보이거나 계급 분석을 강조한 학자는 교수직 박탈, 불이익, 해고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랜드리스 법안을 통해 전쟁 막바지에 소련에 총 14,000대 이상의 다양한 항공기를 제공하여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강화했다. 이들 전투기와 수송기는 소련 병력 및 물자 수송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미국의 항공기 지원은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소련의 자체 생산 부족분을 효과적으로 메워주었다. 미국 정부가 국내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대단한 상황에서 공동의 적인 소련에 무기 지원을 한 것은 국가이익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한 사례의 하나다.
한편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과학자가 사회를 탐구하다가 말년에 신비주의로 빠진 경우도 있다.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귀스트 콩트가 주인공이다. 그는 말년에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종교’라는 세속적 종교를 만들어 교주 격인 대사제 역할을 했다. 과학과 도덕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이 종교는 미사와 교리, 성직자 제도까지 갖췄고, 성자의 자리에 과학자들을 숭배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그의 인류종교는 ‘대우주’, ‘대지’, ‘인류’라는 삼위일체적 개념으로 체계를 갖추었다. 학계에서는 콩트를 ‘위대한 과학 창시자에서 망상적 교주로’라고 비판하면서 사회학의 과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맺으며 - 국보법 없어져야
이상에서 사회과학의 특성인 관점, 이론 등을 살펴보았는데 사회과학자는 지식 전달과 함께 진리를 향한 선각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칫 지나치게 되면 특정 이론이나 관점을 절대시하면서 구도자이거나 예언자로 비치기도 한다. 이런 점은 경계해야 한다. 학자는 탐구, 비판, 책임의 세 가지 자질을 지녀 시대의 거울이자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관점과 이론의 십인십색 특성과 사회과학의 다인다과 속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사회과학에 동참한 모든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라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에서 사회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코자 한다. 이 악법이 학문의 자유를 막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실제 그런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한반도 분단과 통일문제에 대해 탐구할 때 이 법 때문에 북한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어렵고 한반도 미래를 구상할 때 북한의 장단점을 자기 검열 없이 고려하기 힘들다. 21세기의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한 정보사회가 일반화되고 있는 지구촌 환경을 고려할 때 이 법이 신속히 폐기되는 것이 인류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한 경쟁력을 기르는 선결 작업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