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세보』와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의 형태서지학적 평가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19)

2025-06-23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0. 다시 길을 나서며

필자는 20세가 되던 1975년부터 고서를 수집하였다. 특히 사서(史書)와 고족보(古族譜), 옛 선현의 유묵, 기독교서, 독립운동가 자료 등등을 수집하여 현재 약 2,000점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필자는 20대 후반부터 각 문중의 초-재간보(初-再刊譜)는 물론이고 정조 말년(1800년)까지 발행된 옛 족보(古譜)의 중요성을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2025년은 필자가 고서를 수집하기 시작한 지 50년이 된다. 이제 지난 50년을 결산한다는 심정으로 여기 <통일뉴스>에 지난 5월 26일 자에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에 관하여”를 기고하였고, 6월 16일 자에는 “『문화류씨세보』에 관하여”를 기고하였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족보 중에 특이한 한 족보를 탐색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이 논고는 필자가 생각하는 현대 보학의 실체 가운데 단편적인 하나이다. 필자는 이 원고에서도 다른 성씨의 원고에서와 같이 존칭을 생략한다. 문중의 이해를 바란다.

1. 광주이씨세보 편찬에 관하여

광주이씨문중에서는 조선시대에 5차에 걸쳐 [표1]과 같이 족보를 편찬하였다.

[표1] 조선시대에 편찬한 광주이씨세보 목록

이외에도 조선후기에 몇 개의 파에서 파보(派譜)를 편찬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⑥1919년에 기미보(己未譜, 1919년)를 내었고, 해방을 전후로 하여 몇 개의 파에서 각기 파보를 내었으며, 1987년에는 ⑦정묘대동보(丁卯大同譜, 1987년)를 내었다.

표(1)에서 보듯이 ①1562년경 편찬의 [광릉세보]와 ②1610년 편찬의 경술보는 약 48년의 시차가 나며, ②1610년 경술보와 ③1724년 갑진보는 114년의 시차가 난다. 또한 ③1724년 갑진보에서 ④1796년 병진보는 72년, ④1796년 병진보에서 ⑤1873년 계유보는 77년, ⑤1873년 계유보에서 ⑥1919년 기미보는 46년, ⑥1919년 기미보에서 ⑦1987년 정묘대동보는 68년의 시차가 난다.

⑤1873년 계유보와 ⑥1919년 기미보 사이에는 철도가 놓여, 즉 1899년에 경인선, 1905년에 경부선, 1906년에 경의선, 1914년에 호남선과 경원선이 개통되어 전국적인 이동이 원활하였고, 또한 근대의 활판 인쇄술이 도입되어 조선후기보다 출판이 간편하고 그 비용도 저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데,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씨족 의식을 북돋아 일제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하여 대동보 편찬을 시도한 것이다. 1919년 기미보가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그러한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있다.

2. 광주이씨문중의 전설적인 현달 인물

광주이씨는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3만3816가구 14만1831명, 2000년에는 4만8811가구 15만8249명, 2015년에는 18만1377명으로 조사되었다.

광주이씨는 고려에서는 문과 9명(5명), 사마 1명을 배출하였고, 조선에서 문과 197명, 생원 207명, 진사 205명, 무과 264명, 역과 5명, 의과 3명, 음양과 3명, 율과 3명을 배출하였다. 합하여 고려와 조선에서 887장의 입격자를 배출하였는데, 중복을 빼면 800여 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상신(相臣)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이 있다.

전설적인 중요 인물로는 고려말의 광주(廣州) 향리(鄕吏, 衙前) 이당(李唐)을 비롯하여 신돈(辛旽, ?~1371)을 비판하였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그의 아들이자 대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과 세종조의 청백리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 1354~1419),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1395~1463) 등이 있고, 세종 이후 5조(朝)에 걸쳐 ‘출장입상(出將入相)’하였던 명신 이극배(李克培), 폭군 연산(燕山)의 폭정에 서릿발 같은 기개로 항거하시다 숨진 이극균(李克均), 선조조 ‘서정쇄신(庶政刷新)’의 기수로 역사에 남은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 외교관이자 명 전략가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등 많은 인물이 있다.

그리고 광주이씨문중에는 무엇보다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가 한 사람도 없다. 반면에 현재 국가로부터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는 39인이다. 이미 추서 받았으나 문중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분과 아직 추서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일제강점기 독립군으로 활약 중 체포되어 순국한 이수택(李壽澤, 1891~1927)과 을사늑약 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가 있으며, 또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 1855~1931)이 있고, 해외 거주의 인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보조를 취하며 항일혁명의 대열에 나선 문정일(文正一, 본명 李雲龍,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이 있다.1)

3. 동고(東皐) 상공(相公)께서 편찬한 [광릉세보]

현존하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최고본 족보(最古本 族譜)는 한음 이덕형이 1613년(계축년)에 서문을 쓴 경술보(庚戌譜, 1610년) 1책이다.

한음은 경술보의 그 서문 첫머리에 “옛날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댁에 갔다가 [광릉세보(廣陵世譜)]를 보았는데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으나 아들과 사위만 기록하고 외손은 기록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간단하여 한스럽게 여겼는데 자라서 옛사람들의 종법을 자세히 검토해 본 뒤에야 이 족보의 깊은 뜻을 깨달았으니, 모두가 동고(東皐) 상공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임진란 때 나라의 서책들도 다 불타고 없어졌거늘 하물며 족보라고 별수 있었겠는가?”라고 쓰고 있다. 한음 이덕형의 이러한 언급은 엄연한 사실이다. 동고 이준경이 편찬한 족보는 활자본이라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광릉세보]의 원형을 탐색한 바 있다. “[광릉세보]를 필사한 책이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한동안 여러 도서관과 고서 수집가, 문중을 조사해 보았으나 찾지를 못하였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한음의 경술보 서문에 동고 이준경이 활자본 족보를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여 믿었지만, 경술보의 내표제(內標題)에 의성현(義城縣) 개간(開刊)이라는 기록에 따라 경술보가 초간본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안동에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 집 수졸당(守拙堂)에서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속칭 가정보) 목판본 10책이 발견되었고, 그 을축보를 ‘문화류씨종친회’에서 경인문화사를 통하여 1979년 6월 30일 자에 축소 영인하였다. 이 을축보는 문헌 1권 76면과 자손록 9권 2,204면의 보책이다.

바로 이 을축보의 권6, 장29부터 장31까지, 그리고 권10, 장72부터 장77까지가 광주이씨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을축보에 광주이씨가 수록된 이유는 문화류씨의 외손인 교하노씨 노신(盧信)의 사위가 광주이씨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인손부터 7세까지 을축보에 등재되어 있는데, 을축보 권10, 장74에 이준경과 세 아들, 사위 이옥(李沃)이 있다.

을축보에 이준경의 직위는 좌의정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로 이준경은 1560년에 좌의정에 올랐고,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을축보는 1562년에 편찬이 완성되었고, 이후 3년간의 판각 절차를 거쳐 1565년에 출판되었으므로, 가정보에 수록된 광주이씨의 세계는 동고 선조께서 좌의정으로 있던 1560~1년경에 편성한 것임이 유추(類推)된다. 동고 선조의 [광릉세보]가 문화류씨 가정보보다 약간 앞서 출판되었기에 광주이씨 선대의 세계 일부가 1565년 을축보에 등재될 수 있었다.

『안동권씨세보』 성화보, 권중 장53 뒷면과 장54 앞면 부분의 사진. 1476년, 3권3책,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본 족보인 1476년 [안동권씨세보](속칭 성화보)는 3권3책으로 천(天)∼시(恃)까지 364면에 약 9천 명이 등재되어 있다. 그 가운데 권중 장53 뒷면과 장54 앞면에는 이인손 3대가, 권하 54장 앞뒷면에는 이장손(李長孫) 3대가, 권하 장41 앞뒷면에는 이지유(李之柔) 4대가 각기 사위로 나온다.

이것은 동고 이준경이 [광릉세보]를 편찬하기 90년 이전에,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 이미 광주이씨 가문에서 세보(世譜)나 가승보(家乘譜) 초본(草本)을 집성하여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1476년에 발행된 성화보에 이지유의 4대와 리장손, 이인손 형제의 3대가 수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광주이씨 계보 초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족보 편찬과 발행이 늦은 일부 문중에서는 19세기에 족보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이 이미 조선초나 조선전기에 초간보를 발행한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광주이씨문중에서는 가승보 초본은 발행한 족보로 주장하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고 선조께서 좌의정 시절인 1560~1년에 족보를 편찬한 것만 해도 매우 이른 족보의 편찬이기에 무리하게 족보 편찬 시기를 끌어 올려 과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4. 동고 이준경의 [광릉세보]의 판형에 대하여

[문화류씨세보] 을축보에 수록된 광주이씨의 계보는 모두 9장이다.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이인손 선대(先代)와 형제대(兄弟代)의 계보, 그리고 동고 이준경이 썼을 것으로 예상되는 서문과 발문 등을 합하면 [광릉세보]는 대체로 35장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음 이덕형은 경술보 서문에서 [광릉세보]는 활자로 인출하였음을 언급하였는데, 1560년에 이준경이 좌의정이었음을 보면, [광릉세보]를 인출하는데 당시 관에서 사용하였던 금속활자로 인출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자신이 속한 문중의 족보를 편찬하기 위하여 어느 한도 내에서 직위를 남용하는 것은 대체로 묵인(默認)되었다”라는 점이다. 그런데 서지학(書誌學)의 입장에서 보면 “목판본보다는 활자본으로 출판하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상대적으로 경비도 적게 든다.” 더군다나 그 시대에는 친족의 수가 적어 많은 부수의 족보 발행이 필요하지 않았다. 필자가 추론하기에는 [광릉세보]의 발행 부수는 30부 미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사정에 근거하여 볼 때 [광릉세보]를 활자본으로 출간한 것은 매우 실용주의적인 시도였다. 현재 [광릉세보]의 실물이 현전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활자본 족보였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당시 정부에서 많이 사용하였던 금속활자는 갑인자(甲寅字)와 을해자(乙亥字), 갑진자(甲辰字) 등이다. 물론 당시 민간에서는 목활자도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중기에 발행된 여러 목판본 족보, 특히 광주이씨문중의 경술보에 보이는 글자 크기에 비추어 볼 때, [광릉세보]를 인출하는데 재주(再鑄) 갑진자(甲辰字) 큰 자와 작은 자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당시에는 목활자도 널리 사용되고 있어 목활자로 인출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1560~1년경에 활자본으로 족보를 간행하였다는 사실은 “족보 간행에 활자를 사용하였다는 최고의 기록이다.” 한음 이덕형이 경술보 서문에서 언급한 이 사실은 형태서지학(形態書誌學)에서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5. 한음 이덕형은 언제 [광릉세보]를 보았는가?

한음 이덕형은 1613년에 쓴 경술보 서문에서 “옛날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댁에 갔다가 [광릉세보]를 보았는데”라고 회상하였다. 한음의 조부는 이진경(李振慶)으로 그의 생몰 연도는 [광주이씨대동보]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음은 1561년생이고, [문화류씨세보] 가정보에는 한음의 조부까지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한음이 1561년에 출생하기 직전에 동고 이준경이 [광릉세보]를 편찬하였기에, 또한 한음 부자(父子)는 당시 포천(抱川)에서 거처(추정)하였으므로 수단(收單)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음은 부조(父祖)를 따라서 집안 어른댁에 갔다가 [광릉세보]를 본 것이고,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그때 부친 이민성과 한음은 [광릉세보]에 필사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음은 언제쯤 [광릉세보]를 보았을까? 경술보 서문에 유시(幼時)라 하였다. 한음의 부조 3대가 함께 간 집안 어른 댁은 어느 분의 집일까? 한음은 1561년생이고, 동고 이준경은 1572년 7월 7일에 별세하였다. 이를 보면 한음이 간 집안 어른 댁은 동고 댁이었을 것이다. 즉 한음은 10세를 전후로 한 시기에 동고의 댁에서 [광릉세보]를 실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음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에 봉래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음은 1580년(선조13, 20세) 별시 문과에 을과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고,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로부터 당시의 관판본(官版本) 서적(書籍)을 하사받는다.

한음은 하사받은 관판본(官版本) 활자본(活字本)에서 그 인출의 우수성을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판본에 대한 분별력으로 동고가 편찬한 [광릉세보]가 활자본이라 언급한 것이다.

6.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의 판본에 대하여

한음 이덕형이 1613년 계축년에 쓴 경술보 서문 제목은 ‘광주이씨족보서(廣州李氏族譜序)’이다. 그러나 한음 선조의 서문이 끝나며 시작되는 표제에는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라고 하고 있다(사진2 참조). 이 족보는 경술년에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에서 개간(開刊)한 족보이다.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경술보. 1610년 편찬, 1613년 한음 이덕형 서문. 필자 소장(所藏). 한음 선조의 필체는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따르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1610년(편찬, 庚戌譜), 6권1책, 재간보(1613년 간행), 조각판본, 책 크기: 24×35.8cm. 이 광주이씨문중의 이 경술보는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경술보의 판원이 목판본과 활자본을 절충한 형태의 여러 개의 조각판(雕刻板)을 모아서 활판식(活版式)으로 제판(製版)한 조각판본이기 때문이다.

경술보는 판심(版心) 상하에 세흑구(細黑口)가 들어가 있고,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경술보의 사주(四周) 모서리는 떨어져 있고(사진2 참조), 판심도 3~4개로 구분되어 있으며(사진3 참조), 본문도 조각판을 부친 흔적이 보인다.

임란시(1592~1598)에 조선의 금속활자는 일본에 약탈당하였는데,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허준의 [동의보감] 초판본이 을해자체 목활자로 찍혀진 이유는 임란으로 인하여 전국이 황폐하여 판목으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그 시대의 많은 책은 굵지 않은 나무를 잘라 목활자를 만들어 인출하였다. 즉 임란 직후에는 굵은 나무로 만든 판목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당시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 편찬자는 조각판본이라는 절충식 조판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조각판본으로 인출한 책은 광주이씨문중에서 만든 경술보 이외에는 다른 책에서 확인된 바 없다. 이는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의미한다. 광주이씨문중의 경술보는 1610년에 편찬되었고, 경상도 의성에서 1610년 계추(季秋, 음력 9월일)에 조판되었다.

그러나 한음 이덕형이 서문을 쓴 연도는 계축년(1613)이다. 경술보가 1610년의 판본이더라도 한음이 1613년에 쓴 서문이 들어가 있으므로, 경술보의 실제적 발행 시점은 1613년이 된다. 따라서 경술보를 한때 계축보라 부른 일도 있다. 그런데 경술보의 서문은 한음 이덕형의 행서(行書)를 그대로 본을 떠 새긴 것으로 한음이 쓴 송설체(松雪體) 필적이다.

(왼쪽) 천지변(天地邊)과 좌우변(左右邊)이 만나는 네 모서리가 떨어져 있다. 이는 조판(組版)된 활자판본의 특징인데, 우리 가문의 족보가 조각판본으로 조판되었음을 입증하여 준다.  
(오른쪽) 목판본이라면 천지변(天地邊)과 판심(版心)이 붙어 판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술보에서는 떨어져 있다. 즉 경술보는 조각판을 조판하였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7.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해제

경술보의 판본 규명에 따른 경술보의 해제를 쓴다. 위에서도 논하였듯이 경술보 서문은 목판본이며, 세계 부분은 조각판본이다.

- 목차(目次) -
광주이씨족보서(廣州李氏族譜序) / 만력41년 맹하 / 이덕형(李德馨) / 3장.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 황명만력38년계추일의성현개간(皇明萬曆三十八年季秋日義城縣開刊) / 반장.
범례 / 반장.
광주이씨동성보 권상(廣州李氏同姓譜 卷上) / 2장.
광주이씨동성보 권중(廣州李氏同姓譜 卷中) / 13장.
광주이씨동성보 권하(廣州李氏同姓譜 卷下) / 17장.
광주이씨동성별보 권상(廣州李氏同姓別譜 卷上) / 반장.
광주이씨동성별보 권중(廣州李氏同姓別譜 卷中) / 2장반.
광주이씨동성별보 권하(廣州李氏同姓別譜 卷下) / 6장.
이상 6권1책에 총 45장이다.

책의 크기는 대략 세로가 35.5cm, 가로가 24cm이고, 반곽의 크기는 첫 장이 대략 세로가 27.6cm, 가로가 20.1cm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판심은 상하세흑구(上下細黑口)에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고, 권명(卷名)과 권차(卷次)가 적혀있다.

세보에서 자녀는 적서의 구별을 하였고, 출생 순으로 적자를 먼저 적었다. 사위 이름은 적었으나 외손은 적지 않았는데, 이것은 동고 선조의 [광릉세보] 편찬례(編纂例)를 따른 것이다.

이 경술보의 또 하나의 중요성은 둔촌(遁村) 선조 이전에 갈라져 나간 광주이씨 일가(一家) 전체를 수록하고자 한 광폭(廣幅)의 편찬 의도에 있다. 이러한 일가(一家) 의식은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8. 맺음말

광주이씨문중에서는 동고 이준경이 [광릉세보]를 1560~1년경에 편찬하였으며, 그 내용 일부를 [문화류씨세보] 가정보에서 볼 수 있다. 또한 필자는 경술보는 왜란 직후 피폐한 당시의 산림 상황에 의하여 부분 부분을 조각판으로 만들어 활판식(活版式)으로 조판(組版)한 조각판본이라는 사실을 논하였다. 즉 이 경술보는 세계 서지학상(書誌學上)에 유일한 예(例)의 판본(版本)으로 서지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특별한 예의 옛 족보이다.

현재 이 경술보는 복수(複數)로 현전하고 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임란 전후의 고족보와 1610년 경술보를 비교하여 보면, 경술보는 편집과 서체가 우수하고 빼어나게 아름답다. 필자 소장본 경술보는 원래의 뒤표지가 일부 남아있는데 남색의 색지를 표지로 사용하고 있다. 표지에 색지를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고급 장정인 셈이다. 경술보 본문을 인출하는데 사용한 종이도 임란 직후의 서적치고는 매우 양질의 닥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아주 정성 들여 인출하였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한음 이덕형의 지원과 인행을 주도한 이사온(李士溫), 이사수(李士修)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선본(善本)이 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후손으로서 선조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

주(註)

주1) 해방 후의 광주이씨 주요 인물로는 국회의원 이정래(3선), 이중재(6선), 이경재(4선), 이종구(3선), 이주영(5선), 이달손(4선), 이종배(4선), 이용호(2선), 이해식(2선), 이용경(1선), 이순재(1선, 탤런트), 이준석(1선) 의원 등이 있고, 또한 법조계로는 이용훈(제14대) 대법원장을 위시한 여러 판사가 있으며, 행정부의 이수성(제29대) 총리와 이명재(제31대)-이원석(45대) 검찰총장, 이택순(제13대) 경찰청장 등도 널리 알려진 광주이씨이다. 그리고 여성으로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태두인 이태영(李兌榮, 1914~1998) 박사, 가수 이효리 등의 예능인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김진명의 장편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이론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 박사도 광주이씨이다. 기업인으로는 수원대학교 설립자 이종욱(李鍾郁, 삼익건설) 회장과 세계 최대의 장학재단인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세운 삼영화학그룹의 이종환(李鍾煥) 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