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풍속화첩-서당] 3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32)

2025-05-23     심규섭

“모두 아는 내용이니 간단하게 설명하겠네.
사방관을 쓴 훈장 1명, 어린이부터 댕기 머리 총각, 갓 쓴 남자까지 9명의 학생이 등장하지.
가장 흔한 서당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네.
어린 학생 하나가 훈장 앞에서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중심이네. 훈장은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아무튼 서당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일세.
주변 학생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아주 볼만하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네.”

서당 교육에 노비, 양민처럼 귀천의 차이는 없었다. 7세부터 25세까지 누구라도 서당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고 비용은 무료이거나 자발적 기부였다. 서당은 지식인과 백성들이 협력하여 만든 사회적 의무교육에 가까웠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내가 무지해서 묻네. 도대체 서당은 뭐 하는 곳인가?”

“무지 딱딱하고 간략하게 답하겠네.
서당(書堂)은 조선시대에 사설 교육 기관이네. 서당 설립에 정부의 인허가는 필요 없었네. 뜻있는 자는 자유로이 설립, 폐지할 수 있었지.
서당은 백성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네. 때에 따라, 사학(四學)과 향교 입학하기 위한 예비 교육 기관 역할도 했지.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7세부터 16세의 아동들이 중심이었네.
하지만 20세에서 25세 이상의 성인이 있는 경우도 많았지.
김홍도의 서당에도 7세 정도의 아이부터 댕기 머리 총각,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젊은이가 표현되어 있네.

서당의 교육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건 순전히 훈장의 수준과 서당의 규모, 예산에 따라 달랐네.
대략 현재의 초등학교, 중등학교 수준일 것일세.

김홍도의 서당 풍경은 규모가 작은 편일세.
한 명의 훈장이 여러 나이대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 아마도 교육 수준도 달랐을 것이네. 거의 개인지도 교육방식이지.”

“사설 교육 기관이면 수업료가 비쌌겠네?”

“서당은 사회적 교육 기관에 가깝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이름난 사람, 흔히 지역 유지, 마을이나 촌 단위 조합에서 예산과 장소를 만들고 훈장을 초빙하여 서당을 운영했네.
수업료는 무료이거나 최소한이었네.
국가 예산이 아니라 사회 지도층과 백성의 결합으로 만든 조선시대 방식의 자발적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지.”

“의무교육이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았단 말인가? 천민, 여자의 차별은 없었는가?”

“차별은 없었네.
그림을 잘 보게. 이 안에는 분명 천민 아이도 섞여 있네. 하지만 의복이나 자리 위치에 따른 구별은 불가능하지.
단, 남자와 여자의 교육은 분리했네. 함께 공부하지 않았단 말이지. 김홍도의 풍속화에 여자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일세.
여자는 따로 반을 만들어 교육했을 것이네.
하지만 여자의 경우, 실생활에 필요한 한글 교육이 주류였네. 언문은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배우는 것이 편리하여 굳이 서당에 나오지 않았네. 여러 명의 여자아이를 모아 할머니가 언문을 가르치는 일도 빈번했지만, 공식적이지 않았네.”

“서당은 몇 개나 있었는가?”

“김홍도가 생존하고 있었던 1807년(순조 7년) 기준으로 전국 공, 사립 서당은 약 8만 개가 있었다고 하네.(참고-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 혁명(상. 하) 황태연/한국문화사/2023년)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학생이 9명인데, 그렇다면 조선팔도에 72만 명의 학생과 8만 명 이상의 훈장이 있었다는 말일세.
서당의 수업이 한 번밖에 없겠는가? 이건 합리적인 추론인데, 최소 오전반, 오후반, 저녁반 정도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고, 여기에 여자아이들을 위한 특별반도 있었을 것이네.
서당을 다니는 학생은 대략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하네.
현재 5,500만 명의 한국에서 미장원은 11만 개가 있다고 하네. (KB경영연구소 2020년 기준 통계)
인구 만 명당 21개의 미장원이 있는 것이지.
순조 때, 조선 인구는 1,500만 명 전후였는데, 서당의 숫자가 8만 개이니 얼마나 많았겠는가?
조선 팔도가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로 넘쳐났다고 해도 과하지 않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장교 쥘 베른이 쓴 [서양문명의 치욕]이란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네.
강화도를 침공해서 음식을 구하기 위해 농촌을 쑤시고 다녔는데, 가난한 농가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같은 책을 발견한다네. 거의 모든 농가에서 책과 그림을 발견하고 창피했다고 하네.
책과 그림이 있는 프랑스 농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황태연 교수의 『조선의 출판혁명 (상.하)』를 통해 김홍도 풍속화 서당의 바탕을 이해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서당을 다니는 학생들이 가지고 다니는 책은 어떻게 조달했는가?”

“황태연 교수의 연구와 책을 참조하면,
학생과 훈장 1명당 천자문을 비롯한 주요 경전 4권씩이 필요하다면, 매년 320만 권이라는 책이 필요하지, 여기에 성균관, 향교, 서원, 사찰, 각급 행정기관까지 공급하려면 매년 400만 권 이상의 새 책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쇄 기술을 바탕으로 출판 능력과 시장을 가지고 있었지.”

“책값은 비싸지 않았는가?”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유통된 30쪽짜리 싸구려 소설책 값이 농업노동자 월급 3분의 1을 상회했다지. 반면 19세기 조선의 철학책 『대학(大學』 농업노동자 월수입의 22분의 1, 『중용(中庸)』은 15분의 1에 불과했지. ‘다책종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던 조선 금속활자 활판술의 ‘활인·번각’ 시스템 덕이라네.
아무튼 교육에서 책은 필수인데, 서당에서 책을 팔아 이윤을 남기지는 않았네. 공동으로 구입하여 책값을 낮추거나 후원받아 공짜로 나눠주었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