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4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29)
“이제 간략하게 정리하세.”
“애초 결론부터 말하면 될 것을, 이리 길게 끌다니.”
“우리 그림 속에는 숱한 이야기가 있다네. 눈으로 보고 눈으로 끝나는 그림과는 다르지. 소가 여물을 먹듯이 다시 게워내 씹고 또 씹어야 제맛이 나네.”
“그러긴 하군. 양파 깝질 벗기듯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네.”
“첫째, 월하정인은 두 개의 그림을 합친 것일세.
달과 집이 있는 그림을 먼저 그렸네.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독립된 그림이네.
남녀가 만나고 있는 그림은 왼쪽 그림을 설명하는 보완용이지.”
“삼경에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통금 때문이라고 했지?”
“그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셋이나 있네.
삼경에 돌아다니는 그림 자체가 불법이네. 대중 그림의 속성상, 그림 속에 불법한 내용을 담는 것은 가능하지 않네. 하물며 신윤복같이 이름난 화원이라면 더더욱 조심했을 것이네.”
“삼경이라는 시간대가 왼쪽 그림에만 적용된다면 문제가 없겠군. 일단 사람이 보이지 않고, 집 안에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으니 말이네.
두 번째 증거는 뭔가?“
“그림의 순서가 맞지 않네.
남녀는 집을 떠나 우측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
이 때문에, 많은 평론가가 남녀가 헤어지는 장면이라고 오해했지.
삼경 통금에 만나는 불법을 피하기 위해서는 통금 이전에 만나야 하네.
이런 시차를 생각한다면, 왼쪽에 남녀를 그리고 오른쪽에 달과 집을 그려야 하네. 그래야 남녀가 이른 저녁에 만나 거닐다가 인적이 드문 집으로 들어가 삼경을 보낸 것으로 이해할 것이네.
남자가 초롱을 가져온 이유도 여기 있다네.
어두운 길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불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지.”
“시차에 따른 내용의 전개도 모르고 남녀를 그려 넣었다는 말인가?”
“또 있네. 신윤복은 이별하는 장면을 그리지 않았네. 현재 공개된 신윤복의 그림 중에 헤어지는 장면이나 그러한 내용을 담은 그림은 없네.
신윤복이 이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은 철학과 관련이 있네.
남녀의 이별은 철학적 내용이 없다는 것이 함정일세.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의 해소일 뿐이지.”
“결국 이 작품은 두 개의 그림을 연결한 것이며, 오른쪽 그림은 위작 시비가 있다는 말이군.”
“위작치고는 너무 잘 그렸네. 분명 신윤복의 진품일세.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악마의 편집 때문일세.
남녀 그림이 앞 장에 있고, 달과 집 그림이 다음 장에 펼쳐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네.
그런데 화첩을 만드는 사람이 연결성이 끊어진다고 여겼거나, 두 점을 합쳐 큰 그림으로 만들려고 편집하는 바람에 후대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 것이지.”
“순전히 편집 때문에 이런 혼란과 왜곡이 생겼다는 건가? 편집자가 누구야?”
“1930년대, 종일 매국노 오세창일세.”
“할 말이 없군.”
“둘째, 남녀가 걷고 있는 모습일세.
남녀의 발은 걷고 있는 모양인데, 걷는 모습이어야 내용과 잘 연결되네.
남자는 처음부터 밤길을 걸을 요량으로 초롱을 준비했네.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둘의 좋은 미래와도 연결되지.
이별은 부정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네. 신윤복의 그림은 언제나 긍정적이네.”
“남자가 여자에게 준 선물 이야기는 뭔가?”
“분명 남자가 왼손으로 품 안의 뭔가를 꺼내는데, 그게 뭔지는 표현되어 있지 않네.
화장품, 장신구, 패물, 노리개와 같은 물건, 심지어는 명품이라고 추측하지.”
“설마, 심장을 꺼내 보여주려는 건 아니겠지?”
“정확하네.
셋째, 분명 상투적인 물건은 아니라고 장담하네.
남녀가 삶의 전환점이 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밤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네.
여자는 마지막까지 불안하고 확신이 필요했네. 남자는 결정적 한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지.
남자가 품에서 꺼내고 있는 것은 유형의 선물이 아니라 약속이었네. 사랑의 약속.
그래서 구체적인 물건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지.”
“아, 그림의 세계는 오묘하구먼. 손동작으로 무형의 약속, 신념 따위를 표현하다니.
그저 불륜에 이르는 야릇한 장면인지 알았는데 갑자기 그림 속의 남녀가 달리 보이는군.
어둡고 거친 밤길을 남자가 초롱을 밝혀 함께 걷는다는 것은, 거친 미래를 앞장서서 개척해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신윤복은 남녀 사랑 그림에 관련한 최고의 화원일세.”
“딱 여기까지만 감상해도 훌륭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