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직접 써서 알려야죠"...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의 글쓰기
[화제의 책] 월간 '작은책' 30주년 특별기획 『만국의 노동자여 글을 쓰자』
빛나는 문장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니 그래서 더욱 좋은 글이 있다. 나이 팔십에 처음 한글을 익힌 할머니가 설레는 마음으로 줄 그어진 공책에 또박또박 쓴 글이 그렇고, 현장의 생동함을 진솔하게 쓴 노동자의 글이 그렇다.
할머니들의 글에는 획 하나, 점 하나의 신비로운 경지가 있고 뒤늦게 그걸 알아낸 뿌듯한 자존감이 있으며, 무엇보다 평생을 삭은 내면의 이야기가 곧이 곧대로 표현되어 있다. 세월을 삭힌 마음이 교묘한 솜씨를 거치지 않고 맑고 정직한 그대로 글이 되기 때문에 깨끗한 마음이 드러난다.
한점 티없는 동시이기도 하고 한 세월을 옮겨놓은 대서사시이기도 하기에 쓰는 사람도, 그걸 읽는 사람도 모두 행복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현실과 현장을 솔직히 그려내는 순간, 세상은 본래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도와주는 사회적 인간의 본성은 자본이 득세한 이곳에서 오랜 전에 소멸되고 있는 것 아니던가.
가난하다고, 학력이 떨어진다고, 나이가 어리거나 여성이어서, 또는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업신여겨 하찮게 대하는 차별과 무시는 도처에 널려있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피부색이 다른 노동자는 아예 '짐승'으로 취급하는 잔혹한 세상이다.
암울한 현실이 진실의 글로 표현되면서 노동자의 집단적 정체성, 즉 계급적 각성은 폭발한다. 그때부터 노동자의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전환된다. 세상을 만드는 노동자의 힘이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창간 정신을 내걸고 나온 오래된 잡지가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월간 <작은책>이다. 창간 정신에는 "노동자 글쓰기 운동이 널리 퍼져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삶을 더욱더 풍부하게 가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고 이오덕 선생의 노동자 글쓰기 철학이 담겨있다.
30년 전인 1995년 5월 1일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가정이나 일터에서 겪은 일을 쓴 글을 엮어 창간한 월간 <작은책>이 쉼없이 달려온 30년, 2025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특별기획 단행본을 내놓았다.
새로 엮어 출간하는 『만국의 노동자여 글을 쓰자』는 최근 5년간 『작은책』에 실린 글들 가운데 산업재해와 노동법 2, 3조 개정 취지에 맞는 내용을 주제별로 모아 완성됐다. (유이분 월간 <작은책> 발행인)
쉽지 않은 출판사 살림이지만 30년을 포기하지 않고 책을 내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현실을 기록하고, 서로의 삶을 공감하며, 변화의 주체가 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 그만큼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참사와 죽음을 딛고 일어설 우리 △플랫폼 노동, 그 정거장엔? △非, B, 悲 비정규직, 부정당하는 노동 △먹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연결된 우리, 하나된 노동. 5개의 큰 제목 아래 총 37편의 글이 실려있다.
△2024년 6월 16일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숨진 만 19살 노동자 △2024년 6월 24일 1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공장 대형 화재사고로 발생한 노동자들의 죽음 △2020년 2월 CJB청주방송에서 14년간 프리랜서로 일하다 해고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이재학PD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와 77일간 옥쇄파업 후 쌍용자동차 노조의 장기간 복직투쟁 그 이후... △초짜 탁송기사의 하루가 100년 같던 날 △쿠팡물류센터 해고노동자 최효 인천분회 부분회장의 고발기록 △10년차 여성 대리운전 기사 이미영 카부기상호공제회 공동대표의 일상 △28년간 일한 세종호텔에서 해고된 후 복직을 위해 싸우는 뜨거운 아줌마 허지희씨 △24살부터 포천의 기계공장에서 일한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의 토로...
저임금, 장시간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은 숱한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비정규직 증가, 플랫폼 노동과 이주노동에 대한 착취 강화. 손배가압류와 해고, 무노조 무협상 등 일상적 탄압. 세금감면과 토지무상 임대 등 특혜는 다 누리고 더 많은 이윤을 쫓아 사업장 폐쇄와 노동자 해고를 서슴치 않는 해외 먹튀자본. 이 모든 것과 그 밖의 많은 것들로 이루어진 참혹한 노동의 현실을 노동자의 이름으로 고발한다.
중대재해처벌법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노동현장은 여전하다. 기업의 손해배상청구 남용을 막고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란봉투법'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플러스·쿠팡·배달의민족)가 양산하는 파트타임, 임시직, 계약직, 특수고용직들이 인간답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이다.
버려지고 내몰리는 현실을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더라도,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 마치 악몽처럼 반복되더라도, 아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 온전하게 끝나지 않는 것 처럼 보이더라도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달려나가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누가 풀어주나요. 직접 써서 알려야죠." 『만국의 노동자여 글을 쓰자』 책 표지에 쓰여있는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