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준과 대한제국의 기독교인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10)

2025-04-21     이양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2025년은 기독교 한국선교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개신교는 1885년 4월 부활절에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 미국 북 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 미국 북 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공식적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후 기독교는 140년 동안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개신교 초기의 개종자들 가운데 이준(李儁, 1859~1907) 열사가 있다. 이준 열사의 삶과 활동에 기독교가 아주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이를 탐색한 연구는 거의 없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점령한 이후 해방에 이르기까지 이준 열사는 언급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이준 열사의 삶과 활동에서 기독교적 요소를 간단명료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이준은 대조선국(大朝鮮國)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출신의 법관이다. 법관양성소는 갑오경장 이후 근대적 사법제도를 운영할 법관을 양성하고자 1895년 3월에 설립되었다. 초기의 수업 기간은 6개월, 1903년에는 1년 6개월이었다가, 1904년 12월에는 2년으로 연장되었다. 1907년에는 1년간의 예과를 포함하여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다.

졸업생은 1회 47명(1895년 11월), 2회에 39명, 1908년 제6회 58명 등 모두 209명을 배출하였다. 제1회 졸업생으로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기독교인은 1907년 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와 해방후 제3대 부통령에 당선한 함태영(咸台永, 1872~1964) 목사이다.

이준과 함태영은 모두 함경도 출신으로, 이준은 북청(北靑)이고 함태영은 무산(茂山)이다. 이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 많이 닮았다. 이를 함경도 기질(氣質)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준과 함태영 두 사람의 개종 시기를 보면, 이준은 1895년 법관양성소 재학 시절에 아내 이일정(李一貞, 1876~1935)과 미국 북 감리교의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William Benton. 1856~1922)의 권유로 기독교로 개종한다. 반면에 함태영은 1909년경에 게일(Gale, James Scarth. 1863~1937) 목사에 의하여 개종한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는데, 필자는 함태영이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개종한 것으로 본다.

이준은 두 곳의 교회에 교적(敎籍)이 있었다. 그는 감리교 상동교회를 중심으로는 1897년 설립된 엡윗청년회 활동을 전덕기(全德基, 1875~1914) 목사와 함께하며, 1904년 8월부터는 장로교 연동교회의 게일 목사와 함께 대한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이준이 초기 기독교 인물 가운데 첫 번째 인연을 맺은 동지적 인물은, 미국 망명 후 1895년에 일시 귀국하였던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박사로서, 그는 갑오경장 때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돼 귀국한다. 귀국 직후 1895년 말에 이준과 서재필은 스크랜턴 목사를 통하여 연결된다. 둘은 계몽단체의 조직에 들어가 1896년에 협성회(協誠會)를 출범시킨다.

협성회를 조직 중이던 1896년 2월 김홍집 내각의 갑오경장이 실패로 끝나자, 이준은 3월 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9월 초까지 동경법률전수학교(현재의 와세다대학)에서 국제법을 배운다. 그의 일본 유학은 서재필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서재필은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대한제국에는 대외 활동을 위한 국제법 전문가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협성회는 결성 1년 만에 회원 수가 200명이 넘었고, 당시의 민족의식과 계몽사상 확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준이 한성을 비운 사이 협성회 조직은 완성돼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1896년 7월 2일 창립)와 만민공동회(1898년 3월)가 탄생하는 진원지가 된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하며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해외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한편 전덕기(후에 상동교회 목사)는 독립협회의 운영을 위한 서무(庶務)가 되었고, 독립협회는 첫 사업으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1897년 11월 20일 완공)을 건립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준은 국내에는 없었지만, 서재필에 의하여 독립협회 평의원으로 선출된다.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1일 구국운동을 선언하고, 3월에 민중 토론대회로 '만민공동회'를 처음 개최한다. 한성부의 시민 소상인 지식인 일부가 참여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개화사상은 대한제국 정부와 수구파의 견제를 받는다.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대한제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고, 서재필이 국내에 남긴 정치개혁 사상은 같은 해 9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준의 향후 활동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준은 귀국하자마자 이름을 과거의 이선재(李璿載)에서 이준(李寯)으로 바꾸었고, 공식적으로 독립협회 평의원 활동을 한다.

서재필이 대한제국을 떠난 이후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라는 범국민적인 대회로 확장돼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종로에서 대소 관민을 모아 국정 개혁안을 결의한다.

특히 독립협회는 거리 집회를 거부하고 독립관에서 개최하자는 개혁파 관료들을 설득해 10월 29일 종로에서 각종 사회단체와 일반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민공동회를 열어 민관 합동으로 '헌의육조(獻議六條)'라는 개혁 강령을 채택하도록 했다. 핵심 내용은 근대적 입헌정치의 실현이었다.

여기 관민공동회에서 이준이 연설한다. 초기에 부정적이던 고종도 이 강령을 재가하고 국정 개혁안을 담은 '조칙오조(詔勅五條)'를 내렸다. 그러나 왕을 폐위하려 한다는 수구 세력의 모함과 방해로 독립협회의 입헌 정치개혁과 공화정 추진은 끝내 무산된다.

독립협회의 사상과 활동 방향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이어서 활동하며 연차적으로 발족한 대한보안회 대한적십자 공진회 헌정연구회 대한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국채보상운동기성회 등등에서 이준 열사의 모든 언행과 활동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이준의 이러한 계몽활동 이면에는 서재필이 보여준 기독교 정신과 개혁 사상이 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애국운동은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첫 번째 사회 및 정치개혁 운동이었다. 그리고 대한국민교육회와 대한자강회 국채보상운동에 당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개혁운동에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성직자와 평신도, 그리고 사회의 지성들이 함께 뭉쳐 이루어 내었다”라는 점이다. 즉 초기의 교회는 사회개혁 및 계몽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그들의 활동 범위는 교회 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를 요즘의 교회에 대비하여 보면, 요즘의 교회는 대체로 교단 내부에 안주하며 사회개혁 활동에는 소극적인 감이 있다. 심지어 교회임을 표방한 전광훈이나 이만희 집단 등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사회개혁 운동에 퇴행적 행보를 보인다.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 “예수의 신앙과 정신이 무엇이냐?”하는 것은 신학에서 논하여지는 학문 이상의 것이다. 어떠한 논리보다도 앞서는 것은 실천적 인류애(人類愛)이며, 이것이 예수 신앙의 중심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교회가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호되게 경계하고 비판하였다(참조 ; 누가복음 19:45~46, 요한복음 2:13~17).

우리나라 초기의 기독교 성직자와 평신도는 당시 계몽운동의 중심 세력이었고, 자주자강의 독립운동을 시도하는 잘 조직화된 세력이었다.

「호송되는 105인 사건 피의자」, 1911년. [사진 제공 - 이양재]
「105인 사건 검사 조서」, 1911년, 원본,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1910년 12월 27일에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천주교인) 의사의 종제(從弟)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을 검거하여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고, 1911년 1월 1일부터 신민회 소속의 민족지도자 600여 명을 체포한 후 그 가운데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소한 후 투옥하였다. 잘 조직화된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의 민족주의 개혁 세력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전래한 140주년 부활절 아침에 초기의 기독교인, 특히 1895년에 개종한 이준 열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사회 기여와 자주적 독립운동을 살펴보았다. 당시의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사회개혁 활동이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가 클 것으로 믿는다. 이제 우리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자세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