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월하정인] 2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27)
“화첩 중간에 나누어진 부분이 경계선이라는 말인가? 어쩐지... 왼쪽 집과 풍경에 비해 남녀의 모습이 커서 살짝 거슬렸거든.”
“독립된 그림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분석해 보겠네.
먼저 왼쪽 그림의 조형 요소는 집과 달일세.
그림 속의 집은 초가는 아니고 돌을 다듬어 벽을 세운 고급 기와집일세.
벽이 허물어져 허름하게 보이는데, 이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표현일세.”
“어쨌든, 글과 연결하면 허름한 기와집 안에 남녀가 있다는 말이군.”
“이 그림이 그려진 상황을 재구성해 보세. 물론 그럴싸한 소설일 뿐이니 참고하시고.”
한여름, 한양 종로 근처 풍류방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백성들이 국가 공식 연예인이었던 기생(관기)의 공연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빈자리를 메운 것이 사설 풍류방, 율방(律房)이다.
풍류방은 작은 소극장과 비슷하다.
큰 대청마루나 마당에 십장생, 모란 병풍을 치고 공연 자리를 만들었다. 그 앞으로 천막을 치고 손님이 앉는 멍석을 깔았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손님에게는 다과상을 내어준다. 편안한 보료가 있는 앞자리의 가격은 뒷자리보다 두 배가 높았다. 30여 명의 손님이 모였고 그중에는 쓰개치마를 두른 중년 여성도 몇 명 있었다.
가야금, 거문고, 생황과 같은 악기 합주와 독주에 이어 시조창과 정악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마지막 공연은 가야금과 여러 명의 기생이 나와 합창하듯 부른 노래였다.
한 명이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세 명이 후렴구를 반복해서 합창했다.
선창-깊은 밤 창밖에는 이슬이 내린다.
후렴합창-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
선창-서로 어루만지는 정은 깊어가는데
후렴합창-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
선창-새벽을 넘어 해가 밝아오네.
후렴합창-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
선창-적삼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매
후렴합창-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
선창-눈물로 훗날을 기약하네.
후렴합창-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
모두 함께-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
“김명원의 시를 변주한 노래와 가야금 연주가 애절하군. 적삼을 부여잡고 다음을 기약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날 뻔 했네.”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지만, 공연에 대한 품평은 끊이지 않는다.
날이 저문다.
“감흥이 있을 때 마시는 술맛이 일품인데, 어디 좋은 술집이 있는가?”
“마침 최근에 개업한 기생집이 있는데 가 볼 텐가?”
“곧 통금일세. 순라군(巡邏軍)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지금 일어나시게.”
“술이 남았고 곧 달이 뜨는데 어디 가시나? 밤새도록 마시고 새벽에 가도 될 것을.”
그렇게 몇이 남았다.
보름달이 떴는데 유난히 달무리가 심하다.
“사촌이 음양과 관리일세. 천문에 일가견이 있지. 일찍이 진경산수화를 창안하신 겸재 정선 선생께서도 음양과 교수를 지냈다지. 음음... 오늘이 며칠인가? 보름달에 달무리가 지는 것은 곧 월식이 있다는 말인데, 오늘이 그날일세.
사촌이 말하더군. 10여 년 전에도 부분월식이 있었는데 구름이 두껍고 비가 내려 보지 못했다고 말이야.
삼경쯤이면 월식을 볼 수 있을 것이네. 그때까지 술이나 마시자고.”
월식은 태양과 지구와 달이 일직선을 이룰 때, 지구 그림자에 의해 달이 가려지는 현상을 말한다.
당시 조선의 천문학 수준은 월식과 일식 따위를 정확히 예측하고 관찰할 정도였으며, 일식 시간이 조금 틀렸다고 음양관을 유배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밤 12시 경이 되자 거뭇거뭇한 어둠이 보름달의 아래부터 가리기 시작한다.
혜원은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월식을 처음 보는가? 달을 가리는 것이 우리가 사는 땅의 그림자라는군.
다들 월식을 본 감상을 말해 보시게.”
“따뜻한 손길로 하얀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느낌일세.”
“좀 으스스하군.”
“미인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내리는 듯하네.”
“혜원은 어떤가?”
“지구와 달은 서로 떨어질 수 없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네. 비록 그림자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만나니 애절하네.”
“역시 화원이라 감상이 풍부하군. 이렇게 그림자로 만나는 둘의 마음은 어떨까?”
“그야,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 것이네.”
혜원은 이지러지는 달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붓을 들었다.
연한 먹으로 밤하늘을 칠하고 달 주변을 둥글게 붓질하여 어둡게 칠했다. 단번에 달무리와 손톱 같은 달이 그려졌다.
좌측 위쪽에서 우측으로 사선을 그리듯 기와집 측면을 그렸다.
선은 어둠 속에서 미묘하게 흔들린다.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달이 표현되었다.
붓에 물기를 빼고 꾹꾹 눌러 수풀을 그렸다.
묵이 마를 때를 기다려 청색 물감을 엷게 풀어 달 아래와 수풀에 칠했다.
은은하면서도 신비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기와집 아래는 돌담이고 위는 황토벽이다. 벗겨진 황토 아래 나무로 엮은 틀이 드러난다.
정성 들여 지었지만 관리하지 않고 인적이 건물...
당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밀회에 적합한 장소인 줄 알았다.
“사람을 그리지 않아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 지구와 달이 만나듯 10여 년 만에 남녀가 만나는군. 얼마나 애절할까.”
“남녀가 만나 무얼 하는가?”
“그야 정을 나누는 것이지. 운우의 정.”
“운우의 정을 나누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함이네. 지극한 앎이 진정한 쾌락이 아니겠는가.”
“이 작은 그림에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를 담았다는 말인가? 과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