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 한형석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07)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 한형석은 1910년 2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역시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율성(鄭律成, 鄭富恩, 1914~1976)은 1914년 8월 13일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이 두 인물은 같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매우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영남이 고향인 한형석이 중국 국민당 소속이었다가 광복군으로 넘어왔다면, 호남이 고향이었던 정율성은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이었다가 북의 인민군으로 편입된 바 있다. 이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 음악가로서 “항일 음악에서 북의 정률성, 남의 한형석”이라 묶어서 말할 만한 그러한 인물이다. 이번 호에서는 서예가로서의 한형석의 일면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한형석의 집안 사정
한형석(韓亨錫, 韓悠韓., 1910~1996)은 1910년 경상남도 동래군(現 부산시)에서 독립운동가 한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중국에서 활동할 때 ‘한유한(韓悠韓)’이라는 이름을 썼고, 그의 호는 ‘먼구름’이다.
한형석은 1910년 2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 읍내면 교동(現 부산시 동래구 명륜동 278, 279번지)에서 당시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버지 한흥교(韓興敎, 1885~1967. 독립운동가)와 어머니 안산이씨(安山李氏) 이인옥(李仁玉, 1883~1968)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규용(韓奎容, 1863.12.18~1927.6)은 동래군 지역의 유지로서 1900년부터 담뱃대 공장을 경영하고 중농 이상의 농사를 지어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아버지 한흥교는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동래군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 의료 활동 및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부친 한흥교는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도립마산병원 병원장으로 근무하고, 1948년 부산시에서 한내과를 개원, 운영했으며, 진보당 초대 경상남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 한형석의 교육 상황
한형석은 5살 때 의사이던 아버지 한흥교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과 상해에서 성장한다. 1919년 북경의 육영소학교(育英小學校)에 입학해 1923년 7월 졸업했고, 1923년 9월 사립 노하중학교(潞河中學校)에 입학해 1926년 7월 졸업한 뒤 노하고급중학교에 진학했고, 1929년(24세) 졸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조성환(曺成煥, 1875~1948)의 권고로 상해에 있던 신화예술전문학교(新華藝術專科學校) 예술교육과에 입학해 1933년 졸업하였다. 졸업 당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있었고, 일제가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자 이름을 한유한(韓悠韓)으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 음악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졸업 후 중국 국민혁명군에 복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934년 산동성 당읍현(堂邑縣) 무훈중학교(武訓中學校)의 예술교사 겸 영어교사, 산동 행정인원훈련소 교관, 제남시(濟南市) 산동성립여자사범(山東省立女子師範) 부속 소학교 교사를 맡았고, 1937년 중국희극학회 소속 제2항일연극대장, 1939년 중국 국민혁명군 중앙군 34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을 역임하며 항일 투쟁에 나섰다.
곧이어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결성될 때 이에 합류하는데, 전지공작대 예술조장을 맡은 한형석은 다양한 독립군가와 연극을 창작한다. 군가인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 등을 작곡하였으며, 「국경의 밤」, 항일 가곡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오페라(가극)인 「아리랑」 등을 공연하여 중국군과 일반 대중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中央戰時幹部訓練)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特科總大學員隊) 한청반(韓靑班)에서 교관을 역임한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한형석은 『광복군가집』 1, 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 가곡을 작곡한다. 1944년 10월 한형석은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선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 광복군과 중국군 연합전선을 한층 견고히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4. 광복후 문화운동가로
8.15 광복 후 산동성 제남시에서 교포송환 귀국사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8월에 뒤늦게 귀국하였다. 1948년 11월 서울중앙방송국 촉탁 방송위원을 맡았고, 이후 부산에 내려갔다. 1950년 개인재산을 털어 부산 국립극장인 문화극장을 설립하고 극장장을 맡았으나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 폐업한다.
1952년 전창근 감독의 영화 낙동강의 기획, 재정을 맡아 제작에 참여하였다. 영화 낙동강은 경상남도 공보과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영화이며, 부산 지역 내 예술인들이 참여하였다. 주제가 작사는 이은상, 작곡은 윤이상, 영화음악감독은 김동진이 맡았으며, 윤이상이 작곡한 주제가 「낙동강」은 부산 일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53년 8월 15일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색동야학원과 자유아동극장을 설립하였다. 자유아동극장은 전국 최초의 아동 극장으로 1955년 2월까지 약 11만 8000명의 아동에게 무료로 아동극을 보여주었으며, 색동야학원에서 매일 80~90여 명의 결식, 부랑, 행상 아동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했다.
1955년 2월 극장문화협의회 극장문화분과위원장을 맡았고,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63년 2월 초대 한국연극협회 부산시지부장에 취임하였고, 곧 대만문화사범대학 교환교수로 근무하였다. 그해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서훈 받았다. 귀국 후 1964년 1월 한국연극협회 부산시지부장을 사임했다. 이후 동래 민속예술 보존협회 활동을 하면서 동래야류(東萊野遊)의 복원에 앞장섰다.
1975년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 후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부산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 경성대학교 강사로 활동하였고, 부산 지역 원로들을 중심으로 만든 상록수합창단 단장을 맡는 등 부산 지역의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형석이 부산 상록수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할 당시에 “상록수합창단 공연할 때마다 마지막 레퍼토리로 ‘압록강행진곡’을 불렀다”라고 한다.
1973년 제4대 광복회 부산지회장에 취임해 광복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복지와 독립운동사 조명에 힘썼으며, 1977년 다시 건국포장에 서훈을 받는다. 198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3주년 기념식장에서 「압록강 행진곡」을 직접 지휘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가로 서훈을 받는다. 1996년 6월 15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5. 서예가 먼구름 한형석
먼구름 한형석은 서예에 조예가 깊어 서예가로도 활동한다. 그의 서재(書材)는 애국충정의 내용이 담겨있는 작품이 적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는 힘이 있고 회화적인 한형석만의 독특한 서체를 구사하고 있다. 그의 호를 따서 ‘먼구름체’로 부르기도 한다.
한형석의 서예 작품은 부산광역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임시수도기념관 ‘사빈당’ 현판, 부산대학교 캠퍼스 ‘이문회우(以文會友)’비, 동래 ‘대동병원’ 현판, 부산민주공원 ‘충혼탑’비, 낙동강 하구 ‘이은상 낙동강 시비’ 등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의 서체는 매우 개성이 강하다.
6. 맺음말
필자는 음악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므로 한형석의 음악으로 고찰하고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한형석이 창작한 음악은 크게 ①가극류, ②서정 가곡, ③광복군가의 세 갈래로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간략히 언급하자면, ①가극류는 다시 아동 가극, 항일 가극, 가극, 아동 가무극, 가창 낭송극으로 나뉜다. 한형석이 만든 여러 가극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리랑(啊哩朗)」(1939)이라 할 수 있다. 이 가극은 「서곡」, 「봄이 왔네」(한국 민요, 시골 처녀 독창), 「목동의 노래[牧歌]」(창작 노래, 목동 독창), 「한국 강산 삼천리(韓國江山三千里)」(혁명군 합창), 「아리랑」(한국 민요, 도망자의 합창), 「고향 생각」(한국 민요, 목동과 시골 처녀의 합창), 「한국 행진곡(韓國行進曲)」(창작 노래)으로 구성되어 있다.
②서정 가곡은 대체로 중국 국민혁명군을 위하여 만든 가곡으로 「신가극 삽곡(新歌劇 揷曲)」(1940)이 있다. 그런데 한형석은 ③광복군가를 많이 만들었으며 이를 담은 군가집이 두 권이나 간행되었다.
한형석이 창작한 음악이 잊히지 않도록 공연되고, 그 공연이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널리 유포되었으면 한다. 독립운동가 음악가로서 “항일 음악에서 북의 정률성, 남의 한형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형석의 개성있는 서예 작품은 이 시중에 나오는 대로 매입하고 싶다. 한형석의 서예 작품은 그의 인품과 생애로 보아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북의 정율성은 한국전쟁후에 다시 중국으로 귀환하는데, 만약 중국에서 정율성의 이러한 수준의 작품이 나온다면 남에서 저평가되고 있는 한형석의 작품보다는 100배 높은 호가로 거래될 것이다. 한국의 문화계는 서구 문화로 이미 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