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관통한 어느 부자(父子)의 생애
[화제의 책]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전에는 네가 나를 면회하러 왔는데, 오늘은 바뀌었구나.”
교도소로 아들을 면회온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1933~2020)의 한스러운 인사말이다. 아버지 안재구는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준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지만, 아들 안영민은 1990년 3월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돼 재소자와 면회자 자리가 뒤바뀐 것.
이들 부자의 교도소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94년 이른바 ‘구국전위’ 사건으로 부자가 나란히 구속돼 아버지는 6년, 아들은 3년을 복역했고, 2013년에 또다시 <민족21> 사건으로 부자가 함께 불구속 기소돼 한참을 끌다가 결국 2017,2018년에야 집행유예로 마무리됐다. 안재구는 평생을 법정과 감옥을 오갔던 셈이다.
이같은 안재구‧안영민 부자를 집어삼킨 현대사의 격랑은 뿌리가 깊었다. 안재구의 할아버지, 즉 안영민의 증조할아버지인 우정(于正) 안병희와 해방공간에서 테러에 희생당한 안병희의 동생 안병제의 항일투쟁이 연원이었던 셈이다.
“아직도 해방되던 날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산에서 내려와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거리로 들어오시던 할아버지의 활짝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열세 살 때의 그 기억이 팔십을 넘긴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 온 힘이야.” 안재구의 회상을 안영민이 옮긴 대목이다.
안영민이 쓴 『사형수가 된 수학자 아버지 안재구』(내일을 여는 책)는 안재구 생전 구술을 토대로 지난해 <통일뉴스>에 연재한 글을 올해 안재구 선생 5주기를 앞두고 발간했다.
이미 안재구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개, 1997), 『끝나지 않은 길1,2』(내일을여는책, 2013)이 나와 있지만 안재구 선생의 전 생애를 아들의 입장에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또다른 울림을 주고 있다.
대를 이은 사회운동에의 헌신은 가족들에게 무거운 짐과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 어린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구속과 어머니의 시련을 지켜보며 조숙한 아이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살면서 너한테 제일 미안했던 게 학교에 화장품을 들고 가게 한 거다. 싫었을 텐데도 내색 안 하고 엄마 말 들어줘서 참 고마웠다.” 가장의 구속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교수 사모님은 화장품 방문판매에 나섰고, 안영민의 담임선생님이 딱한 사정을 알고 도와주었던 것.
이 책 곳곳에는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며 만난 사람들과 사연들의 잔잔한 감동과 울컥함이 줄지어 있지만, 책의 부제처럼 ‘사형수가 된 수학자 아버지’의 삶이라는 묵직한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올해로 50주기가 되는 1975년 4월 9일 사법살인으로 희생된 ‘인혁당’(인민혁명당) 8열사 중 한 명인 여정남(1944~1975)과 ‘남민전’ 총책 이재문(1934~1981)과의 관계를 중심축으로 한 현대사의 장면들이 그것이다.
1964년께 이재문으로부터 “경북대 운동 핵심들의 교양 사업을 좀 맡아 주세요”란 제안을 받고 “이제부터 당신을 나의 조직적 상부라고 생각하겠소”라고 화답하며 시작된 관계는 이재문으로부터 1968년 여정남을 소개받아 본격화됐다.
“정남이는 내게 제자이자, 동지이자, 동생이었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나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그러나 여정남이 속한 인혁당 그룹과 이재문‧안재구는 투쟁이냐 역량보존이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고, 1973년 여정남은 대규모 학생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조직사건이고, 역사 속의 인물들이 되고 말았지만 여정남, 이재문과의 만남과 그들의 희생은 아버지 안재구가 겪은 격동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처형된 이문규와의 인연 등 안재구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하기 어려운, 민감한 내용들도 직접 구술 형태로 담겼다. 물론 아직 다 드러내지 못할 이야기들이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들이자 저자인 안영민의 학생운동부터 <민족21> 사건까지의 여정도 날줄로 엮여 있어 500쪽 가까운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단숨에 읽는 데는 무리가 없다. <통일뉴스> 연재시 손볼 것 없는 완벽한 원고를 매주 어김없이 보내온 정성과 글솜씨가 녹아있고 역사의 격랑에서 눈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치매라는 망각의 감옥에 갇혀 시달리면서 아들 손에 뭔가를 쥐어주는 듯 하면서 “입에 말아 넣으시오”라고 한 아버지의 말은 생의 마지막까지 목숨을 건 투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 안재구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아버지를 “평생을 ‘민족주의자’로 살았다...식민, 분단, 전쟁, 독재로 점철된 당대에 맞서 쉼 없이 싸웠다”고 위치짓고 “아버지가 내게 항상 강조한 것은 ‘인간 중심’의 사상었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아버지’라는 큰 산에 의지해 세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음을…. 아버지는 혼돈의 시대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알려준 이정표였다”는 고백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돌보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살린다”는 한강 작가의 경구가 실감나는 힘겨운 나날을 살아내며, 사회운동가 아들이 쓴 앞세대 혁명가 아버지의 일생을 일독하는 것도 각별한 지적 체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