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이부탐춘] 3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23)
[이부탐춘]의 핵심 요소는 춘정에 빠져있는 두 여인과 그 여인들이 바라보는 흘레붙은 개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서로 엉덩이를 붙인 교미 자세가 독특하지 않나? 왜 그런지 알려주게나.”
“그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네. 개의 교미 방법보다 신윤복이 왜 이런 자세를 선택하여 그렸는지가 궁금하지 않는가?”
흘레붙은 개 중에 어느 놈이 수컷이고 암컷일까?
꼬리를 말아 올린 누렁이가 암컷이고, 꼬리를 내린 점박이는 수컷이다.
수컷은 집중하는데 암컷은 뒤를 돌아보며 보채는 표정이다.
어쨌든, 엉덩이를 붙이는 교미 자세는 별로 자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수컷이 암컷의 등을 타는 교미 자세가 훨씬 자극적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체위와도 비슷하기에 감정이입이 쉽다.
그런데도 신윤복이 이렇게 애매한 자세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곱게 해석하면, 너무 자극적이라 두 여인에게 가야 할 관심을 빼앗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두 여인이다. 그런데 자칫 교미하는 개가 주인공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니까 교미하는 개가 주인공이고 이를 바라보는 두 여인은 주변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 그림을 분리해보면 정확히 이해된다.
교미하는 개의 장면은 독자적인 그림이 된다.
하지만 야릇한 표정의 두 여인만 독립시키면 뭔 그림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화면 연출에 탁월한 신윤복은 이런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큰 자극을 주지 않으면서 개의 교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엉덩이 자세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그림에는 다섯 마리의 참새가 등장한다.
나무에 앉아 있는 두 마리, 마당에서 교미하는 두 마리, 교미하는 새에게 돌진하는 한 마리.
미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참새는 화면 구성에서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교미하는 개가 있는데 굳이 반복해서 짝짓기하는 참새를 그릴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신윤복은 다섯 마리나 그렸다.
분명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참새는 두 여인의 내면 상태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역할이다.
일단, 나무에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는 참새는 부부의 화목한 상태를 의미한다.
한 마리의 참새는 남편이 죽어 혼자가 되었다는 의미이자 돌진하는 자세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짝을 찾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마리의 참새가 교미하는 것은 새로운 짝을 만나 행복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참새가 두 여인네의 내면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라면, 새로운 짝은 그림에서 보듯 젊은 여자이다.
남자를 그리지 않고 두 여인을 그린 이유는 명쾌하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인 두 여인이 수컷과 암컷의 교미 장면을 보고 흥분하는 이유는 뭘까?
개의 엉덩이 교미 자세는 체위에 따른 남녀 구분을 할 수 없다.
동성애자의 체위를 은밀히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다.
그럼에도 성별이 확실한 개는 이성애자의 관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여기에 대한 답은 개구멍이다.
젊은 여자는 대문으로 다닐 수 있다.
하지만 과부 집에 외관 남자가 뻔뻔하게 드나들 수는 없는 법.
은밀하게 개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소복 입은 여인은 양성애자이고 어린 처녀는 남자 경험이 없는 동성애자일 것이다.
고려는 성관계에 대한 제약이 느슨했다고 한다. 이를 문란하다고 했다.
조선은 엄격한 성리학으로 성을 억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완전 헛소리이다.
성은 억압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거나 착취한다는 말도 개소리다.
성을 억압하거나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면 인류는 멸종한다.
예나 지금이나, 잘 살든 못 살든 간에 섹스는 언제나 활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억압되었다고 말하는 이북에서조차 불륜이 골칫거리라고 한다.
20여 년 전 이북을 다녀온 사람이 안내원에게 들었다고 했다.
조선은 남녀의 성교를 억압하지 않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여종을 겁탈하면 강간죄로 처벌했을 만큼 성범죄에 엄격했다.
알다시피, 조선 후기는 조선의 전성기였다.
누구나 소고기와 고봉밥을 먹고 찰랑거리는 두루마기에 가죽신을 신고 다녔다.
백성들은 남녀노소 없이 한글을 쓰고 읽으며 부녀자들은 패관소설(요즘으로 치면 남녀 막장드라마)에 빠져 날밤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춘의(春意, 성욕)는 삶의 의욕이다.
이 그림을 보고 눈이 커지고 실실 웃음이 난다면 당신은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