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이부탐춘] 2화 -뻔질나게 드나든 개구멍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22)

2025-03-14     심규섭

먼저, [이부탐춘]의 전체 풍경을 보자.
화창한 봄날이다.
좌측 상단의 꽃나무는 복사꽃일 것이다.
19세기 초 조선에서 가장 흔한 꽃나무는 복숭아나무였다.
현재는 복숭아나무 대신 벚나무(사쿠라)가 대신하고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복숭아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강제로 벚나무를 심었다.

여기서 잠깐,
이 그림의 배경에는 특이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궁궐에나 쓸법한 돌담을 그린 것이다.
단단하고 높은 돌담을 그린 것은 권세 있는 집안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다.
외부와 깊숙이 차단되어 있다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담은 밖에서 안을 보호하고 반대로 안에서 밖을 차단한다.
벽 안쪽은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담을 넘어 두 여성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고 있다.
신윤복 풍속화의 전형적인 훔쳐보기 방식이다.
마치 구중궁궐 여인이나 높은 담벼락과 보안이 철저한 재벌가의 사생활에 환장하는 이유와 같다.

담밖에 화창하게 핀 꽃은 복사꽃이다. 튼튼하고 높은 담벼락은 권세 높은 집안이 아니라 은밀하게 감춰진 곳을 훔쳐보는 장치이다. 허술하게 그린 소나무는 두 여인이 비스듬히 앉기 위한 소품이다. 이 자세를 통해 다리 사이가 보이고 치마를 입었지만 풍성한 엉덩이를 표현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둘째, 집안 마당에 죽어가는 소나무를 배치한 이유는 뭘까?
어떤 사람은 소나무를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본다.
이런 소나무를 두 여자가 깔고 앉은 것은 전통을 뭉개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생생한 소나무가 아니라 말라비틀어지고 가지가 꺾인 형태로 그렸다고 한다.

‘지조와 절개? 흥, 난 그런 거 몰라. 개나 줘.’ 이런 뜻일까?

하지만 소나무의 상징은 절조가 아니라 영원함이다.
소나무는 그리다 만 것처럼 엉성하다.
주저주저한 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마 이 그림을 그리면서 신윤복이 가장 고민한 부분일 것이다.

두 여자가 앉을 자리가 필요했다.
서 있으면 몸이 경직되고 손과 발, 몸동작의 연출이 한정된다.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앉은 모습도 아닌 비스듬히 앉은 자세야말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좌측 여자가 한쪽 다리를 세워 다리 사이를 보이게 하는 연출, 우측 여자가 나무에 걸터앉으면서 드러나는 풍성한 엉덩이도 모두 비스듬히 앉았기 때문이다.

신윤복의 대표작인 [미인도]의 자세를 분석하면, 비스듬히 앉은 자세를 서 있는 모습으로 연출했다.
그런데 비스듬히 앉을 자리가 없다.
바위가 가장 적합한데, 마당 중간에 바위가 있다는 설정은 황당하고 무엇보다 두 명이 동시에 앉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평평한 바위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 시대 집안에 들여놓은 바위나 돌(괴석, 수석)의 모양은 모두 뾰족했고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으니 그 위에 앉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앉은 자리로 소나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는 가장 흔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우측부터 소나무를 그리던 중, 아차 싶다.
소나무를 제대로 그리면 화면 전체를 차지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노송을 그려야 한다.
하지만 소나무와 노송은 상징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전통 그림에서 노송은 ‘완성된 전통’, 혹은 ‘완벽한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이거, 잘못 그렸다간 정치문제에 휘말리겠는걸. 이를 어쩌지...”

신윤복의 집안은 화원 가문이었다.
아버지 신한평은 왕의 초상화를 그려 벼슬을 살았다. 신윤복도 종 3품의 관직을 가졌다. 비록 공명첩을 통한 명예직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한 것이다.

신윤복은 당대 최고의 부자들과 어울린 ‘셀럽’이었다.
이런 신윤복이 조선의 전통질서를 거부하고 비판했을 거란 주장은 터무니없다.

두 여자가 비스듬히 앉을 소나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노송을 그려서도 안 된다.
노송은 튼튼하면서도 구불구불하게 그리고 솔 이파리를 풍성하게 그린다.
이런 노송의 표현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가장 적합한 방법은 허접한 소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 둥치는 두 여자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 단단하게 그리면서 솔잎은 조금만 그렸다.
이마저도 소나무 끝부분은 마감하지 않고 흐려버렸다.
혹여 있을 질책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하, 사헌부 나리. 그냥, 두 여인이 앉을만한 나무로만 여겨주세요. 별 뜻 없습니다.”

개구멍을 의도적으로 그렸다. 사람의 눈을 피해야 하지만 숱하게 드나 들면서 반질반질하게 길이 나있다. 개구멍은 부끄러운 욕망의 상징이자 심각과 긴장을 풀어주는 해학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셋째, 큼직하게 뚫려있는 개구멍이다.
개구멍치고는 크고 반듯하다.
신윤복은 의도적으로 개구멍을 그렸다.
말이 개구멍이지 실은 사람이 은밀히 드나드는 통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는지 개구멍 앞쪽에는 반질반질하게 길이 난 흔적까지 있다.

개구멍은 단단하고 높은 담을 통과하여 안과 밖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밖의 사람이 안쪽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개구멍은 개만 드나들지 않았다.

“어젯밤, 변강쇠가 과부네 개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네. 자네도 한번 가볼 텐가?”

“체면이 있지. 사람이 멀쩡한 문을 두고 어떻게 개구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남정네가 여인네를 찾는 것은, 나비가 꽃을 찾는 이치와 같네. 나비가 개구멍을 마다하겠는가. 가기 싫으면 말고. 나 먼저 가네.”

“아니, 잠깐. 어찌 이리 서두르는가. 같이 가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