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손과 최숙창, 서문보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04)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 초기의 화원 가운데 이장손(李長孫)과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가 있다. 그들의 출신 배경이나 생애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장손(李長孫) 오신손(吳信孫) 진사산(秦四山) 김효남(金孝男) 최숙창(崔叔昌) 석령(石齡) 등이 요즘 비록 유명하나 화역(畫域)을 논할 수는 없다.”라고 이장손과 최숙창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야마도분카관(大和文華館)에는 이장손, 최숙창, 서문보라고 작가명을 각기 적어 넣은 산수도가 모두 여섯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여섯 점의 그림은 한 화가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우리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들의 그림은 구도 면에서 조선초기의 화가 안견(安堅)을 추종한 안견파의 화풍이 배어 있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안견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이들의 생존 연대와 현젼 작품을 필히 규명하여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은 화원으로 활동하면서 안견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1. 이장손과 최숙창, 그리고 서문보의 생존 연대에 관하여
성현(成俔, 1439~1504)1)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1499년(연산5)경부터 그가 사망하던 1504년 사이에 저술한 잡록이다. 이 책에는 고려조 이래 우리나라의 문화, 시화(詩話), 서화(書畫), 인물평, 사화(史話), 실력담(實歷談) 및 기타 문물제도, 민간풍속, 역사, 학문, 종교, 풍속, 지리, 제도, 예술, 음악, 소화(笑話) 등을 모아 수록하고 있다.
즉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이장손과 최숙창을 언급한 것은 “그들은 『용재총화』를 저술하던 15세기 말에 이미 유명한 화원이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성현과 이장손은 나이가 비슷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장손도 세종 때 태어난 인물로 보이는 것이다.
이장손과 최숙창, 서문보에 관해서는 본관이나 생졸(生卒)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장손의 작품활동으로는 기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1469년 낙산사 범종에 보살상 새기는 일에 참여한 것, 1474년 백종린과 ‘예념미타도량참법’에 삽입될 과거칠불(過去七佛)과 미래불(未來佛) 도상(圖像)을 그린 것, 1476년 세조의 어진을 모사한 것이 있다.2)
조선 초기에 화원은 대체로 30세 미만이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장손은 1469년 낙산사 범종에 보살상 새기는 일에 참여하였을 때를 30세로 추정한다면 그는 1439년경에 태어난 것이 되니, 성현과 동갑일 가능성이 있다.
최숙창에 관한 기록은 이장손과 함께 언급된 것 이외에 『성종실록』에 적삼 녹피(赤衫鹿皮) 한 장을 하사받은 것으로 나온다.3)
한편 서문보는 1483년(성종14) 1월 21일 당시 도화서(圖畫署) 제조(提調)였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호의로 9품 체아직(遞兒職)에 천거된 적이 있다.4) 서문보는 최숙창보다 15~20년 정도 늦은 시기의 화원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 태어나 연산군 때까지, 즉 15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화원들이다.
특히 이장손은 안견과 함께 도화원(圖畫院)에 근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야마도분카관에 있는 이 3인의 작품이 유사한 것은 안견의 화풍이 이장손을 통하여 최숙창과 서문보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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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成俔 |
李長孫 |
崔叔昌 |
徐文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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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세종21 |
출생 |
(『용재총화』에 언급 있음) |
(『용재총화』에 언급 있음) |
(『용재총화』에 언급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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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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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범종 보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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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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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념미타도량참법』 도상 제작에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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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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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어용 도사애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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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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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孟이 9품 체아직 천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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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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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衫鹿皮 한 장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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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경 |
『용재총화』 저술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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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 |
사망 (6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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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새 화원의 현전 작품은 일본 야마도분카관(大和文華館) 소장의 「산수도」 화첩(6점)에 들어있는 것 외에는 없다. 이 화첩에는 같은 화원으로서 당대에 활약한 서문보(徐文寶)와 최숙창(崔叔昌)의 산수화도 수록되어 있다. 세 점의 그림에 화가들의 이름이 쓰여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확실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아서 전칭작(傳稱作)들로 주장되고 있다.
이장손의 ‘산수도’에는 원대(元代)의 화가 고극공(高克恭)의 미법산수(米法山水) 화풍이 나타난다. 미법산수 화풍은 본래 북송대(北宋代)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가 창안한 것이나, 원대에 이르러 고극공이 정비했다.
고극공은 붓을 옆으로 뉘어서 점을 찍어 산이나 나무를 그리는 기법인 미점(米點) 등 미불과 미우인의 미법산수 화풍을 따르면서도, 청록산수(靑綠山水) 전통 등을 혼합하여 미법산수 화풍을 변화시켰다. 이장손의 ‘산수도’에서 산과 나무 표현에는 미점이 사용되었고, 미점 위에는 청록 점도 찍혀 있다. 또한 안개 처리로 인해 멀리 있는 산의 하단부는 생략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고극공계의 미법산수 화풍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품이 가로로 길게 그려진 점이나 넓은 공간이 중시된 점 등의 구도는 조선 초기에 유행한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특징이다. 이를 통해 이장손이 고극공의 미법산수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으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풍은 서문보와 최숙창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이들은 사승(師承) 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서로 가깝게 지내며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조선전기 화원과 『예념미타도량참법』 변상도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은 아미타불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모든 죄업을 참회하며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 의식집이다. 현전하는 『예념미타도량참법』 10권2책으로는 1474년(성종5년)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발원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개판(改版)한 책이 있다.
이 책의 상책 권두(卷頭) 상부(上部)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三世佛) 도상이 있고, 하권 권미(卷尾)에는 간기(刊記)와 시주기(施主記)가 있다. 『예념미타도량참법』의 시주기에 왕실의 인수대비·인혜대비를 비롯해 공주·숙의(淑儀)·상궁(尙宮) 등 여인들과 월산대군(月山大君)·제안대군(齊安大君) 등 종친들, 신미(信眉)·학열(學悅)·학조(學祖) 등 당대 중요 고승들의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심지어 판각과 인쇄에 참여한 장인들의 이름까지 나열되어 있어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가적인 불경 간행 사업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책 앞머리에는 과거·현재·미래 삼세불(三世佛)의 도상이 있는데, 이 시주기에 화원(畵員) 백종린(白終麟)과 이장손(李長孫)의 이름이 보여 이 도상은 이들이 그린 그림이다. 즉 권두의 도상 목판화는 연대와 작가가 확실한 조선 초기의 고판화이다.
4. 맺음말
이장손의 그림은 서문보, 최숙창의 그림과 함께 미법산수(米法山水)가 15세기 조선 화단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를 가진다. 또한 이장손이 미법산수를 수용한 점은 당시 산수 화단의 다양성 형성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장손의 활동 연대를 보면, 그가 안견의 영향력 아래 함께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어, 이장손이 남긴 그림은 조선 초기 화원들의 활동 양상을 살피는 데에 아주 중요한 참조가 된다. 즉, 곽희의 화풍을 원용한 안견 작 「몽유도원도」가 안견의 기준 작품일 수 없다는 관점은 이장손과 최숙창 서문보의 그림에서도 엿 볼 수가 있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본조의 안견은 자가 가도이고 소자가 득수이며 지곡인이다. 고화를 많이 보고 그 깊은 곳에 있는 뜻 쓴 곳을 얻어 곽희식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 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으며 유용이나 마원도 마찬가지였다. 뜻대로 못 그리는 것이 없었다. 가장 잘 그리는 것은 산수였다.”5)라는 사실을 적고 있다.
김안로의 이 지적은 옳은 지적이다. 안견은 곽희(郭熙)의 화풍뿐만 아니라 이필(李弼), 유융(劉融)이나 마원(馬遠, 1160년~1225년)의 화풍을 보여주는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그러한 영향력이 세조와 성종조의 화원들에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몽유도원도」가 안견의 작품인 것은 확실하지만, 안견의 기준 작품일 수 없다는 점은, 이러한 안견 당대의 다른 화가들과 안 모 교수가 안견파로 지칭한 15~16세기 모든 화가들의 작품에서 반증된다. 일본 천리대에 있는 「몽유도원도」 한 점을 과대 포장하려다 안견의 다른 작품을 죽여 온 것이 안 모 교수 안견론의 실체이다.6)
주(註)
주1) 성현(成俔)은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을 개산(改刪)했다. 대표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 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밖에 『허백당집』, 『풍아록』, 『부휴자 담론』, 『주의패설(奏議稗說)』, 『금낭행적(錦囊行跡)』, 『상유비람(桑楡備覽)』, 『풍소궤범』,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술이 있다.
주2) 『성종실록』 67권, 성종7년 5월 27일 기사. 4번째 기사.
傳于兵曹曰: “世祖御容模畫安貴生、崔涇、裵連陞職敍用, 白終璘、李長孫敍用.”/ (번역) 병조(兵曹)에 전교(傳敎)하기를, “세조(世祖)의 어용(御容)을 모화(模畫)한 안귀생(安貴生)·최경(崔涇)·배연(裵連)을 승직(陞職)시켜 서용(敍用)하고 백종린(白終璘)·이장손(李長孫)도 서용하게 하라.” 하였다.
주3) 『성종실록』 205권, 성종18년 7월 4일 신축, 1번째 기사.
주4) 『성종실록』 150권, 성종14년 1월 21일 갑인, 4번째 기사.
주5) 金安老, 『龍泉談寂記』, “本朝安堅 字可度 小字得守 池谷人也 博閱古畫 皆得其用意深處 式郭熙則爲郭熙 式李弼則爲李弼 爲劉融爲馬遠 無不應向 而山水最基長也.”
주6) 필자,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684, 「안견신론(安堅新論)의 핵심은 무엇인가?」,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