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양심의 아슬아슬한 경계 [사시장춘]-3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20)
광통교 서화사에 몇몇 화상이 모였다.
“제법 괜찮은 작품 하나를 찾았네. 한번 봐주게나.”
“은밀한 집에서 밀회를 즐기는 남녀를 그렸구먼. 봄꽃도 화창하게 피었고 미인폭포까지 그려 넣어 감흥을 높였네. 앞선 세대에 이름을 날린 혜원 신윤복의 그림이 연상될 만큼 감각적인 작품일세.”
“요즘 주목받는 젊은 화가일세. 진경산수화를 배웠고 중국의 남종산수화에 서양화법까지 익혔다네. 연한 먹에 은은한 색을 섞어 여러 번 겹쳐 붓질한 폭포나 붓을 눌러 뭉개는 기법은 독창적이네. 간만에 신선한 그림을 보는군.”
뒤에 앉은 늙은 화상이 곰방대를 툭툭 치며 한마디한다.
“재주에 비해 내용이 빈곤하군. 손재주만 앞세우는 요즘 젊은 화공들의 고질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군. 자극적인 소재에 온갖 기교를 넣어 사람의 이목을 현혹하고 비싼 값에 팔려는 수작일 뿐일세.”
“거, 독설이 심하오. 사람 무안하게.
신윤복은 이보다 직설적인 작품을 많이 그렸소. 굳게 닫힌 방문과 남녀의 신발만으로 춘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탁월하지 않소? 적절히 숨김으로 춘정을 높이는 절제의 미덕도 갖췄소이다.”
“숨겨서 절제했다고는 하나 남녀의 밀회 장면은 흔해 빠진 소재 아닌가? 신윤복 시대의 춘정은 삶의 활력이었소. 엄격하던 양심과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시대의 요청에 부합했지. 하지만 요즘 춘정은 과도하여 쾌락과 탐욕으로 변했네. 자칫 불륜을 부추기는 그림으로 오해받을까 두렵네.”
“끄응... 틀린 말은 아니오. 뭐 다른 대안이라도 있는 것이오?”
당시 화상들은 미술품 매매, 미술재료의 제작, 수입, 판매, 배첩(표구)뿐만 아니라 비평 역할까지 했다.
젊은 화공을 불렀다.
“어르신의 혹평을 전해들었습니다. 신윤복 선생의 작품을 흠모하여 수십 점을 모사하며 배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바탕에 흐르는 철학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화원은 국가의 공공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화가는 김홍도나 신윤복처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사람을 말하네. 그렇다면 화공(畫工)은 뭔가? 그저 시류에 영합해 남의 그림을 베끼는 기술자일세. 자네는 뭐가 되고 싶은가?”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조선은 그림의 나라이고 그림은 정치의 연장일세. 정부에서는 수백억의 예산으로 매년 1,000여 점에 이르는 그림을 창작해 관료들에게 하사하고 있네. 임금부터 하급 관료까지 같은 정치철학을 공유하기 위함이지.
혜원 신윤복은 그림의 공공성을 정확히 이해했네. 백성들의 분출하는 욕망을 사회적 보상인 풍류에 녹여내어 일가(一家)를 이루었네.”
“저의 어떤 부분이 부족한 것입니까?”
“서양화법을 전통그림에 녹여내는 자네의 표현 능력은 탁월하네. 손기술이 뛰어나다고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닐세.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네.
손기술만 뛰어난 것을 천기(賤技)라고 하네. 천박한 재주라고 말한 것은 그림의 위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기만할 수 있기 때문일세.”
“저는 백성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뿐, 기만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림은, 눈으로 본 것이 가슴으로 들어가 양심과 반응해 감흥을 일으켜야 하지. 이 감흥이 삶의 가치를 높여준다네.
자네의 그림은 눈으로 본 것이 가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목구멍에 걸려 갈증을 일으키지. 이 갈증을 이용해 이윤을 챙긴다면 백성을 기만하는 것과 다름없네.”
“춘정이라는 욕망과 양심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조화의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양심 6할, 욕망 4할이면 최상이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네.”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젊은 화공은 비어있던 앞마당에 여종을 그려 넣었다. 머리 부분이 배경과 살짝 겹쳐지자 어두운 먹으로 덧칠해 감쌌다.
“오호, 적막한 공간에 긴장감이 생겼군. 그런데 종놈도 아니고 주모도 아닌 어린 여종을 그린 이유는 뭔가?”
“10세 전후의 어린 여자는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닙니다. 또한 성에 눈을 뜨는 나이이지만 뭔지는 아직 모르죠. 순수함과 욕망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뒷모습도 아니고 표정이 정확한 앞모습이 아닌 모호한 옆모습을 그린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주안상을 든 모습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안상은 방안 남녀의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욕망이 부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종은 들어가지 않고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또한 욕망과 순수한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기 위함입니다.
반대로 묻겠습니다. 어린 종년에게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정쩡한 모습인데, 방안의 몸짓 소리에 당황한 것인가?”
젊은 화공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돌아갔다.
“양심과 욕망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표현하여 천박함을 벗어났네. 이만하면 좋은 작품이지 않는가. 하하하”
“이 작품을 싼값에 팔기에는 아깝네. 신윤복 그림을 많이 모사한 탓인지 화풍도 비슷하네. 신윤복 인장을 찍는다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텐데.”
“어차피 신윤복의 진짜 인장을 알 수 없을 것이네. 혜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그뿐이지. 내가 아는 졸부가 있는데 안목은 없지만 그림 욕심은 많다네. 다리를 놓아줄 수 있네. 다만 거간비는 따로 챙겨주시게.”
화상은 혜원 글자가 새겨진 낙관을 만들어 작품 상단에 찍었다.
질긴 종이를 덧대어 배첩하고 족자로 만들었다.
그림을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부잣집에서 사람이 와서 그림을 가져가고 묵직한 돈을 놓고 갔다.
돈을 보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부끄러워졌다.
인장을 위조해 찍은 것은 젊은 화공의 존재를 없애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젊은 화공을 볼 면목도 없고 소문이 퍼지면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다.
“돈에 현혹되어 양심을 팔다니...돈을 돌려주고 그림을 다시 가져올 수도 없는데...”
화상은 혼란에 빠져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 부끄러움을 없애려면 변명과 거짓말을 해야 한다. 자신을 합리화할수록 양심은 더욱 손상될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순간, 주안상을 들고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여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개인의 사회적 가치를 훼손당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여종은 방안 남녀의 몸짓을 느끼자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웠다.
여종이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남녀의 성관계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지극히 사적 행위이다.
남녀는 타인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얼떨결에 개입하는 상황이 되었다. 졸지에 훔쳐보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가치를 훼손하면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둘은, 어린 여종은 방안 남녀의 몸짓이 불륜임을 직감한 것이다.
목격자는 사건에 개입하거나 외면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주안상을 들고 왔으니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이 상황은 이제 막 성 본능에 눈을 뜨기 시작한 어린 여종을 불륜의 공모자로 만든다.
여종이 부끄러워한 것은 순수한 자신의 가치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성 욕망은 원초적 본능이지만 부끄러움은 사회적 본성이다.
양심을 방관하거나 어기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마음을 철학적 용어로 염치(廉恥)라고 한다.
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몰염치(沒廉恥), 혹은 파렴치(破廉恥)이다. 파렴치한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모습이 없는 남녀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다.
남녀의 행위는 주변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어린 여종이다.
여종의 마음 상태가 곧 이 그림의 내용이다.
“여종이 방안 남녀의 몸짓이 뭘 뜻하는 지 눈치 챘구먼. 어려도 여자는 여자일 뿐일세. 저 당황하는 모습을 봐. 아마도 몸 한 구석이 뜨거워지고 있을걸. 낄낄낄...”
이렇게 느낀다면 이 그림은 졸작(拙作)이 된다.
하지만 욕망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순수한 양심과 대립하고 있는 어린 여종의 부끄러움에 공감한다면, 이 작품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수작(秀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