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양심의 아슬아슬한 경계 [사시장춘]-1화
[연재] 심규섭의 우리그림 이야기 (18)
혜원 신윤복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 그림이다.
전문가들은 신윤복의 그림이라고 자신 있게 확정하지 못한다.
신윤복의 낙관이 있지만 후대에 찍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신윤복의 권위를 훔친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이 아니다.
신윤복의 그림에서 풍기는 느낌과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을 그리면 으레 풍속화라고 규정하거나 김홍도나 신윤복을 떠올리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이런 관행은 우리 그림의 영역을 극단적으로 좁히는 역할을 한다.
유럽의 인상파나 후기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는 왕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사람이 무수히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도 풍속화라고 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전통 방식의 풍속화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냥 독립적인 그림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그림이 유행했다. 신윤복뿐만 아니라 많은 화가가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다.
슬프게도 남아 전하는 그림은 별로 없다.
작품의 제목인 사시장춘(四時長春)은 그림 속의 주련(柱聯)에서 따왔다.
보통 주련에 들어가는 글자는 5~7자이다. 그런데 그림에는 4자만 보인다.
윗부분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거나, 화상이 신윤복 그림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낙관과 함께 써넣은 것으로 추측한다.
그림을 간단히 살펴보자.
꽃이 피었으나 이파리가 무성하지 않으니 봄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 집에 남녀가 들어가 있다.
분명 부부관계는 아니다.
마루 위의 신발은 가죽신이다. 만남을 위해 의도적으로 외출을 했다는 말이다.
어린 종년이 간단한 주안상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방문은 굳게 닫혀있다. 종년은 방문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어설픈 그림이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과도하게 조합했다.
좌측의 잔가지인지 솔 이파리인지 모를 나무는 산만하다.
지붕도 그리지 않았고 마루 위의 신발이나 댓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그냥 비워두어 몰입을 방해한다.
우측의 깊은 공간 속에 그린 폭포는 뜬금없다.
화면을 구성하는 능력이 의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 허접한 그림인가?”
“미술전문가는 그림을 분석하는 습관이 있네. 때론 전문가와 감상자의 견해가 전혀 다를 수 있네. 최악의 평점을 받은 영화가 대박 나고, 반대로 별 5개를 받은 영화가 쪽박 차는 경우는 허다하네.
이 작품은 미술전문가의 평가와 달리 감상자는 아주 좋아했지. 이 그림은 인기가 높아서 많이 복제되어 팔렸을 것일세. 돈이 된다는 것을 간파한 화상이 신윤복의 낙관을 위조하여 원본처럼 만들려 했기 때문일세.
사실, 그림의 소재는 아주 매력적이네. 화가라면 한 번쯤 그려보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이지.”
신윤복의 그림은 당대에 인기가 많았고 잘 팔렸다.
신윤복이 비싼 청색 물감을 사용한 것은, 인기를 바탕으로 그림값을 높게 받으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세상의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유행과 인기를 끌면 비슷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고 아류가 판치기 마련이다.
조선 후기는 엄격한 선비문화와 욕망의 중인문화가 공존하던 시기이다.
선비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고 중인은 양심의 가치를 부러워했다.
이 작품은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욕망을 극대화한다.
“어렵네. 욕망을 절제하여 욕망을 높인다니.”
“아주 쉽네.
예를 들겠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은 군대에서 먹는 라면이라는 말이 있네. 군대에서는 사회에서 싸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을 쉽게 먹을 수 없기 때문이지.
꽃 속에 사는 사람이 꽃의 가치를 모르고,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과 같지.”
욕망의 절제는 욕망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욕망은 본능이기에 억압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풍선처럼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올 뿐이다.
조선 성리학은 본능적인 욕망과 사회적 양심에 대한 학문이다. 사람의 욕망과 양심의 관계나 구현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욕망을 억압하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인정하면서 적절히 절제하면 욕망의 쾌감을 더욱 높인 것이다.
그래서 법과 도덕을 통해 욕망을 절제했다.
강간, 불륜, 매매춘 따위에는 최고 형벌로 다스렸다. 처첩제도를 유지한 것도 욕망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물게 한 것이다.
“방안의 남녀는 불륜관계인가, 아니면 미혼 남녀의 연인인가?”
“그림에는 어떤 단서도 없네. 어느 쪽이면 자네 마음이 편하겠는가? 마음 편한 쪽이 정답일세.”
“당시에는 아무리 급해도 마루에 신발을 벗어 놓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네. 오히려 마당에 벗어 놓았다면 버선발로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겠는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신발을 놓은 미술적 장치일 뿐이네. 상식을 벗어날 만큼 남녀가 절절하다는 표현일 수도 있네.
이 그림은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일세.
이 그림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일세. 화가도 이를 의도한 것이고.”
“어느 부분이 본능적인 장치인가?”
“남자 신발, 폭포, 어린 종년일세.”
“여성의 신발은 가지런한데, 남자 신발 한쪽이 흐트러져있군. 이건 나도 알겠네. 여성은 이 상황에서도 조신했다는 말이군. 이러한 태도는 여성의 품격을 높여 밀당의 우위를 점하는 행동일세. 남자 신발 한쪽이 흐트러진 것은 남자의 욕망이 고조되어 실수한 것이고 밀당에서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네.”
“어찌 그리 잘 아는가? 혹시 왕년에 선수 생활 좀 했는가?”
“무슨 소리, 나는 한 여자밖에 모르는 쑥맥일세.
흠흠. 그건 그렇고. 폭포가 본능적인 표현이라고 했는가? 폭포는 물이고 위에서 세차게 떨어지며 물레방아를 돌리지. 물 흐르듯이 여성을 매만지고 방아 찧기로 고조되네.
남녀관계는 물(?)로 시작해 물(?)로 끝나네. 오해하지 말게. 커피를 마시며 시작해 술로 끝난다는 말이네. 오죽하면, 사랑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네. 흐흐흐.”
“???”
“어린 종년이 본능적 욕망의 장치라는 것은 언뜻 이해가 안 되네. 무슨 의미인가?”
“이 그림의 주인공은 어린 종년일세. 주안상을 든 종년이 없다면 신윤복 낙관을 위조하여 찍지 않았겠지.
그림 속의 어린 종년은 댕기 머리를 하고 있고, 발육상태는 10세 전후일세.
여자는 발육이 빨라 10세면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에 서 있는 나이이네.
어린 종년이 주안상을 들고 문 앞에 왔는데, 방문이 닫혀있었지. 소리를 내어 부르려고 하는데 방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네. 순간 멀리서 들리는 폭포 소리인지 의심했네.
하지만 가슴이 봉긋 솟기 시작한 여자아이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꼈어. 폭포가 아니라 사람 몸에서 난다는 것을 말이야.
어린 종년은 흠칫 놀라고 몸이 얼어붙었어.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를 느끼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은 마구 뛰었지.
바로 이 지점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 경험했던 그 느낌이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일세.”
“하긴,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생각 없이 소리쳐 부르거나 벌컥 문을 열었을 것이네.
여자아이의 감정은 충분히 느껴지는군.
하지만 성에 눈을 뜨는 순간이 달콤한 것만은 아닐세. 이것이 어떻게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인가? 또 다른 반전이 있는가?”
“충격적인 반전은 없지만 다른 이야기가 있네. 이제부터 하는 말은 꼰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으니 노약자나 임신부는 듣지 않기를 바라네.
여자아이가 방안 남녀의 몸짓을 느끼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동시에 느낀 감정이 있네. 뭔지 알겠는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