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선비화가 학포 양팽손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99)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에서의 정설(定說)은 “양팽손과 김정은 안견 이후에 태어나 활동한 선비화가이지만, 학포 양팽손은 안견파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학포 양팽손의 삶과 그림에 관하여 살펴보자.
1. 조선 중종조 화단의 변화
조선전기의 선비 사회에서는 그림을 잡기(雜技)로 보던 생각이 점점 바뀌어 그림도 시와 마찬가지로 고상한 취미라는 인식이 점점 퍼져 나갔으며, 중종조에 이르러 문인들은 여기로서 그림을 즐기며 회화의 세계에 동참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때의 문인들은 대개 한 분야에서만 장기를 발하면서 일인일기(一人一技)의 일과예(一科藝)라는 기풍이 일어났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산수,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의 화조,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의 대나무,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 1507~1566)의 강아지, 그리고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 1504~1551)의 초충(草蟲)이 그러한 대표적인 기풍이다.
이러한 조선전기의 선비화가 양팽손과 김정, 신잠 등 3인은 모두 조광조를 따르던 당시의 신진 사류(士類)로서 상호 교유하였다. 이 가운데 아차산(峨嵯山) 밑에 살던 영천자 신잠1)은 1534년(갑오)에 능주의 학포를 방문하여 머무른 적이 있다. 이들 중종조의 선비화가 가운데 산수화가로 잊어서는 안 될 선비화가가 바로 학포 양팽손이다. 그는 충암 김정이나 영천자 신잠 보다도 창작 범위가 넓었다.
2. 선비화가 학포 양팽손의 삶
학포 양팽손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양팽손은 직장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로, 증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학포는 1488년 9월 19일 능성현(綾城縣, 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출생한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 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했다. 1510년(중종5)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고,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된다. 이후 정언(正言) 전랑(銓郞)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彦)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나 김정(金淨, 1486~1521)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했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1521년에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2)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했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 박세희(朴世熹) 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이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홀로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 주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544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된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 해(1545년) 8월 8일에 58세로 타계한다.
학포 양팽손은 『소학』 『근사록』 등으로 처신(處身)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578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고,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1630년(인조8)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18) 순천의 용강사(龍岡祠)에 추향되었다. 1863년에는 혜강(惠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선비화가 학포 양팽손 작에 나타나는 소장인은 관지가 아니다
학포 양팽손은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따른 그림을 그렸다”라고 한다. 그의 현전하는 「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2점 소장되어 있는데, 한 점은 왜정 때 데라우치 총독이 1916년 4월 18일 기증한 「산수도」①(유물 번호 : 본관 2034)이고, 다른 한 점은 2017년에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산수도」②(유물 번호 : 구10086)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오랜 논쟁거리가 있어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학포의 「산수도」①이 과연 학포 양팽손의 작품이냐?”하는 것이다. 양팽손이 그림과 글을 모두 제작했다는 의견이 우세하지만, “그림은 16세기에 그려졌고 글은 18세기에 ‘학포’라는 호를 사용한 또 다른 인물이 썼다”라는 주장이 우리나라 회화사학계에 제기되어 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그림에 찍혀 있는 인흔(印痕)을 그동안 “양팽손장”으로 읽어 왔는데, 이 인흔은 “망치재장(罔齒齋藏)”으로 판독하여야 한다고 새롭게 주장하며, 이 산수화 두 점이 양팽손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다.3) 그러나 이 인흔의 글자는 도저히 “양팽손장”이라고 읽을 수 없으므로, 이를 “양팽손장”으로 읽어 왔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망치재장”이라는 인흔은 소장인(所藏印)이지 작가의 관지(款識)에 포함된 인흔은 절대로 아니다.
소장인과 관지는 전혀 다르므로 이를 연결시켜 소장인을 작가의 관지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학포사(學圃寫)”는 작가의 관지일 수가 있지만, “망치재장”은 분명 소장인이다. 그러므로 화제시(畫題詩) 및 관지 “학포사”와 소장인 “망치재장”은 같은 시대의 것이 아닐 수 있으므로, “망치재장”이라는 인흔은 화제시 및 관지 “학포사”를 부정할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화제시와 관지 “학포사”는 같은 필치이다.
‘학포사’로 관지되어 있는 학포 양팽손의 작품을 전칭작으로 폄하하더니, 이제는 양팽손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양팽손이 실제로 선비화가였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망치재장(罔齒齋藏)”에서 “망치재(罔齒齋)”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학포 양팽손은 실제로 선화(善畫)하였던 선비화가였다. 위창 오세창이 1917년에 편찬하여 1928년 계명구락부에서 간행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pp.73~74에서는 『동국문헌록』 「화가편」을 인용하여 양팽손이 “선화(善畫)”하였다라고 하였다.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은 여러 판본(版本)과 필사본이 현전하는데, 어느 판본이나 필사본에 그런 기록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양팽손이 선비화가라는 조선 전래의 관점은 여러 작품과 자료를 통하여 볼 때 의심할 수 없다. 분명히 양팽손이 선비화가라는 사실은 조선시대에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다. 그리고 주2)에서 설명하였듯이 조선전기의 학포(學圃)와 조선후기의 학포헌(學圃軒) 서경창(徐慶昌, 1758-?)은 전혀 무관하다.
4. 선비화가 학포 양팽손의 작품에 관하여
그런데 1916년 이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했던 16세기의 「산수도」①과 크기가 거의 같고, 구도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화풍이 매우 유사한 「산수도」②가 2017년 일본 나라(奈良)현의 야마토분카관(大和文華館)에서 열린 '조선의 회화와 공예' 특별전에 출품되었다. 이 두 작품에는 모두 '학포(學圃)‘의 관지가 있고, 소장인도 같다.
이 새로운 산수도에는 학포가 쓴 “산사는 산간에 어슴푸레 보이고/ 돛배는 큰 강의 수면에 떠 있다/ 어선은 빨리 정박하면/ 풍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라는 시가 있다. 「산수도」②의 크기는 가로 56.7㎝, 세로 88.7㎝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되어 있는 기존의 「산수도」①은 가로 46.7㎝, 세로 88.2㎝인 것을 보면, 두 그림은 크기는 매우 비슷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산수도」가 왼쪽으로 치우친 좌편각구도(左偏角構圖)라면, 일본에서 발견된 「산수도」②는 풍경이 오른쪽에 쏠려 있는 우편각구도(右偏角構圖)이다. 이 두 점의 산수화는 대체로 1521(33세)~45년(58세)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포 양팽손의 작품은 구체적인 전모(全貌)의 연구는 안 되어 있지만 여러 점 현전한다. 일본의 유현재(幽玄齋) 구장품(舊藏品) 가운데는 「산수도」①과 매우 유사한 「산수도」③이 있다.
또한 학포의 문중 후손가에서는 원래 8폭 병풍이었지만 4폭만이 현전하는 「묵죽(墨竹)」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묵죽의 경우 매 폭에 예외 없이 새들이 등장하며 후낙(後落)으로 보이는 화가의 인흔과 작품명이 있다.
이외에도 학포 종가(宗家)에 소장된 작품으로는 다기(茶器)와 함께 각기 연꽃과 영지가 그려진 「연지도(蓮芝圖)」 2폭이 있는데, 이 그림은 문중 후손이 1916년 서울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본가에서 옮겨온 그림이라 전한다. 외손인 이이장(李彛章,1708-1764)이 1761년에 쓴 제발이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원화는 아니지만 “학포선생 산수도”라는 제목이 화면에 있는 「산수도 판각」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판각화는 화면구성 및 산세 표현 나무 처리기법 등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①과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판각화는 양팽손 문집을 발간하던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군자로는 「매죽도 판각(梅竹圖板刻)」이 있다.
이러한 학포 양팽손의 작품으로 전하는 여러 유작과 자료를 보면, 그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묵죽, 화훼, 사군자 등 여러 분야의 작품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학포 양팽손은 사대부이면서도 그림에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한 산수도를 그렸다.
5. 학포 양팽손의 문집과 유묵 서체
학포의 문집은 편차와 약간의 내용을 달리하는 두 종이 있다. 문집 초판본은 1814년(순조14)에 12대손 양즙(梁楫)이 편찬하여 1841년에 간행한 『학포선생유집(學圃先生遺集)』 5권2책(목활자본, 원집 2권 부록 3권)으로 원집에는 주로 시문이 실려있다.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곽(半郭)은 23.1×16.6cm이고, 계선이 있으며(有界線) 주쌍행(註雙行)에 10행18자이다. 판심에 상엽화문어미(上葉花紋魚尾)와 서명 「학포선생문집(學圃先生文集)」과 권수 장차가 있다.
문집 재판본은 1914년(갑인)에 양재경(梁在慶)이 능주에서 간행한 『학포선생문집』 9권2책(목판본)이다. 초판본과 편차를 달리하고 있는 종합적인 문집이다. 권1에 부(賦) 4편, 사(辭) 1편, 시 26수, 유묵 1점, 권2에 소(疏) 1편, 서(書) 1편, 잡저 2편, 명(銘) 찬(讚) 제문 묘갈명 묘표 각 1편, 권3에 세계원류 가장 각 1편, 권4에 부록으로 연보, 권5에 실록초선(實錄鈔選) 척록(摭錄) 신도비명 시장(諡狀) 등, 권6에 상량문 고유문 소, 권7에 비문 묘지명, 권8에 보유(補遺), 권9에 기묘당금록(己卯黨禁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반곽(半郭)은 20.8×17cm이고, 계선이 있으며(有界線) 주쌍행(註雙行)에 10행20자이다. 판심에 상하내향화문어미(上下內向花紋魚尾)와 서명 『학포선생문집(學圃先生文集)』 권수 장차가 있다. 이 재판 문집 권1의 끝장(장12)에는 양팽손이 행서로 쓴 유묵을 목판에 새겨 찍어 넣었다. 판각이 매우 우수하여 필치의 유려함을 잘 볼 수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현전하는 「산수도」①과 ②에는 화시(畵詩)가 해서와 행서를 합친 상태의 해행서 쓰여 있다. 문집에 목판본으로 들어있는 행서와 현전 작품에 쓰여 있는 해행서의 기본 필력과 필치는 상통한다. 서체의 필치는 같은 글자를 찾는 것이 아니다. 한 서가(書家)의 필치도 글자의 크기와 서체 및 시기, 그리고 붓의 종류와 종이의 지질, 오체(五體)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므로, 글씨의 감정은 같은 글자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필력과 필치의 공통성과 분위기를 보는 것이다.(향후 필체의 감정에 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필력과 필치의 공통성과 분위기를 보면 『학포선생문집』에 수록한 학포의 유묵과 「산수도」에 쓰여진 학포가 쓴 화시는 같은 서가(書家)의 필치로 보아도 무방하다.
6. 맺음말
학포 양팽손은 산수, 묵죽, 화훼, 사군자 등 여러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이것은 학포가 충암 김정의 화조와 영천자 신잠의 묵죽를 넘겨 보았던, 창작 소재의 폭이 넓었던 선비화가 임을 말하여 준다. 우리는 충암 김정은 학포가 낙향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시기(1521년)에 사망(1521년)하였으므로 김정의 화조가 학포 양팽손의 화조에 준 영향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영천자 신잠과의 상호 교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학포 양팽손의 연구에 가장 높은 장애(障礙)는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좀처럼 볼 수가 없어 학포에 관한 종합 연구가 어렵다’는데 있다. 현재의 회화사학계에서는 “학포 양팽손이 과연 화가로서의 실체가 있냐?”하는 의심을 하게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든 필자가 보기에는 학포의 주목할 만한 회화 세계는 안견파 화풍의 산수도이다.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학포 「산수도」①②와 안견 작 「소상팔경도」를 비교하여 보면, “「소상팔경도」는 기존에 모 교수가 주장해 온 16세기 중반의 그림이 아니라, 늦어도 학포의 산수화 이전에 그려진, 최소한 15세기의 그림으로 올려 잡아야 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학포 양팽손의 산수도 그림을 전칭작품으로 폄훼하고 부정한다는 것은 조선전기 회화사에서 매우 큰 후과(後果)를 가져온다.
학포의 산수도는 16세기 전반에 유행하였던 편파구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이것은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다. 학포의 작품에는 은둔의 심회를 읊은 제시(題詩)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아, 학포 양팽손의 산수화는 대체로 낙향하여 능주의 학포당에 머물던 시절인 1521(33세)부터 1545년(58세) 사이에, 대체로 1530년대 중반(40대 중후반)에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주(註)
주1) 필자, 「영천자 신잠의 인생과 예술」, 월간 『미술세계』 1993년 6월호(통권 제103호) pp.116~120.
주2) 1987년 2월 7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현전하는 학포당(學圃堂)은 1920년에 후손들이 복원한 건물이다.
주3)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학포찬 산수도>」, 『미술자료』 제92호, 99.187~205.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수미 미술부장은 제찬을 쓴 학포는 양팽손이 아닌 서경창(徐慶昌, 1758-?)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하였다. 그런데 서경창의 호는 학포가 아니라 학포헌(學圃軒)이므로, 그는 제찬을 쓴 학포일 수가 없다. 서경창은 조선 후기의 빈한한 유생으로 『종저방』과 『학포헌집』을 저술한 것으로 보아 실학을 연구한 학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포사(學圃寫) 산수화를 조선후기의 서경창에 연결하는 것은 무리한 논리이다.